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자꾸 생을 마감하는데…. 내 말이 힘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오늘 생을 끊고자 했다면 그걸 좀 보류할 마음이라도 생겼으면 해요.” ‘상처 입은 치유자’로 첫발을 내디디며 박동운(67·전남 진도군 진도읍)씨가 밝힌 소망이다. 그는 두려움과 치욕을 안겨준 고문과 18년간의 감옥살이, 간첩 낙인으로 인한 사회적 차별 등 온갖 고통을 견뎌낸 ‘고문생존자’다. 28년간 간첩 누명을 쓰고 살다가 2009년 11월 재심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다른 고문생존자 10여 명과 함께 국가배상금의 일부를 내놓아 재단법인 ‘진실의힘’을 설립했다. 상처에서 돋아난 내 삶을 여전히 고통 속에 있는 다른 국가폭력 피해자들과 나누기 위해서다. 박동운씨는 6월26일 유엔이 정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을 앞두고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다. 안내자로 나선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자신의 상처를 피하지 않고 직면해 치유받는 과정에서 몸과 마음으로 치유의 본질을 실감한 사람이 결국 최고의 치유자가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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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 발표대로라면 12살 때부터 간첩
진도농협 예금계장 일을 맡았던 박동운씨는 36살이던 1981년 3월 영문도 모른 채 서울 남산 지하실로 끌려갔다. 두 달 넘도록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서 끝도 없는 고문을 당한 끝에 간첩이 됐다. 이른바 ‘진도간첩단 사건’이다. 박씨가 남파간첩인 아버지(박영준)를 따라 두 차례나 북한에 다녀오는 등 24년간 고정간첩으로 활동했다는 죄목이었다. 안기부 발표대로라면 박씨는 12살 때부터 간첩 활동을 한 셈이다. 실제로는 항일운동을 하던 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돼 박씨는 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르고 자랐다. 박씨의 어머니(86·2010년 사망), 남동생(65), 작은아버지(76·1998년 사망) 부부, 고모(71) 부부 등 6명에게도 간첩 혐의가 붙었다. 당시 간첩사건을 만든 이유에 대해 강용주 진실의힘 이사(아나파의원 원장)는 “간첩을 잡았는데 신고한 사람이 따로 없으면 수사관들이 3천만원을 받았다. 5공 출범 초기에 전두환 정권에 충성하고 승진할 기회도 얻으니 1석3조였다”고 설명했다. 강 이사는 1985년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14년간이나 복역하면서도 준법서약을 거부한 최연소 비전향 장기수였다.
박씨는 죽음보다 징그러운 고문을 겪었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박씨를 공중에 매달아 몽둥이로 타작하고 얼굴에 고춧가루 물을 퍼부었다. 발가벗긴 채 철창에 손목을 묶고 라이터로 몸에 난 털을 태울 때, 그는 수치심을 견딜 수 없었다. 옆방 문을 열어놓고 어머니 신음 소리, 작은어머니 고문 소리도 들려주며 만삭인 마누라를 불러 고문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는 63일 만에 무릎을 꿇었다.
또 다른 고문생존자도 모멸감에 몸서리쳤다. “옷을 벗겨놓고 마구 고문하고는 잠자기 전에 자기들(고문가해자)끼리 술을 마시며 나보고 노래를 부르라고 한다. 더 맞지 않으려고 발가벗은 채로 노래 부르는 게 얼마나 굴욕적인지…. 맞아서 아픈 건 지나가는데 그런 것들은 계속 남는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아니, 아예 잊어버렸다.
박동운씨는 법원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다. 첫 재판부터 몸에 난 상처와 멍 자국을 보여주며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신체감정도 신청했다. 하지만 판사는 법대를 두드리며 “안기부에서 시인해놓고 왜 여기서 부인하느냐”고 야단쳤다.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됐다.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떨어질 때까지 그 4개월간이 그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서울구치소, 옛날 서대문구치소 운동장 왼편에 사형대가 있었는데,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정신을 못 차려 자빠지기도 하고 계단도 못 걸어다녔다. 밤에는 사형대에 올라서는 꿈만 꾸었다.”
1998년 가석방으로 나올 때까지 18년간 박씨는 수인번호 ‘3211호’로 불렸다. 그는 한 번도 교도관에게 인사하지 않았다. 평범한 시민에게 간첩죄를 뒤집어씌운 전두환 정권에 고개를 숙이기 싫었다. “감옥살이하며 나중에 헌법을 보니까 제12조에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고 적혀 있더라. 우리 가족은 고문을 당해 간첩이 됐는데, 우리 가족이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었단 말인가?” 1994년 광주교도소에서 재심이라는 절차를 처음 알게 된 뒤 박씨는 법전을 읽으며 가족의 무죄를 증명하리라 거듭 다짐했다.
‘빨갱이’ 낙인에 ‘불가촉천민’이 된 가족
징역 7년을 살고 만기 출소한 작은아버지 박경준씨가 먼저 명예회복에 나섰다. 1988년 9월 한국형사정책학회가 연 정기학술회의에서 끔찍한 고문으로 거짓 자백해 간첩이 됐다고 증언했다. 조작간첩 사건의 실상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그는 간첩죄로 복역 중인 사람들 중에는 어부로 납북됐다 송환되거나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된 가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누명을 쓴 사람이 상당수 있다고 말했다.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국민을 향해 국가가 ‘사이코패스’와 다를 바 없는 폭력을 휘두른 사실을 고발했다. 13년 전 화병과 고문 후유증으로 죽기 전까지 박경준씨는 간첩 누명을 벗으려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총무로 일했던 송소연 진실의힘 이사는 “국가가 그런 짓을 했다는 걸 처음에는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수사기록을 보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간첩사건이 수두룩했다”고 말했다.
박동운씨 사건에서 유일한 물증은 망치였다. 간첩들이 지녔다는 난수표·무전기·라디오·권총 따위를 망치로 때려부쉈다는 게 안기부의 발표였다. 조작은 어설펐다. 1971년 아버지를 따라 월북했다는 시기에, 박씨가 남한에서 고향을 방문해 주민등록을 옮긴 기록이 남아 있었다. 63일간의 고문으로 받아낸 ‘나는 간첩이다’라는 자백만 남았다. 그것도 법정에서 당사자가 부인했다. 당시 판사나 검사가 안기부의 수사기록을 제대로 읽기만 했어도, 사형을 구형하거나 선고할 수 없는 상황이다.
2009년 11월 28년 만에 열린 재심 재판에서 박씨는 간첩의 굴레를 벗었다. 재판부는 “20년 이상 피고인 가족이 당한 고초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라며 “같이 살아온 우리 모두가 함께 부끄러워해야 할 과거의 일”이라고 말했다.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삶을 되돌릴 순 없었다. 박동운씨의 어머니 이수례씨는 4년 만에 출소했지만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에 돌팔매질까지 당했다. 반공을 최우선으로 하는 한국 사회에서 ‘불가촉천민’ 신세였다. 동네를 떠난 어머니는 지리산 자락의 쌍계사로 들어가 공양주로 몸을 의탁하며 아들을 기다렸다. 아들이 출소한 뒤에는 고문으로 쇠약해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병원 침대에서 생의 마지막 나날을 보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니까 귀 있는 데, 얼굴, 가지색으로 멍이 안 든 부분이 없더라.” 박씨가 울먹이며 말했다. 고문후유증은 저승으로 가는 길까지도 모질게 따라붙었다.
박동운씨는 고문후유증과 대면했다. 2005년 9월 정혜신 박사와 함께 국가보안법 국회 청문회에 나가 고문 피해를 증언했고, 2010년 6월 다른 고문생존자들과 함께 국가배상금을 출연해 진실의힘을 세웠다.
고문 치유모임 “같이 내놓고 끝까지 내보입시다”
1998년 출소 뒤 7년간, 국회 청문회에 나갈 때까지 박씨는 교도소가 그리울 만큼 ‘사회적 고문’에 시달렸다. 안기부에 끌려갈 때 뱃속에 있던 아이는 18살이 돼 있었다. 5살 아들과 3살 딸에게도 아내는 자신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바른대로 말하지 않았다. 미국 유학을 갔다거나, 작은마누라와 살림을 차렸다고 둘러댔다. 감옥에서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도 모두 아내가 없애버렸다. 간첩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게 하려는 몸부림이었다. 맺기도 전에 끊긴 부자·부녀 관계는 끝내 이어지지 않았고 부부도 결국 이혼했다. 박씨는 외진 마을에서 양봉을 하며 고립된 채 살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던 고통을 그는 국회 청문회에서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그 이야기를 듣던 방청객들이 같이 울어주고 깊이 공감했다. 돌덩이를 매달고 사는 것 같던 박씨의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듯했다.
고문 치유가 절실하다는 인식을 같이한 인권활동가·종교인·의료인·변호사 등이 2008년 7월부터 고문치유모임을 본격적으로 열었다. 매주 월요일 저녁 7~9시에 봉은사가 마련해준 고요한 방에 모여앉아 고문피해자 5~6명과 정신과 전문의 1~2명, 심리학자가 참여하는 고문피해자 그룹상담을 진행했다.
“고문 경험을 하고 나면 20~30년이 지나도 반복적으로 그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 불안의 극단을 매번 재경험하는 것이다. 일상을 살아가는 게 상당히 어렵다. 우리같이 내놓고 끝까지 밀어서 내보이면 치유할 수 있다.” 정혜신 박사가 2009년 2월 고문치유모임 2기 오리엔테이션에서 한 말이다.
치유모임은 2011년 3월 6기까지 이어졌고 고문피해자 40여 명이 참여했다. 치유모임 1기인 김양기씨는 “다른 고문피해자들이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동일한 상처를 간직한 채 누구에게도 말을 못하고 산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무겁고 힘든 이야기를 술술 풀어냈다. 서로 위로하고 달래주며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아내의 표현을 빌려보면, 얼굴에 가끔 웃는 모습이 떠올랐고 날카로웠던 눈초리가 사라지고 말투도 부드러워졌다. 김씨는 여순사건 당시 보도연맹 사건으로 아버지가 처형돼 유복자로 태어났다. 고향 전남 여수에서 금세공을 하던 그는 1986년 보안대로 끌려가 고문으로 간첩죄를 뒤집어쓰고 6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2009년 무죄판결을 받았다.
20~30년의 힘겨운 노력 끝에 하나둘 ‘무죄’를 받아내고 고문치유모임을 통해 마음이 가벼워진 고문피해자들은 무죄 이후의 삶을 꿈꾸었다. 김양기씨는 “우리가 이 사회에 무언가 의미 있는 메시지를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처럼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한 활동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고 말했다.
“피나는 싸움 뒤에 쓰게 된 면류관”
조작간첩 10여 명이 무죄판결 뒤 자신들이 받거나 받을 국가 손해배상금의 10%를 출연해 진실의힘을 설립하기로 했다. 삶은 되돌릴 수 없어도,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이 사회에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재심 재판을 맡은 법무법인 지평지성도 5%를 보탰다. 2011년 12월까지 출연금과 후원금이 10억원 가까이 모였다. 1972년 불고지죄로 구속 기소됐다가 2011년에 무죄를 받고 출연금을 낸 임봉택(65)씨는 “억울하다는 걸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 없어 몇십 년을 속없이 살다가 진실의힘 덕분에 마음을 풀었다”고 말했다. 박동운씨는 “그전에도 어떻게든 살았는데 보상금 몇억 받아서 1억원 낸다고 죽지 않는다. 다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 때 무료로 재심 재판을 맡아주고 진실을 밝히려고 수십 년간 고락을 함께한 동료들과 하는 일인데 망설일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1990년대부터 조작간첩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실태조사를 벌이고 고문피해자의 재활·치유를 지원하는 인권활동가로 일해온 송소연 이사는 “진실의힘은 고문생존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돌려받으려는 피나는 싸움 뒤에 쓰게 된 면류관”이라고 표현했다. “존재 자체를 말살당했던 조작간첩이 인생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등장하게 된 제2의 생일 잔칫상”이라고도 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고문피해자에서, 자신의 고통을 견뎌내고 다른 사람들을 보듬는 고문생존자로 재탄생한 것이다. 진실의힘은 2010년 6월 창립식 축문에서 “우리가 동굴 같은 어둠 속에서 걸어나올 수 있었기에, 어둠 속에 있는 이들과 햇빛 아래로 손잡고 나올 수 있다는 자부심이 생겼다”고 밝혔다.
대우자동차에서 일하다 1985년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돼 30일간 고문을 받았던 이준호(63)씨는 “우리처럼 억울하게 감옥살이했는데도 진실 규명이나 재심 재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모자간첩’으로 몰려 7년의 징역을 살았고 2009년 7월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씨는, 고문후유증으로 세상과 벽을 쌓은 김장호(71)씨와 김태룡(63)씨를 끈질기게 설득해 치유모임에 참여시키고 재심 재판도 청구하게 했다. 2011년 10월 쌍용차 해고노동자 가족 치유 공간인 ‘와락’에 처음으로 기부금을 낸 것도 바로 진실의힘이었다.
매년 6월26일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 행사를 주최하는 진실의힘은 지난해 인권상을 제정했다. 제1회 수상자로는 “인간의 삶은 폭력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 서승 일본 리쓰메이칸대학 교수(1971년 재일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돼 19년간 복역)가 선정됐다. 김양기씨는 “노벨상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거부가 만들었지만 진실의힘 인권상은 고문의 공포와 두려움을 이겨낸 생존자의 존엄과 의지가 뭉쳐 있다”고 말했다. 제2회 인권상은 6월26일 서울 중구 무교동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수여되며, 수상자는 6월20일에 발표된다. 박동운씨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가족조차 외면했을 때 외국의 인권단체와 시민들이 보내준 따뜻한 연대를 기억한다”며 “아시아 이웃나라들의 고문피해자들에게도 우리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 것”이라고 말했다.
울음바다가 된 ‘생존자’의 무대
고문생존자들은 다시 터닝포인트에 섰다. 고문생존자에서 한발 더 나아가 ‘치유자’가 되려는 여행에 나선 것이다. 지난 2월14일 서울 종로구 가회동 노틀담수녀회 교육관에서 진실의힘 치유학교 입학식이 열렸다. 박동운·김양기·김태룡·김장호씨가 아픔 속에서 울고 있는 이들을 감싸안을 1기 치유자로 첫발을 내딛는 자리였다. 박동운씨는 “괴로운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위로해줄 자질이 있을까 의문”이라고 걱정했다.
하지만 고문생존자가 치유자가 될 수 있는 이유를 강용주 이사는 명쾌하게 설명했다. 첫째, 고문과 감옥살이, 간첩 낙인으로 인한 사회적 차별 등 온갖 고통을 견뎌낸 귀중한 경험이 있다. 둘째, 고통을 당했기에 울고 있는 타인에게 절절히 공감한다. 셋째, 국가폭력에 맞서 진실을 마침내 밝혀냄으로써 인간은 폭력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삶으로 보여주었다.
20년간 감옥살이를 한 김태룡씨는 2011년 4월 미술가 임민욱씨가 연출한 라는 공연에 주인공으로 출연해 치유자로서의 힘을 발휘했다. 임민욱씨는 “고문피해자라는 정체성의 김태룡이 아니라, 고문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김태룡, 인간 김태룡의 존엄성을 무대 위에 올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극장은 연일 만석이었고 젊은 관객들은 김태룡씨와 함께 울고 웃었다. 무대감독이 우느라 교신에 답신을 못할 정도였다. 공연은 팸스초이스 공연작으로 선정됐고, 공연 기록 영상은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 초대받았다. 6월26일까지 서울 마포구 서교동 미디어극장 아이공에서 마련된 임민욱 작가 기획전 ‘사회적 틈 이미지와 장치 사이’에서 이 작품을 다시 만날 수 있다.
51일간의 고문 수사 끝에 간첩으로 조작돼 무기징역을 받았던 재일동포 김장호씨는 치유센터 ‘와락’을 오가고 있다. 그는 “말 안 해도 거기에 가 있으면 저런 사람들도 살고 있는데 하는 느낌을 줄 수 있지 않겠나 싶어서” 쌍용차 해고노동자를 만난다.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은 “역경을 이겨내신 아버지 같은 분들이 찾아와서 우리를 보듬어주고 눈물 흘리며 가슴 아파해주는 모습이 굉장히 뭉클하다”고 말했다.
이것이 치유의 본질이라고 정혜신 박사는 말했다. “저렇게 힘든 경험도 인간이란 극복할 수 있구나, 그런 실체를 눈앞에 보면 순간적으로 자기 고통이 객관화된다. 내 고통이 바닥인 줄 알고 허우적거리다 이게 아닐 수도 있구나라고 확인하면 자살 충동이 심했던 사람도 살아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사람 안, 강한 생명의 힘
3월31일까지 치유학교 7강과 졸업식을 참관한 홍현정 수녀(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는 “불의에 짜부라지지 않고 고통에 도망하거나 파묻히지 않고 오히려 상처를 끌어안고 당당하게 세상을 나가는 상처 입은 치유자들에게 모든 사람 안에 있는 강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힘을 목격했다”고 평했다. 사람은 분명, 꽃보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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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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