한 여름날의 지옥. 2009년 8월5일, 경기도 평택시 칠괴동 쌍용자동차 공장이 그랬다. 그 7개월 전 서울 용산 참사의 직간접적 원인이었던 경찰특공대를 태운 컨테이너가 공장 지붕 위에 상륙했다. 방패와 곤봉을 쥔 무장 특공대들의 시선은 당황한 노동자들을 토끼몰이하듯 좇았다. 마구잡이 구타. 공장 위를 맴돌던 헬기는 최루액을 비처럼 뿌려댔다. 사 쪽의 2646명 정리해고 계획을 막겠다며 76일째 옥쇄파업을 벌이던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조합원 600여 명을 진압하려는 작전이었다. 이날 조합원 100여 명과 경찰 34명이 다쳤다. 이미 열흘 넘게 전기와 물이 끊긴 공장 안에서 경찰·용역 대 조합원 간 충돌이 되풀이 되고 있었다. 그 다음날 한상균(51) 당시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은 회사 쪽에 대화 재개를 요청했다. 이날 노사는 마지막까지 남은 정리해고 대상 조합원 974명 중 468명(48%)은 무급휴직 1년 뒤 생산물량에 따른 순환근무로 고용을 유지하고 나머지 52%는 희망퇴직을 하는 안에 합의했다. 그날 저녁 한 전 지부장은 조합원 한명 한명과 포옹하며 눈물의 작별 인사를 나눴다. 파업 종료 합의 뒤에도 국가와 회사는 ‘폭력시위’로 피해를 봤다며 손해배상 소송 따위를 제기하는 등 쌍용차 노조 집행부와 조합원들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가슴에 멍이 생긴 해고·무급휴직·희망퇴직자 2천여 명에겐 경제적 고통과 가정불화가 쓰나미처럼 밀어닥쳤다. 그 고통이 쌍용차 노동자·가족 22명의 목숨을 앗아갈지, 그땐 그 누구도 몰랐다.
용산 이후 ‘도가니’로 빠져든 사회
지난 8월4일 밤 12시 한상균 전 지부장이 옥문을 나섰다. 노사 합의 뒤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돼 대법원에서 3년형 판결을 받고 복역하다 만기 출소한 것이다. 옹근 3년이다. 그 사이 쌍용차의 경영 실적은 나아지고 있지만 복직된 조합원은 아무도 없다. 노사 합의문은 회사 쪽엔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그 휴지 조각이 22명의 생명줄을 끊어놓았다.
한 전 지부장은 8월6일 오전 서울 대한문 앞 쌍용차 희생자 추모 분향소를 찾았다. 이미 말라버렸다 여긴 눈물샘이 금세 차올랐다. 그날 소설가 공지영(49)은 쌍용차 파업 전후 과정을 기록한 르포 <의자놀이>(휴머니스트 펴냄)를 출간했다. 동료 노동자들을 하루아침에 산 자와 죽은 자로, 승자와 패자로 갈라놓은 쌍용차 정리해고 전후의 사태를, 사람 수보다 모자란 의자를 차지하려고 가족과 친구를 밀어내야 하는 ‘의자놀이’에 비유한 것이다. 8월6일 저녁,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카페에서 한상균 전 쌍용차 지부장과 소설가 공지영이 마주 앉았다. 대화의 시작점은 다시 3년 전 평택 공장이었다.
공지영 작가(이하 공) 3년 전 우연히 뉴스를 통해 쌍용차 조합원들이 경찰에 진압당하는 장면을 봤다. 그때 ‘저 사람들 처음 싸우는 사람들 같다’고 생각했다. 30초가 안 되는 그 짧은 장면을 어떻게든 잊으려고 노력했지만, 실은 한 번도 잊지 않고 있었다. 늘 미안했다. 그렇지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제발 빨리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랐다. 그때 빚을 이제야 갚는 것 같다. 소설 <도가니>를 쓰고 있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쌍용차 문제가 생겼다. 내가 예지 능력이 있는 건 아닌데, 용산 참사 이후 우리 사회가 점점 ‘도가니’로 빠져들더라.
한상균 전 지부장(이하 한) 3년 전 파업을 마무리할 당시엔 워낙 많은 생각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그걸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마지막 생각은, 살려고 투쟁하는 건데 그 투쟁 때문에 많은 가족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을 안길 순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가장 큰 문제는 조합원들의 안전이었다. 공권력이 투입되면 수백 명이 사고를 당할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러나 정작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 국가는 ‘설마’ 하며 별다른 고민 없이 공권력으로 밀어붙인 거 같다.
서로를 미워하게 만드는 실체 없는 ‘유령’
공 <의자놀이>를 쓰는 동안 특이한 경험을 했다. 쌍용차 문제에 대한 상황 파악은 금방 됐다. 그런데 집필을 시작하면 잠을 못 자는 거다. 빙의 같은 현상이었다. 잠을 못 잔 지 사흘째 되던 날 하품을 하는데, 그 순간 지금까지 하품조차 한 번 안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름이 끼쳤다. 하품도 하지 않는 건 완벽한 초긴장, 병적인 상태다. 생각해보니 파업 끝나기 전 공장에 전기·물 공급 끊기고 경찰 헬기 뜨던 상황이 그랬을 거 같더라. 한 조합원한테 물어봤더니 그때 잠을 못 잔 조합원이 많았다는 거다. 조합원들이 그런 초각성 상태에서 공포까지 가중됐다면 정말 빨리 정신 상담을 받아야 했는데, 국가와 회사 쪽은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고 있다.
잠을 잘 수 없을 거란 두려움으로 글을 쓰지 못하던 와중에 오래전 참석을 약속한 평택역 앞 거리 미사에 갔다. 미사 도중에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 한 조합원 아내한테 휴지를 좀 달라고 하니까 이 양반도 울고 있더라. 그날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섭다고 안 쓰고 있을 때가 아니다, 쓰지 않을 거면 여기서 포기하고, 그게 아니면 잠 못 자도 쓰자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약간 잠이 오더라.
한 자료를 통해 77일간의 파업 과정을 파악했다고 들었는데, 어느 부분에서 몰입이 됐는지 궁금하다. 쌍용차 사태는 다양한 시각에서 볼 수 있지 않나. 22명의 희생에 대한 동정일 수도 있고.
공 이게 단순히 노동계급의 이야기가 아니라 99.9%들의 일이구나, 내 자식이나 이 사회의 흥망성쇠가 쌍용차 문제 해결에 달렸구나 싶었다. 경영이 어려워져 노동자들이 ‘자구책이 있으니 한번 해보겠다’고 하는데도 사 쪽에서는 ‘시끄러워. 너희는 나가’라며 몰아냈다. 법대 교수들한테 그런 법이 어딨냐고 물어봤더니 ‘어쩔 수가 없다. 이게 신자유주의다’라고 하더라. 그때 이게 내 문제가 되겠구나 싶었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너무 힘들었을 것 같다. 노동자와 노동자를 서로 미워하게 만들지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유령, 그 유령하고 싸워야 하니까 사람들이 돌지. 선생님한테 맞은 애들은 친해질 수 있지만 선생님이 시켜서 서로 따귀를 때린 애들은 친해질 수 없다. 상대방이 잘못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말이다.
한 문제의 발단은 2005년 쌍용차를 인수한 중국 상하이자동차가 기술을 빼가는 ‘먹튀’ 경영을 한 것이다. (상하이차는 쌍용차 인수 때 약속한 투자 계획을 지키지 않다가 2009년 법정관리를 신청한다.) 언론 등이 이런 문제는 외면하고 노사 문제로만 몰아갔고, 공권력이 과도하게 개입했다. ‘유령’은 거기서부터 떠오른 것이다.
시민사회나 작가 단체들이 나선 건 ‘이게 내 자식이나 이웃의 문제다’라는 공분이 생겨서인 듯하다. 그런데 이런 (연대의) 싹이 자라기 전에 잘라야 한다고 여기는 집단이 있다. 양쪽 간 접점을 과연 어느 지점에서 만들지 힘겨루기 과정에 있는 것 아니겠나. 요즘 자본의 사병들이 공권력의 비호 아래 노동자들을 두들겨패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으니….
공 자료를 보니 쌍용차와 계약을 맺은 경비업체가 용역 1인당 하루에 24만7천원 정도를 지급했다고 신고했더라. 헬기 한 번 띄우는 데 600만원이 든다더라. 그런 돈으로 노동자를 고용하면 안 되나 싶었다. 경찰은 쌍용차 평택 공장에다 10년묵은 최루액 2천ℓ 이상을 부었고, 테이저건·고무탄 따위 온갖 무기를 시험했다.
하루아침에 빈민·빨갱이, 그리고 죽음
해외자본의 무책임과 부정, 정부의 방관, 무리한 공권력 투입,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정리해고, 산 자와 죽은 자로 나뉜 노-노 갈등과 공동체 붕괴, 무력화된 노사 합의…. 쌍용차 사태는 ‘운이 좋아야 피해갈 수 있는’ 우리 사회 문제의 집합체다. 내 일이 아니라고 안도하는 사이 2천 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 가운데 22명이 죽어나갔다.
공 쌍용차 파업 노동자들이 너무 범생이였다. 별로 낮지 않은 월급을 받았고, 준법정신이 투철했다. 스스로 경찰과 대적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거지. 우린 학생운동 하며 경찰을 비난하기도 했는데, 이 사람들한테는 그런 상황이 범법인 거다. 게다가 평택이 보수적인 지역이고. 별걱정 없이 모범적으로 살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빈민·빨갱이가 됐고, 죽음의 경험까지 덧붙여진 거다.
[%%IMAGE5%%]<hr class="view">“쌍용차는 다른 대공장보다 원만한 노사관계가 유지돼왔던 사업장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인간 말살을 경험하니 모두 패닉에 빠질 수밖에 없다. 개인의 선택이지만 구조적으로 죽임을 당한 사회적 타살이다.”<hr class="view">한 쌍용차는 다른 대공장보다 노사관계가 원만하게 유지돼왔던 사업장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인간 말살을 경험하니 모두 패닉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극단적인 선택으로 연결되고. 개인의 선택이지만 구조적으로 죽임을 당한 사회적 타살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 국가와 회사는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공 진압 과정에서 공권력이 ‘너희 따위는 언제든지 죽일 수 있고 벌레만도 못해’라는 메시지를 준 것 같다. 특히 이명박 정부 들어 ‘돈 많은 놈이 나를 때리면 공권력이 나를 보호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더 커진 듯하다.
한 파업 와중에 ‘한상균은 파업 끝나면 민주노총으로 간다, 누구누구는 정치한다, 조합원들만 희생양이다’ 이런 헛소문들이 돌았을 때 상처를 많이 받았다. 개개인은 나약하다. 파업을 하며 그런 면들을 낱낱이 봤지만, 지난 3년간 그 기억을 싹 지웠다. 지우지 않으면 세상 보는 눈이 비뚤어져 내가 살지 못할 것 같았다. (파업 조합원들한테 폭력을 행사하고 회사 편을 든 사람들도) 우리 조합원인데 왜 용서를 못하겠는가. 생존을 빌미로 흔들었을 때, 누구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몰고 가는 자본이 악랄한 것이다. 영혼을 짓밟는 일이다.
공 여러 자료를 보며 한 전 지부장에 대해 궁금했다. 이렇게 존경받는 지도부는 처음 본 것 같다. (2009년 6월26일 관리직·비해고 노조원 3천여 명의 공장 진입으로) 처음 (노-노) 충돌이 있었을 때 노조 지도부가 사 쪽 직원들과 맞서지 말라고 방침을 내린 건가, 아니면 파업 조합원들이 착해 쇠파이프를 못 든 건가?
한 같은 조합원들한테 폭력을 쓸 수 없다는 방침은 분명했다. 이를 조합원들에게 내부 방송으로도 알렸다.
공 적극적으로 폭력을 쓰지 못하게 했다는 건데, 그럼 어느 순간부터 조합원끼리 맞선 건가?
한 처음엔 서로 냉정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것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용역들이 한 거다. 우리가 밀릴 수밖에 없는 입체적인 작전이 있었다. 그러다 노-노 간 우발적 충돌이 발생했고 감정이 격앙되게 된 것이다.
공 취재할 때 그 이야기를 듣고선 ‘싸우는데 가릴 게 뭐 있어’라고 생각했다. 파업 노동자들이 전기가 끊긴 도장공장 안에 있던 비상발전기를 자동차용 페인트가 굳지 않게 하는 데 썼다고 하더라.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 회사 손해 걱정하게 생겼나. 전기 끊긴 도장공장의 불을 밝히는 데 비상발전기를 써야지, 그게 싸움을 이기자는 사람들이 할 일인가. 그렇게 울컥울컥하는 심정이 들다가도 결국 이런 것 때문에 이 사람들이 이기겠구나, 이 바보 같은 패자들이 결국은 그 바보스러움 때문에 다시 승자가 되겠구나 싶었다. 사람들한테 ‘올바르게 사는 것이 결코 손해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가르쳐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바보 같은 일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오히려 사람들에겐 많은 걸 준다. 뉴스에서 보던 것이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았을 때 사람들은 울컥한다. 그렇게 행동해줘서 조합원들에게 감사했다.
비상발전기로 도료 굳지 않게 한 사람들
한 해고자·희망퇴직자,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드는 조합원일지라도 쌍용차가 망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못 봤다. 그만큼 애착을 가지고 있다. 쌍용차는 강소회사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활력을 찾아갈 수 있는 조건이 있는데, 경영진들이 이를 외면하면 안 된다. 차량 판매 캠페인 등 일터에 복귀할 수 있는 조건들을 찾을 수도 있다. (현재 쌍용차의 대주주인) 마힌드라 경영진은 그들이 강조해온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국내에서 한 단계 도약하려면 하루빨리 해고노동자에 대한 대책을 내놔야 한다.
한상균 전 지부장은 공지영 작가와 얘기를 마친 뒤 지하철을 타고 동료들이 있는 대한문으로 다시 향했다. 출소한 지 얼마 안 된 그에겐 휴대전화가 없다. 지하철 안 승객들이 저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광경도 낯설다. 진중한 말투에선 오랫동안 비워둔 아버지·남편·아들 자리에 대한 고민이 묻어났다. 3년이란 시간은 많은 걸 변하게 한다. 그러나 흐르는 시간만으론 쌍용차 노동자들의 비극을 막아낼 수 없다. 다시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 잘못한 이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희망, 그토록 원하던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필요하다. 이제 의자놀이는 그만 두고, 비극의 강을 건널 희망의 징검돌을 놓는 일에 모두가 힘을 보태야 한다.
글 박현정 기자 eyeshoot@hani.co.kr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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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작가는 그동안 공개된 쌍용차 관련 기록이나 기사·칼럼·인터뷰 등을 참고해 집필에 나섰다. 원문을 작성한 이들이 인용을 허락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공 작가가 쌍용차 사태 3년의 전 과정을 직접 현장 취재한 게 아닌데도 ‘르포르타주’의 형식을 취한 탓에 일부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대학장이 르포 작가 이선옥씨의 글을 인용해 2012년 4월26일치 <경향신문>에 기고한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는 불행하다’라는 칼럼의 재인용을 둘러싼 ‘표절’ 논란이 대표적이다. 공 작가가 직접 쓰지 않고 인용한 글인데도 출처를 책의 맨 뒤에 간략하게 언급해 다수의 독자들이 공 작가의 글로 오해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1차 저작권자인 이선옥씨의 동의를 받지 않은 점 등은 잘못이라는 하종강·이선옥씨의 문제제기가 있었다. 이에 대해 출판사 휴머니스트 편집팀은 8월9일 <의자놀이>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쌍용차 이야기를 더 울림 있게 전하고 싶어, 일부는 본문 중에 인용 출처를 밝히고, 일부는 책 뒤편에 인용 출처를 수록했고, 해당 칼럼 중 일부가 이선옥 작가 글의 재인용이라는 사실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다”며 “두 분의 요청에 따라 이후 출간되는 책에선 문제가 된 글을 삭제할 예정”이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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