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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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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때리기가 아니라 경제 살리기”

“민주정부들도 신자유주의 대세에 밀렸다”고 비판한 유종일 민주당 경제민주화특위 위원장, “민주당의 운동권 출신도 재벌 과세 꺼린다” 지적
등록 2012-02-23 14:36 수정 2020-05-03 04:26

“경제민주화의 두 가지 핵심은 재벌 개혁과 신자유주의의 청산이다.”
유종일 민주당 경제민주화특위 위원장(한국개발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은 지난 2월9일 국회 의원회관 회의실에서 가진 과의 인터뷰에서 “1987년 정치 민주화 이후 경제권력(재벌)에 대한 통제에 실패하고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 흐름에 밀려버려 양극화 심화, 중산층 붕괴 등의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다”며 한국과 전세계 모두 (경제민주화를 위한) 역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다고 진단했다. 유 위원장은 “재벌 개혁은 ‘대기업 때리기’나 ‘옥죄기’가 아니라 기업과 경제를 제대로 살리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일각에서 사실상 재벌 해체 주장이 제기되는 것과 관련해 “(북한의 세습체제와 마찬가지로) 재벌의 경영권 세습은 장기적으로 사라질 것이라며 의견을 달리했다. 유 위원장은 “(재벌개혁론자인) 김종인 새누리당 비대위원이 여당에서 경제민주화에 실패하면 민주당에 와서 함께 협력할 것을 권유하겠다”고 말했다. 유 위원장은 인터뷰 이후인 지난 2월14일 민주당 전북 전주 덕진에서 총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 <한겨레21> 김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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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점에서 경제민주화의 의미는 무엇일까.
1987년 민주화 이후 정치권력이 자의적으로 경제를 컨트롤하는 일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정경유착과 자원배분의 왜곡을 불렀던 관치경제가 약화된 것이다. 그러면서 법·제도 등을 포함한 민주적이고 투명한 절차에 따라 경제권력을 통제하는 과제가 주어졌는데,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고삐 풀린 시장이 된 것이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1992년 대권에 도전한 것은 상징적 사건이다. 재벌이 직접 권력 장악에 나선 것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1995년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는 베이징 발언을 터뜨렸다. 때맞춰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사조가 몰아쳤다. 또 미국의 압력과 맞물려 세계화·시장개방이 마치 경제 선진화와 개혁인 것처럼 잘못 인식됐다. 그 결과가 1997년 외환위기다. 정치 민주화와 함께 거래의 공정성과 경제력의 불균형 해소, 분배와 조세 정의, 복지, 참여 등과 같은 경제민주화 요구가 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추세다. 자본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규제를 풀고 시장에 맡기면 자원배분이 잘되고 합리적 결정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와 위험한 상황이 빚어진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고삐 풀린 시장의 탐욕과 무절제가 빚은 결과다.

1987년 이전에는 경제민주화와 관련해 어떤 흐름들이 있었나.
역사적으로 보면 해방 이후 토지개혁이 있었고, 제헌헌법에 이익균점권(기업 이익의 일부를 노동자에게 나눠주는 권리) 조항이 있었다. 4·19 이후에는 이승만 정권에서 부정축재자 처벌과 빈곤 퇴치 요구가 있었고, 박정희 정권에서는 관치경제 개선 요구가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민주정부가 10년간 권력을 잡았지만 경제민주화를 이루지 못해 재벌체제가 더욱 공고화하고 양극화가 심화됐다는 비판이 많다. 민주당이 새누리당에 재벌 개혁을 얘기할 자격이 없다고 하자, 새누리당은 오히려 민주당이야말로 재벌공화국의 책임자라고 맞받아쳤는데.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민주정부들도 신자유주의 대세에 밀려버렸다. 경제민주화의 의지가 부족했고, 재벌의 힘도 막강했다. 경제 사정이 어려워지니까 재벌에 투자와 고용을 구걸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외환위기를 계기로 개혁의 동력이 있었음에도 1998년 출자총액제한제(출총제)를 폐지했다가 2001년에 재도입하는 등 오락가락했다. 노무현 정부는 출총제 규제를 완화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양극화는 심화하고, 좋은 일자리는 줄고, 신빈곤층이 증가했다. 오죽하면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왔겠나.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후보가 경제를 살리겠다고 하니 국민이 대통령으로 뽑아준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와 새누리당은 시장만능주의를 주장한 장본인이다. 재벌 규제에 대해 사회주의니, 좌파 정권이니 하며 재벌을 옹호하지 않았나. 또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출총제를 없애고, 금산분리 원칙을 훼손했다.

재벌은 대기업 때리기나 옥죄기라고 반발한다. 또 암탉의 배를 가르는 우를 범할 것이라거나, 재벌들이 경쟁력을 상실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재벌 개혁은 기업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살리는 것이다. 총수의 전횡과 사익 추구, 경영권 세습 등 전근대적 재벌 지배구조에서 해방시켜 핵심 역량을 중심으로 국제경쟁력을 키우고 사회적 책임을 다해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으로 키우자는 것이다. 대우건설은 재벌의 지배구조 리스크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대우 계열사 시절에는 뛰어난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김우중 회장의 전횡으로 망했는데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에서 구조조정을 통해 살려놨다. 하지만 다시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인수한 뒤 경영이 악화돼 산업은행이 인수했다. 재벌 개혁은 또 경제를 살리는 것이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과 문어발식 확장으로 인한 독식에서 벗어나 대·중소기업이 상생하는 건강한 기업 생태계를 조성함으로써 고용 창출력을 높이고 분배를 개선해 경제의 안정적 발전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김종인 비대위원은 대표적인 재벌개혁론자인데, 재벌당으로 불려온 새누리당에 들어갔다.
충격적이었다. 김 비대위원이 새누리당의 변화를 위해 애쓰고 있는데 부디 성공하기 바란다. 하지만 기대를 하면서도 걱정이 된다.

지난 2월8일 김 비대위원이 새누리당 정책분과위에서 쇄신 의지가 없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일이 벌어졌다. 김 비대위원은 새누리당이 (재벌당에서 재벌개혁당으로 전환하는) 창조적 파괴를 하지 않으면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고 주장하는데
전적으로 동감이다. 올해 다보스포럼의 주제는 ‘대전환’이었다. 세계 자본주의의 수뇌부가 모여 더 이상 시장만능, 승자독식, ‘1 대 99’의 경제는 안 된다며 대안을 모색했다. 한국이나 전세계 모두 역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는 것 아닌가.

과거 경험으로 보면 경제민주화, 재벌 개혁은 대통령의 의지가 중요하다. 김종인 비대위원은 민주당의 손학규 전 대표와 문재인 고문이 경제민주화의 개념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하던데?
정치 지도자들은 큰 방향에서 올바른 역사적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면 된다. 손 전 대표는 2011년 7월 최고위원회에서 민주당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경제민주화특위를 구성했다. 특위는 이후 민주당의 경제민주화 정책을 생산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또 민주당의 강령 1조에 경제민주화를 못박았다. 손 전 대표가 경제민주화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각 당의 진정성은 국민이 표로 심판할 것이다.

김종인 비대위원은 경제민주화 방안과 관련해 재벌을 근본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좀더 강력한 방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구체적 방안은 이번 총선이 아니라 대선에 맞춰 내놓겠다는 의중을 밝혔다. 미리 얘기하면 재벌들이 반발하는데다, 결국 개혁은 대통령의 의지에 달렸다는 이유다.
누구나 그런 얘기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게 복안이 있는데, 지금 말할 수 없다고. (웃음) 지금까지 민주당에서 발표한 것은 경제민주화 정책의 일부일 뿐이다. 앞으로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 정책들이 나올 것이고, 중소기업과의 상생 정책도 중요하다.

민주당이 발표한 자회사의 배당에 과세하자는 재벌세를 포함한 증세는 새로운 내용이다. 미국에서도 자회사의 배당에 대한 과세는 시행 중인데.
부자 증세는 민주당 안에서도 꺼린다. 운동권 출신도 표가 떨어진다고 말한다. 새누리당에서 버핏세를 주장하면서 분위기는 많이 바뀌었다. 부자 증세 주장을 안 했으면 민주당이 얼마나 우습게 됐겠나. 국민은 재벌 독식에 분노하고 있다.

김종인 비대위원은 재벌이 현실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해체하기보다는 잘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통합진보당의 이정희 대표는 민주당의 개혁안으로는 미흡하다고 비판하며 사실상 재벌 해체에 가까운 방안을 내놓았다.
일본의 재벌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맥아더에 의해 해체당했다. 하지만 일본 기업의 그룹 경영 방식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장기적으로는 우리도 그렇게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벌 경영권을 지금처럼 3~4대씩 계속 세습하는 것이 언제까지 가능하겠나. 전근대적인 지배구조는 당연히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당장 그렇게 하기는 힘든 측면이 있다. 재벌이 그룹 경영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거두는 합리적 측면은 살려나가면 될 것이다. 그리고 통합진보당처럼 재벌 정책을 개별 대상에 따라 일일이 맞춤형으로 추진하는 건 현실적으로 힘든 것 아닌가.

민주당은 재벌을 종합적으로 규제하기 위한 기업집단법 제정을 검토하고, 통합진보당에서는 종합적인 재벌 규제법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새누리당도 비슷한 성격의 기업조직법을 검토한다고 하는데.
기업집단법은 재벌 관련 규제를 단순히 하나로 모으는 것이 아니라 재벌의 권한과 책임을 일치시키자는 것이다. 재벌은 그룹 차원에서 의사 결정이 이뤄지는데, 법적으로는 전혀 책임을 지지 않는다. 기업집단법 제정은 연구·검토가 좀더 필요하다. 현행법 체계와 맞는지 살펴야 하고, 현실적으로 효과가 어떻게 나타날지도 세심하게 봐야 한다. 자칫 그룹 경영을 합법화해주기만 하고, 규제의 효과가 미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경제관료에 의존해서는 재벌 개혁에 성공하기 힘들다는 게 중론이다. 민주당에는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경제민주화와 재벌 개혁에 역행하는 행동을 한 인사들이 여전히 건재하다.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안다. 강철규 공천심사위원장이 당의 정체성을 중시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재벌 개혁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을 공천하겠다고 강조했다.

대담·정리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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