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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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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슬쩍 보고는 ‘달릴까’라고 물어요”

‘거꾸로 만세’ 능동적 놀이를 하고, 공격성을 관리할 외적 통제인 되기 등 아빠만이 줄 수 있는 것
등록 2012-06-22 12:13 수정 2020-05-03 04:26
오승훈 기자가 아들 윤재(5)와 집에서 야구놀이를 하고 있다. 아빠는 아이와 신체놀이를 많이 한다. 이런 아이들은 사회성이 좋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오승훈 기자

오승훈 기자가 아들 윤재(5)와 집에서 야구놀이를 하고 있다. 아빠는 아이와 신체놀이를 많이 한다. 이런 아이들은 사회성이 좋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오승훈 기자

아빠는 아직 젖을 떼지 못한 딸아이를 조심스럽게 보듬어 안았다. 얼굴을 묻은 아이가 엄마인 줄 알고 젖을 찾아 가슴팍을 여기저기 더듬었다. 장난기가 돈 아빠는 슬쩍 자신의 가슴을 물렸다. 아빠 젖을 문 아이는 ‘우엥∼’ 하며 금세 입을 뗐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본능적 반응이다. 아빠 김정우(38)씨는 딸 서진이와 이렇게 논다.

젖은 못 주지만 ‘거꾸로 만세’는 해요

서진이는 이제 17개월이 됐다. 젖도 뗐다. 김씨는 두 달 전부터 육아휴직에 들어갔다. 아내의 육아휴직이 끝나자 직장에 휴직계를 냈다. 올해 말까지 서진이에게는 아빠가 엄마다.

지난 6월13일 김씨와 서진이를 만나러 갔다. “아이가 갑자기 열이 39도까지 올라서 병원에 가야 해요.” 소아과에 다녀온 서진이는 유모차에서 반쯤 졸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목이 부었다고 했다. 김씨는 기자에게 유모차를 맡기고 멀찍이 떨어져서 담배를 피웠다. 기자에게는 아이가 없다. 기자가 어설픈 ‘까꿍’을 해보았지만 별 반응이 없다. “애아빠, 유모차 앞을 내려야지. 햇볕이 센데….” 김씨가 유모차를 밀며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맞은편에서 오던 아주머니 한 분이 나무라듯 말했다. 김씨는 능숙하게 유모차 앞가리개를 내렸다.

집에 들어서자 아이가 있는 집이 그렇듯, 온통 아이 물건이다. 거실에는 유아용 매트리스가 깔렸다. 아이가 가지고 노는 온갖 책들과 미끄럼틀이 보인다. 유아들의 ‘머스트 해브’라는 뽀로로 카트와 러닝홈이 거실을 차지하고 있다. 문틀에는 그네도 걸렸다. 김씨는 다진 소고기, 버섯 등을 넣어 직접 만든 밥을 아이에게 떠먹이더니 병원에서 받아온 약을 개어서 먹였다. 귀에 전자식 체온계를 대보니 열이 조금 내렸다. 김씨는 색감과 음감을 키워준다는 유아 교육용 DVD를 틀었다. 그러고 노는데 서진이가 ‘응가’를 했다. 김씨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기저귀를 벗기더니 욕실로 가서 엉덩이를 씻기고 새 기저귀를 채웠다. “하루에 6번 정도 기저귀를 간다”고 했다.

아이가 조금 기운을 차렸는지 ‘에헤헤∼’ 하며 거실을 왔다갔다 한다. 아빠들은 어떻게 노냐고 물었더니 “거꾸로 만세”를 한다며, 서진이의 두 발목을 잡고 거꾸로 들었다. 아이는 좋단다. “엄마랑은 놀아주는 방법이 달라요. 아내는 이런저런 대화를 스스로 만들어가며 한참 놀아주는데 나는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아빠의 양육은 뭐가 다를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했다. 아빠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있을까. 김씨는 “놀아주는 친구가 엄마에서 아빠로 한 명 더 늘었다는 거 말고 일반화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요”라고 반문한다.

교육학자들의 말은 조금 다르다. 아빠의 양육 참여가 많을수록 아이의 사회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엄마와는 다른 아빠의 역할을 통해 아이의 사회적 경험이 풍부해지고 대인관계도 좋아진다는 것이다.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고 산책하고 밥 먹이고 거꾸로 들고 놀아주는 행동 하나하나에 ‘아빠만이 줄 수 있는 의미’가 있다는 얘기다. 신체를 이용한 놀이를 많이 해주는 아빠를 둔 아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는 연구도 있다. 활동성이 뛰어나고 사람을 대할 때 생기는 여러 갈등 상황도 잘 이겨낸다고 한다.



교육학자들은 아빠의 양육 참여가 많을수록 아이의 사회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산책하고 밥 먹이고 거꾸로 들고 놀아주는 행동 하나하나에 ‘아빠만이 줄 수 있는 의미’가 있다는 얘기다.

아빠엄마 중 누군가 ‘악의 무리’가 돼야

“아버지는 어머니와 상호작용 형태나 내용 면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며 자녀의 사회성 발달에 큰 영향을 끼친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시중을 드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반면, 아버지는 아이와 놀아주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 아버지는 레슬링이나 술래잡기 등과 같이 더 육체적이며 자극적인 방법으로 놀이에 참여하는 반면, 어머니는 덜 자극적이고 언어 중심적이며 장난감을 통한 놀이를 주로 한다.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더 능동적으로 상호작용을 한다.”(황선실, ‘유아기 아버지의 양육효능감과 양육참여도와의 관계’)

아빠가 아이를 거꾸로 들어도 교육이라는 이런 연구 성과들을 되새김질하면 ‘교육의 평범성’ ‘교육의 일상성’이 확 느껴진다.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학생지원팀에서 일하는 김기호(37)씨는 큰딸 민지(5)와 바깥 놀이를 자주 한다. 부부가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함께 사는 어머니가 민지를 주로 맡아 키운다.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민지는 ‘뽀로로 카트’를 ‘뽀로로 구루마’라고 부른다. “할머니는 아이랑 신체적으로 놀아주기 힘들잖아요. 주로 집 안에서 놀아요. 그래서 자전거를 탈 때는 아빠가 나가게 되는 거죠.” 책을 좋아하는 김씨는 아이를 안고 책을 읽는 습관이 있다. “그런 탓인지 몰라도 아이가 공부방이나 책에 대한 애정이 커졌어요. 거실에서 놀다가도 자기가 알아서 책을 보러 가더군요.” 아내는 김씨가 아이를 권투하듯이 대하는 것을 싫어한다. 목말 태우는 것도 못하게 한다. “아이를 안고 뽀뽀하고 치근대고, 이런 식의 스킨십이 강한 편인데 아내나 어머니는 아이가 귀찮아한다며 못하게 하죠. 하지만 저는 이런 게 아빠와 아이 사이에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연구자들은 여자아이에 비해 좀더 공격적인 남자아이들의 ‘공격성’을 관리할 외적 통제인으로 아빠가 필요하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직장인 정재영(38)씨는 아들 시연(4)이가 잘못을 하면 따끔하게 혼을 낸다. “아내는 대부분 오냐오냐하지요. 어릴 때는 사고가 잡히는 단계잖아요. 아빠와 엄마 중에 누군가는 ‘악의 무리’가 돼야 올바른 습관을 잡아줄 수 있다고 봅니다.” 시연이에게 아빠는 ‘힘을 쓰는 사람’이다. “걷다가 힘들면 엄마한테는 안아달라는 말을 잘 하지 않는데 아빠와 있으면 100% 안아달라고 해요. 예전에는 공놀이를 하다가 요즘엔 달리기를 좋아하는데, 공원에 가면 내 얼굴을 슬쩍 쳐다보고는 ‘달릴까’라고 물어요.”

‘구식’ 루소도 인정한 아빠의 역할

장 자크 루소는 그의 책 에서 “아이는 어느 유능한 교사보다도 분별력 있는 평범한 아버지에 의해 더 훌륭한 교육을 받는다”고 썼다. ‘참다운 유모는 어머니, 참다운 교사는 아버지’라는, 엄마와 아빠의 역할을 못박은 루소의 구식 교육관조차 바쁘고 피곤한 이 땅의 아빠들에게는 잘 먹히지 않는다. 하지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일단 아이를 붙잡고 레슬링이라도 해보자. 아빠만이 해줄 수 있는 평범한 행동들이 아이를 키운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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