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덕군 출신인 윤은진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2000년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 취업했다. 윤씨는 1년 남짓한 회사 생활을 마치고 백혈병을 얻어 2003년 고향에서 23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은 윤씨 가족의 동의를 얻어, 그가 2000년 삼성전자 입사 때 연수 과정에서 쓴 일기(수련기)와 고향에서 투병 중에 써내려간 일기를 공개한다. 일기장에는 첫 직장에서의 설렘, 그리고 병마와 싸우던 시기의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그 밖의 윤씨 이야기는 그의 어머니 정아무개(64)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복원했다.
“전 기흥 아니면 다른 곳은 싫었거든요”
<font color="#638F03"> “집을 떠나서 가족과 헤어지는 게 이젠 안 슬프지만, 앞으로 내가 겪어보지 못한 인생을 살아갈 거 같아서 그런지 기대가 됩니다. 무엇보다 제가 원해서 왔기에 힘든 일이 있어도 노력과 최선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열심히 교육에 임하겠습니다. 앞으로 3주가 즐거울 거 같아요. ^.^”(2000년 3월14일 수련기) </font>
윤씨의 고향은 울릉도다. 오징어잡이 배를 타던 아버지를 따라 그는 중학생 시절까지 울릉도에서 살았다. 영덕에 이사온 것도 아버지를 따라서다. 포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가 삼성전자에 입사한 건 사촌오빠의 도움이 컸다. 당시 기흥공장에서 일하던 사촌오빠가 추천해 입사 시험을 치렀기 때문이다.
<font color="#638F03"> “오늘은 정말 유쾌하지 않은 하루다. 몇 명이 가버리고…. 기분이 너무 좋지 않다. 너무 속상하다. 정들었는데…. 이제 남은 사람들과는 다 같이 가고 싶다. 빨리 시간이 흘렀으면. 이젠 나 자신도 많이 약해졌나봐. 눈물이 막 나고 그런다. 신체검사 발표를 아직 안 해서 심리적으로 너무 불안하다. 언제쯤 발표되나요? 기다리는 게 너무 초조해요. 좋은 생각만 하려고 노력하는데요! 내겐 너무 중요한 일이라서 생각이 자꾸 드네요.”(2000년 3월17일 수련기)</font>고등학교 시절, 윤씨는 공부는 잘했지만 몸이 약한 편이었다. 빈혈이 있었던 그는 연수 과정에서 진행하는 신체검사 전날에도 결과가 잘못 나와 입사가 취소될까봐 걱정했다. 실제로 신체검사에서 탈락한 입사자들은 연수원에 들어온 뒤 며칠이 지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윤씨는 합격 판정을 받았다.
<font color="#638F03">“나도 이제 새 마음, 새 각오, 새 출발을 해야겠다. 선배님 오늘 오전에 라인을 봤지만, 아직은 생소하고 그래요. 반도체 용어 약어를 잘 외우면 현장에서 일 잘할 수 있나요? 전요! 삼성 기흥사업장에 입사한 건 제가 정말 원했구요, 전 기흥 아니면 삼성 다른 곳은 싫었어요. 그래서 제가 지금 여기 있구요. 전 정말 열심히 할 각오가 돼 있어요.”(2000년 3월23일 수련기)</font>
3주 동안 반도체 관련 교육, 단체활동 훈련 등을 거친 윤씨는 2000년 4월 경기도 수원에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서 반도체 식각 공정 오퍼레이터로 일했다. 식각 공정은 반도체의 회로 패턴을 만들기 위해, 가스나 화학약품을 이용해 불필요한 박막을 깎아내는 작업이다.
<font color="#638F03"> “교육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금요일이면 기숙사로 들어간다. 내가 앞으로 몇 라인에 가서 일하게 될지…. 내 바람은 K2 가고 싶다. 너무 욕심이 많은가. 기흥에 있는다는 자체가 행운일지 모르는데. …앞으로 내가 살아가면서 3주간 교육받은 일은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머물 것 같다. 아니 잊혀질 수 없을 것 같다. 즐겁고, 슬펐던 순간들. 힘들고 그랬지만, 여기 온 걸 후회한 적도 되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다.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2000년 3월30일 수련기)</font>
“참으면서 해야지…” 두 달 만에 고향으로
윤씨의 회사 생활은 즐거웠다. 쉬는 날이면 시간을 내 회사 동료들을 데리고 영덕에 내려와 바닷가에서 놀다 가기도 했다. 윤씨 어머니도 “은진이는 늘 회사에서 잘하려고 애를 썼다”고 기억했다. 윤씨는 가족을 보려고 일을 마친 뒤 밤늦게 버스를 타고 포항에 자주 내려왔다. 밤늦은 시간에는 영덕행 버스가 없어 터미널에서 새벽까지 기다린 뒤, 첫차를 타고 집에 와 하룻밤을 머물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곤 했다.
<font color="#638F03"> “입사한 지 1년 17일 되는 날이다~. ○○이랑 전화 통화도 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변한 게 많이 없다. 나도 예전의 나니까 보고 싶은 얼굴이 참 많다. ○○. 출근을 해야 하네. 열심히 참으면서 해야지.” </font>
2001년 3월30일. 윤씨는 입사 때 쓰던 수련장을 꺼내 짧은 일기를 남겼다. 그러나 일기를 쓴 뒤 두 달 만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유 없이 몸이 아파서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었다. 집에 돌아온 윤씨의 손에는 사마귀가 가득했다. 가족들에게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좋은 회사에 가놓고선 왜 그러냐”며 타박을 했다. 고향 근처 병원에서는 병명을 알 길이 없었다. 큰 병원에 가서야 백혈병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font color="#638F03">“하나님, 저 소원합니다. 건강이 빨리 나아서 우리 가족 슬프지 않게 하고 싶습니다. 너무너무 고생하며 사신 우리 엄마 웃으며 살게 해주고 싶습니다. 나 땜에 노심초사하는 울 아빠 걱정 덜 끼치고 싶어요. 내 목숨처럼 생각하는 내 하나밖에 없는 동생 ○○ 누나 땜에 슬퍼하는 모습 너무 가슴 아픕니다. 제게 하나밖에 없는 언니 슬퍼하지 않게 해주세요. 하나님 저희 어머니 평생 저희 삼남매만 보고 사셨습니다. 저 빨리 건강해져 우리 가족에게 못다 준 사랑도 줘야 하구요. 제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건강해져서 행복한 모습으로 만나고 싶어요. 저 건강해지면 열심히 착하게 살게요. 하나님 제 말 헛되이 되지 않게 해주세요.”(2003년 6월9일 투병일기) </font>
마지막 일기장, 동생에게 쓴 편지
윤씨는 회사를 그만둔 뒤 백혈병 판정을 받기 전까지 집안 형편을 걱정하며 고향에 있는 식당에서 음식을 나르는 등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나 윤씨는 백혈병 판정을 받은 지 석 달 만인 2003년 8월, 세상을 떠났다. 윤씨 어머니는 딸을 보낼 때까지만 해도 딸의 죽음에 회사가 관련됐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나중에야 산업재해 판정을 받으려 했지만, 사고 뒤 3년 안에 이의신청을 해야 한다는 조항 탓에 포기해야 했다. 회사에서 받은 위로금이 전부였다. 2003년 6월16일, 병원에서 투병 중이던 윤씨가 일기장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은 동생에게 쓰는 편지였다.
<font color="#638F03"> “누나가 오늘은 수치가 2510이나 됐어. 그래서 넘넘 기뻐. 엄마랑 이제 영덕 빨리 갈 수 있으니까, 행복해. 누나가 우리 식구 넘넘 사랑하는 거 알지? 누나 꿋꿋이 이겨낼게. 오늘이나 낼 니 전화 오겠지? 이 기쁜 소식 전해줄게. 머리가 아프다. 그래서 길게 못 쓰겠다. 사랑하는 동생아 누나 맘 알지? 누나가 너 많이 사랑해. 그럼 이만 줄일게.”</font><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DFE5CE"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EBF1D9"><tr><td class="news_text03" style="padding:10px"><font color="#A341B1"> “3주간 교육받은 일은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머물 것 같다. 힘들고 그랬지만, 여기 온 걸 후회한 적도 되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다.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font>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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