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규제의 달인’.
김종인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에게는 이 별명이 가장 어울릴지 모르겠다. 1981년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거의 모든 정권이 그를 대기업 정책의 전면에 세웠다. 재벌들에는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이란 말이다.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도 그는 경제부총리 후보로 항상 물망에 올랐다. 그가 최근 재벌개혁론을 타고 다시 돌아왔다.
그의 속내가 궁금했다. 경제팀 기자 3명이 모두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곽정수 선배가 만든 약속에 이정훈 팀장까지 따라나섰다. 지난 2월7일 서울 부암동의 한 사무실에서 그를 마주했다. 약속 시각이 오후 2시였는데, 나올 때 시계를 보니 시침이 5시에 다가서고 있었다. 거의 3시간에 걸친 질문 공세에 노학자의 답도 거침없었다.
모든 정당이 경제민주화를 말하고 있다.
다행이다. 이 문제를 잘 풀면, (효율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와 (평등을 중시하는) 민주주의의 딜레마를 풀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문제를 앞서 해결한 나라는 독일이다. 오늘날 미국도 일본도 독일을 배우자고 한다. 독일은 큰 정부를 얘기하지 않는다. 강한 정부를 말한다. 사회가 안정되면서 경제 효율도 가진 유일한 나라다.
재벌 문제의 실마리를 어떻게 풀까.
‘거대 경제세력’(그는 종종 재벌을 굳이 이렇게 표현했다)의 존재가 분명한 현실이다.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 재벌들도 인식을 바꿔야 한다. 지금 당장 거대해 보이지만 재벌들의 존재도 위협받는다는 것을 말이다. 따라서 양보와 절제의 미덕을 보여야 한다. 그런데 사람은 본질적으로 절제를 잘 못한다. 그러니 누군가가 절제를 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결국 재벌 개혁이 필요한 것 아닌가.
재벌이 탐욕을 절제하도록 해야 한다. 모든 걸 긁어먹지 못하게 해야 한다. 살이 피둥피둥 찐 암탉이 앞마당에서 먹이를 다 쪼아먹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암탉의 목을 비틀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나눠먹을 것도 없다. 벤츠가 돈 잘 번다고 유통회사를 만들지는 않지 않나. 암탉이 돌아다니지 못하게 울을 쳐야 한다.
‘울’의 구체적인 내용을 말해달라.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실행의 시점에서 집행할 일이다. 대선 이후에나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경제발전과 사회안정 사이의 역동적 균형을 찾는 것이 정부의 책무라고 본다. 1987년 개헌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은 대통령의 권한이 세지만, 나중에 대통령의 권한을 능가할 세력이 재계”라고. 재벌 문제를 둘러싸고 미래에 사회갈등이 폭발하려 할 때, 헌법 조항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헌법 119조가 마련됐다. 지금 봐라, 재벌이 언론과 지적 엘리트, 법률 시장을 장악하고 있지 않은가. 보수적인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문제가 생기면 어떤 판결을 내리겠나.
일부 보수 진영에서 새누리당이 ‘좌클릭’했다는 말이 있다.
미친 사람들이지. 헌법 정신을 받아들인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좌클릭인가. 거기에 순응하지 않으면 나중에 어떤 결과가 나올까. 미국의 ‘어큐파이’(Occupy·점령)를 봐라. 수만 명이 데모하지 않나. 우리나라에서도 2만~3만 명이 재벌 사옥 앞에서 어큐파이하는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될까. 공권력이 가서 때려잡을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재벌이 쓸데없는 저항을 하는 경우가 많다. 저렇게 가면 절대로 안 되는데 그렇게 한다. 여기서 차를 돌려 다른 데로 가야 한다. 굳이 (절벽에서) 떨어져봐야 아는 것인가.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재벌 개혁 정책은.
특이하게도, 이들이 좌파 정권이라고 불렸다. 어떻게 좌파 정권 아래서 양극화가 심화할 수 있나. 어떻게 재벌세력이 확대되고 견고해질 수 있나. 노무현 정권은 (재벌 개혁을) 말로만 했다, 행동은 안 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재벌 정책이 실패한 원인은.
준비가 하나도 안 됐다고 본다. 뭐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 내용을 가지고 정책을 폈다는 것 아닌가. 게다가 관료를 데리고 개혁하겠다는 것은 처음부터 안 하겠다는 뜻이다.
이명박 정권의 재벌 정책은.
상황 인식을 가장 잘못했다. ‘747’(연평균 7% 성장, 소득 4만달러 달성, 선진 7개국 진입) 같은 공약을 선거에서 잠깐 쓴 것은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 경제에 대한 인식이 잘못됐다. 예를 들어 고환율 정책을 펴서는 가격경쟁력이 생길 뿐이지, 실질적인 경쟁력은 생기지 않는다.
새누리당의 정책은.
정책위원회에서 잔뜩 정책을 만들어놨다. 미안한 얘기지만, 국민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 법을 만들면 뭐하나, 집행을 해야지. 새누리당은 아직 경제민주화 정책을 수용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말을 물가에 데려가지만, 정작 물을 먹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
재벌 개혁을 두고, 여러 가지 안이 나오지 않았나.
순환출자 금지, 출자총액제한제는 과거에 다 나온 것이다. 효력이 있었나. 제도를 만들었으면 관철을 해야지. 공정거래법을 만들어도 제대로 집행을 안 했다. 문제는 최고지도자의 의지에 달렸다. 다음 대통령이 중요하다. 그래서 적합한 사람, ‘베스트’라고 할 만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
새누리당에 ‘베스트’가 있다고 보나.
박근혜만큼 대통령을 할 수 있을 사람이 없다고 본다. 청와대에서 20대 중반을 넘어 국정을 봤다. 그것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강점이다. 그는 자신이 한 얘기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확신을 가지면 실행할 것이다.
새누리당은 ‘재벌당’이라고 손가락질받지 않았나.
그렇다. 전세계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따라서 정치적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새누리당이 바뀔 것으로 본다. 변화하지 못하면 박 위원장도 대통령이 안 된다. 박 위원장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여당이 재집권을 해도 양극화를 극복하지 못하면 노무현 정권처럼 될 것이다.
막상 새누리당에 가보니 어떤가.
(박 위원장의 주변) 환경이 좀 이상한데다 박 위원장이 화끈한 결단력이 있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좌절도 되고 그런 느낌이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포기할 수도 없으니 노력해보자고 생각한다.
국회의 분위기는 어떤가.
요즘 업계에서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국회 주변에) 나와 있다. 선거 때니까. (국회의원들이) 재벌 관련 상황에 대해서는 반대되는 것을 안 하려고 한다. 분위기가 그런 곳에서 일할 수 있겠나. 제도권 정당이 국민의 마음속에 들어가려면 창조적인 파괴를 해야 한다. 그것이 이뤄질지 회의가 생긴다. 정당이 제대로 못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국민이 (거리에 나서서) 힘으로 하는 건 코스트(대가)가 크다. 결국 둘 가운데 하나다. 지도자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필요하면 국회의원들을 설득하거나, 아니면 사회적 분위기가 절박해지거나.
재벌 종합법을 만들자는 의견이 있다.
당에서도 기업조직법을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말이 있었다. 예를 들어 헌법에도 민주공화국이라는 조항만 있는 게 아니라 기본권 조항 등이 있다. 마찬가지로 시장경제를 작동시킬 수 있는 법이 따로 있어야 한다. 최근에 경제민주화와 관련해서 경제세력에 대한 견제장치를 마련하다 보니 기업조직법이 있으면 하는 제안이 나온다. 시장이 공평하게 운영돼서 자원이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분배될 수 있는 법을 만들자는 것이다. 거기에 중앙은행 독립 같은 내용이 들어갈 수 있다. 지금처럼 공정거래위원회가 물가 단속이나 하는 것은 문제라고 본다.
경제수석을 할 때 한 재벌회사에 불공정거래 혐의가 있었다. 그래서 공정위원장을 불러서 왜 고발을 안 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고발해봐야 검찰이 기소를 안 해서”라고 말하더라. 검찰도 안 하는 걸 우리가 왜 나서서 인심을 잃어야 하냐는 식이다. 그게 현실이다. 공직사회의 장·차관직에서 물러나면 어디로 가나. 대기업이나 ‘로펌’으로 가잖나. 그러니 대기업들과 문제를 안 만들려고 하지. 결국 대통령의 의지가 중요하다.
다른 당들도 재벌 개혁을 얘기하지 않는가.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이 초당적인 경제민주화운동을 펴라고 하더라. 그렇지만 지금 정당이 다른데 어떻게 공동으로 하겠나. 내가 여기(새누리당)에 관여하지 않으면 할 수 있지만. 새누리당 일부에서 나에게 ‘민주당 스파이’라고 하던데?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어떻게 평가하는가.
몇 번 봤다. 그쪽 행사에 두 번 게스트로 서봤다. 경제민주화 문제에 대한 지식이 아직 피상적이다. 공부가 안 돼 있다. 다른 민주당 대권 후보들도 경제민주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대선 뒤 민주당이 도와달라고 한다면.
진심으로 말하면 도와줄 수 있다.
자리 욕심 때문에 새누리당에 참여하는 것 아닌가.
거기 간다고 내가 뭐하나. 박 위원장한테 그랬다. 당신이 대통령 된다고 해서 내가 뭐하겠는가. 박 위원장도 대통령을 하려는 이유를 보여줘야 한다. 그걸 못 보여주면 나도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그래도 어떤 형식으로든 변화가 있을 것이다. 정당들이 경제민주화에 대해 이렇게 의견일치를 이룬 적이 없잖은가.
대담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정리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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