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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9월 중순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 시내의 한 슈퍼마켓. 가게 안쪽의 진열대 위에 3가지 다른 종류의 꿀 제품이 나란히 놓여 있다(사진1). 공정무역 제품, 친환경 제품, 그리고 일반 제품. 하지만 가격은 제각각이다. 일반 제품 가격이 500g 한 병에 3.03유로데 친환경 제품은 그보다 20% 비싼 3.66유로, 공정무역 제품은 50% 비싼 4.5유로다. 여성 점원은 “판매량은 친환경 제품이 50%로 가장 많고, 공정무역이 30%, 가격이 가장 싼 일반 제품은 20%로 가장 적게 팔린다”고 말했다. 가격이 비싼 공정무역 제품과 친환경 제품이 4배나 잘 팔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포 정은진(44)씨는 “중학생 아들이 ‘임금 착취하지 않고 공정한 임금을 주고 만든 제품을 사야 한다’고 해서 1~2년 전부터 주로 공정무역 식품을 사먹고 있다”며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 같다”고 말했다.
#2. “그들은 배신자입니다!” 최근 독일 재계 전체가 큰 충격에 빠졌다. 독일계 유통업체인 탈레스와 전기기기업체인 할팅, 스웨덴계 가구업체인 이케아 독일 현지법인이 잇달아 ‘ISO 26000’(사회책임(SR)의 국제표준)에 기반을 둔 사회책임경영(CSR)의 인증을 받은 것이다. 지난해 11월 정식 출범한 ISO 26000은 인증제를 채택한 기존의 ISO 제도와 달리 사회책임경영의 ‘가이드라인’ 구실만 하기로 했다. 이는 사회책임 이행은 법이나 제도로 강제하기보다 기업 자율로 추진되는 게 바람직하다는 취지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선도적인 일부 기업의 인증 취득으로 인해 결국 ISO 26000이 기업들에 일종의 자격요건이 돼가고 있다. 일부에서는 곧 무역장벽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예상까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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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통합적·능동적 ‘CSR 2.0 시대’
ISO 26000 1주년이 다가오면서 글로벌 사회에서 사회책임과 관련된 새로운 흐름들이 더욱 구체화하고 있다. ISO 26000은 인권과 노동, 환경, 소비자 이슈, 공정거래 관행, 지역사회 공헌, 지배구조 등 7가지 분야의 기준을 통해 기업을 비롯한 정부, 노조, 시민단체 등 모든 조직이 추구해야 할 사회책임의 잣대 구실을 한다. 기업의 사회책임경영도 더불어 새로운 단계로 진화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기업이 언론, 시민사회, 종교계 등 외부의 요청에 수동적으로 응하며 회사 경영 전략과 별개로 사회책임경영을 시행하던 ‘CSR 1.0 시대’였다면, 이제부터는 기업 스스로 사회책임경영을 시장에서 경쟁 우위를 차지하는 핵심 역량으로 삼으려고 전략적·통합적·능동적으로 시행하는 ‘CSR 2.0 시대’로 빠르게 옮아가고 있다. 독일 자동차업체인 다임러의 사회책임경영 책임자인 볼프람 헤거 박사는 “차량 개발과 생산, 판매 등 모든 과정에서 사회책임을 이행하려고 한다”며 “회사의 사업 전략과 사회책임을 하나로 통합하는 노력이 소비자의 구매 결정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등 다임러의 경쟁력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강조한다.
CSR 2.0 시대의 선도 역할을 하는 것은 ISO 26000에 기반을 둔 사회책임경영 인증을 자발적으로 받는 기업들이다. 이들은 다른 기업의 걱정스러운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사회책임경영 노력을 인정해달라며 소비자와 투자자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ISO 26000 제정에 주도적 역할을 한 유럽 기업들이 앞장서고 있다. 소비자가 시장에서 제품을 살 때 품질·환경 인증 마크와 마찬가지로 사회책임 인증 마크가 붙었는지 확인하게 될 날도 머지않은 것이다. ISO 26000 제정에 참여한 오스트리아 빈대학의 마르틴 노이라이터 교수는 “세계 4위 도·소매 유통업체인 메트로도 오스트리아에서 사회책임경영 인증을 추진하고 있다”며 “메트로는 자기네 체인이 있는 전세계 33개국 전체로 인증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유럽 기업들은 자신은 물론 거래업체에도 사회책임 이행을 요구한다. 독일 자동차업체인 다임러는 자체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1차 하청업체는 물론 그 밑에 있는 2·3차 하청업체에도 사회책임 이행을 요구하고,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거래를 끊는다. 또 거래업체의 사회책임 이행을 감시하려고 전세계 계열사의 노사 대표가 함께 참석하는 ‘세계종업원위원회’를 통해 공동 노력을 편다. 다임러의 헤거 박사는 “위원회에는 전세계 대표가 함께 참석하기 때문에 많은 정보가 모인다”며 “위원회에서 사회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거래업체에 대한 신고가 접수되면 해당 업체에 의견 표명과 시정을 요구한다”고 소개했다. 유럽 기업들이 이처럼 거래업체의 사회책임 이행에도 신경 쓰는 것은 소비자 때문이다. 한 예로 1998년 나이키는 동남아시아 하청업체들이 아동노동을 이용한 스캔들이 터져 소비자 불매운동으로 매출이 급감하는 등 큰 타격을 받았다.
일부 국가도 사회책임경영을 경쟁 우위 요소로 활용하려는 자국 기업의 노력을 뒷받침하려고 발빠르게 움직인다. 네덜란드·스페인·포르투갈·오스트리아 등 유럽국가와 브라질·멕시코 등 남미국가들은 사회책임경영 인증의 전제가 되는 ‘국가표준’을 이미 제정했거나 제정을 추진 중이다. 오스트리아 환경부의 사회책임경영 정책책임자인 볼프람 테르취니히는 “사회책임경영 국내 표준 마련 작업이 마무리 단계”라며 “이를 토대로 인증을 받은 오스트리아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라이벌 기업들과 차별화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사회책임경영 정책이 기업 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는 “2012년 초에는 오스트리아의 많은 기업들이 사회책임경영 인증을 받게 될 것”이라며 “앞으로 사회책임을 준수하지 않는 기업은 시장에서 도태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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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크로 큰 일 하기”
사회책임은 대기업만이 아니라 중소기업, 나아가 개인사업자들도 함께 실천하는 보편적 규범으로 확산되고 있다. 독일이 대표적 사례다. 안경사들은 인도에 안경을 만들어 보내고, 제빵사들은 학교 축제 같은 지역 내 행사에 빵을 무료로 지원한다. 또 페인트공들은 학교·유치원의 도색 작업을 무료로 해주고, 건설·건축 부문 기술자들은 어린이병원의 건축을 지원한다. 전문기술을 가진 개인사업자와 중소기업인의 연합조직인 독일수공업자연합중앙회의 얀 다렌브링 국장은 “독일의 전문기술 개인사업자들은 일찍부터 사회책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나름의 방식대로 실천해왔다”고 소개했다. 중앙회는 지난 7월 말 회원들을 위해 ISO 26000의 방대한 내용을 알기 쉽게 정리한 가이드라인을 발간했다.
기업들의 인식 전환에는 소비자의 구매 태도 변화가 큰 영향을 끼친다. 유럽 소비자들은 사회책임, 환경, 에너지 절약에 갈수록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슈퍼마켓에서 일반 제품보다 20~50% 비싼 공정무역 제품, 친환경 제품을 함께 취급하는 것은 브뤼셀뿐만 아니라 독일의 베를린, 오스트리아의 빈 등 다른 유럽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상 품목도 원료가 개도국에서 생산돼 수입되는 꽃, 커피, 초콜릿, 과일, 주스, 꿀 등으로 더욱 확산되고 있다. “To do big with a little sign”(공정무역의 작은 마크가 들어간 제품을 구입하는 당신의 선택이 공정한 세계를 만드는 큰일을 한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 외곽의 대형 슈퍼마켓에 붙어 있는 포스터의 글귀가 소비자의 발길을 잡는다(사진2).
ISO 26000 출범 이후 소비자, 시민단체, 노조들의 기업에 대한 사회책임 요구는 더욱 강해지고 있다. 독일에서는 연방정부 주도로 대기업, 중소기업, 소비자, 시민단체, 노조 등이 모두 참여하는 포럼에서 ISO 26000 출범 이후 새로운 사회책임경영 추진 방식에 대해 논의 중이다. 소비자, 시민단체, 노조들은 지난 6월에 열린 포럼에서 노동자의 고용조건, 소비자 보호, 인권 등과 관련한 기업들의 사회책임 이행을 법과 제도로 의무화하자는 주장을 폈다. 그중 하나가 기업들의 사회책임경영 성과 보고서 작성과 공시를 의무화하는 것이다.
친기업적인 독일의 집권 기독교민주당 정부는 지난해 10월 사회책임경영 행동계획을 작성할 때 법과 제도로 강제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했지만, 계속 유효할지는 미지수다. 독일 재계는 2013년 차기 총선에서 사민당이 재집권하면 상황이 180도 바뀔 수 있다고 걱정한다. 더욱이 유럽연합(EU)은 기업들에 사회책임경영 성과를 의무적으로 공시하도록 하는 방안을 연내에 제시할 계획이다. EU의 사회책임경영 정책담당관인 톰 토드는 “연내에 사회책임경영에 관한 큰 정책 방향을 발표할 방침인데, 사회책임경영과 환경경영의 성과를 담은 보고서 작성을 의무화하는 방안도 제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오스트레일리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프랑스 등은 이미 상장기업에 사회책임경영 성과를 공시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그동안 자본시장에서 비주류로 간주돼온 사회책임투자(SRI)의 확산은 기업들이 더 이상 사회책임을 외면할 수 없도록 하는 또 다른 결정적 이유가 된다. 지난 6월10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 지속가능책임투자포럼’(US SIF) 연례 콘퍼런스에 참석한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동안 사회책임투자 모임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인 이 모임을 외면해온 골드만삭스, UBS, 비엔피파리바, 소시에테제너럴 등 이른바 주류 투자은행(IB)들이 대거 얼굴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포럼의 풀 스폰서를 UBS가 맡은 것도 처음이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최고위직인 커미셔너(우리나라의 금융위원에 해당)들도 참석했다. 사회책임투자 컨설팅업체인 서스틴베스트의 류영재 대표는 “그동안 자본시장에서 비주류 취급을 받아온 사회책임투자가 서서히 주류로 자리잡아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유엔 주도 아래 사회책임투자 취지에 공감하는 투자기관과 전문 컨설팅사들이 모여 2006년에 만든 유엔책임투자원칙(UN PRI)의 서명자는 이미 916개에 이른다. 네덜란드공무원연금(ABP),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CalPERS), 영국대학교원연금(USS), 노르웨이정부연금 등과 같은 대표적인 공적연금들이 참여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국민연금과 사학연금이 서명했다. 이 회원사들의 총 운용자산은 30조달러로, 전세계 간접투자 자산시장의 5분의 1에 달한다. 이들은 기업의 단기 성과만이 아니라 환경보호, 사회책임, 투명한 기업지배구조(ESG)를 중요한 투자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책임이 곧 성과”
지난해 5월 발생한 영국계 석유회사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의 멕시코만 원유 유출 사고는 이 이슈들이 기업 주가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BP는 미국의 경제 격주간지 의 세계 500대 기업 리스트에서 매년 최상위 그룹에 선정될 정도로 초우량기업이다. 그러나 유출사고 뒤 천문학적 배상 책임에 직면하며 부도설에 휩싸여 주가가 불과 한 달 사이에 45%나 폭락하고, 시가총액(주식 수×주당 가격)이 100조원이나 날아갔다. 지난해 도요타 부품 결함 사고, 2001년 엔론과 월드컴 등의 회계부정 사건도 사회책임이 기업들에 큰 위험요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 때문에 유엔책임투자원칙의 회원사들은 사회책임경영을 제대로 하지 않아 문제가 생긴 기업에 대해서는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대기업의 사회책임 이행을 위해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의 발언은 이 원칙을 재확인한 것일 뿐이다.
‘CSR 2.0 시대’의 바탕에는 사회책임경영이 기업 경쟁력을 높여줘 더 많은 성과를 가져준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사회책임 이행을 비용 증가 요인으로만 간주하던 시각에서 벗어나, 경쟁력 강화 요인으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 이뤄지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 산업자원부(현 지식경제부) 장관을 지낸 김영호 단국대 석좌교수는 이를 “책임이 곧 성과”(Responsibility is return)라는 표현으로 압축한다. 여기서 성과는 기업의 단순한 수익보다 더 포괄적 개념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이익까지 포함한다. 김 석좌교수는 미국의 애플을 대표적 사례로 꼽는다. “애플은 수익의 70%를 협력관계에 있는 중소기업에 나눠줌으로써 중소기업의 혁신을 촉진하고, 그것을 자신의 경쟁력으로 삼는다. 애플의 높은 이익률은 중소기업과 상생의 생태계를 만든 결과다.” 노이라이터 교수도 “기업이 더 많은 이익을 내려면 사회책임을 더 잘 이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양극화 심화에 따라 재벌 대기업의 사회책임이 부쩍 강조되고 있다.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공생발전’을 화두로 제시하며 대기업에 국민의 존경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강조했다. 국회는 대기업의 사회책임에 관한 공청회를 열어 경제단체장들을 앉혀놓고 대기업의 탐욕을 질타했다. 납품 중소기업에 대한 부당한 단가 인하 요구,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의 사업 영역에 대한 무분별한 침해, 정규직 고용 회피와 과도한 비정규직 활용, 총수 일가 회사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 등으로 사회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는 비판이다. 재벌 대기업의 폐해론이 사회적으로 공론화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15년 만의 일이다. 미국의 는 이를 두고 “세계시장에서는 성공한 한국의 재벌 대기업들이 한국 안에서는 공공의 적 취급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재벌 대기업들은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이 ‘대기업 때리기’를 통해 유권자의 표를 얻으려는 포퓰리즘에 빠져 있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하지만 대기업의 사회책임이 강조되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라 세계 공통의 현상이다. 노이라이터 교수는 “전세계적으로 기업의 사회책임이 점점 더 민감한 정치적 이슈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부자들은 재산의 절반 이상을 사회에 기부하는 캠페인을 전개하고 부자 증세를 자청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금융소득자 등 고소득자에 대한 소득세율 인상을 추진 중이다. 인도에서는 지난 7월부터 모든 상장기업에 순이익의 2%를 사회공헌에 쓰도록 법제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이웃 중국도 모든 상장기업에 올해 10월부터 환경보고서 작성을 의무화했다.
애플과 삼성의 상반된 사회책임
지난 9월29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주최한 ‘한국 경제 향후 50년을 위한 경제계의 역할 재정립’ 세미나에서도 핵심 화두는 재벌 대기업의 ‘사회책임’이었다. 야당인 민주당의 전병헌 의원은 물론 여당인 한나라당의 박진 의원과 곽승준 미래기획위원회 위원장, 보수 성향의 경제학자인 정구현 카이스트 초빙교수까지 이구동성으로 한국 경제와 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재벌 대기업의 사회책임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구현 교수는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정책의 결과 빈부 격차가 확대되고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이런 정책의 실패와 금융기관의 무책임하고 탐욕스러운 투자 행태 탓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며 대기업과 부자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여러 나라에서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국내에서도 대한상의 산하 지속가능경영원과 기술표준원이 지난해 말 각각 ISO 26000을 토대로 기업들이 사회책임경영 수준을 자가진단할 수 있는 지표를 개발해 보급하는 등 글로벌 흐름에 발맞추려는 노력이 나타나고 있다. GS칼텍스, 포스코, 삼성전자, SK, LG 등 대기업들도 실제 사회책임경영에 대한 자가 진단에 나섰다. 포스코의 이명호 사회공헌그룹장(상무)은 “사회책임 이행이 이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시대”라며 “8월부터 계열사인 포스리 및 8개 출자사와 공동으로 ISO 26000 기준에 따라 사회책임 이행 수준을 자가 진단하고 있고, 전체 패밀리사(계열사·자회사·거래업체를 포괄한 개념)를 위해 사회책임경영 가이드라인 제정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국내 대기업들의 사회책임경영은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작업장 유해물질 노출로 인한 사상자 발생, 한전의 부채 급증과 불공정한 전기요금 산정, 현대차의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불안과 차별….” 기업의 사회책임을 감시하는 좋은기업센터(소장 김주일)가 올 상반기 주요 대기업들을 대상으로 뽑은 10대 사회책임 이슈다. 이 이슈들은 모두 인권, 노동 관행, 환경, 소비자 등 ISO 26000이 사회책임의 7대 핵심 주제로 제시한 내용을 정면으로 위배한다. 10대 이슈에는 빠져있지만 삼성 등 일부 재벌의 무노조 경영도 인권 조항에 배치된다.
국민연금은 지난 3월 주총에서 계열사 부당 지원과 분식회계 등으로 처벌을 받은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에 반대했다. 두 사람의 행위가 유엔책임투자원칙이 정한 기준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다. 덴마크의 공적연금인 ATP도 지난해 현대차를 투자 대상에서 아예 제외해버렸다. 세계 3대 연기금 운용회사인 APG자산운용도 지난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백혈병 논란에 의혹을 제기한 데 이어 삼성의 재조사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견해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기업들을 대상으로 인권·노동·환경·반부패 분야의 10대 원칙 준수 운동을 펴고 있는 유엔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의 주철기 사무총장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지난 8월 방한 중에 기업들의 적극적인 사회책임 이행을 강조했다”며 “국내 기업들이 ISO 26000 제정 이전에는 긴장하는 것 같더니 정작 제정된 이후에는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는 듯해 아쉽다”고 말했다.
최근 삼성전자의 위기를 사회책임경영 측면에서 설명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김영호 단국대 석좌교수는 “삼성은 거래 중소기업과 성과물을 나누지 않고 혼자 독차지하는 구조를 고수하기 때문에 중소기업들이 혁신을 못하고 고사한다”며 “애플은 중소기업 영웅들과 손잡고 나가는데, 삼성은 중소기업 바보들만 거느리고 있으니 경쟁력이 높아질 수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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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를 걷어찬 MB정부
전경련의 한 간부는 “30대 그룹이 올해 세계경제 회복이 불투명해 비상경영을 하는 상황에서도 투자와 신규인력 채용을 지난해보다 두 자릿수 증가율로 높인 것은 공생발전이라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것”이라며 “대기업들이 사회공헌을 위해서도 매년 수조원을 지출하는데 국민이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것 같다”고 아쉬워한다. 하지만 이는 사회공헌과 사회책임 이행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한국 재계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ISO 26000이 말하는 사회책임경영의 본질은 기업이 사후적으로 이익의 일부를 떼어내 사회를 위해 쓰는 사회공헌이 아니라 이익 창출 과정에서부터 사회책임을 다해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기업이 이익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환경오염, 노동권 침해, 소비자 기만, 부패 등을 저질러 사회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면, 사후적으로 아무리 많은 사회공헌을 하더라도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19세기 말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의 상징처럼 불린 미국의 록펠러와 카네기가 사회적 비난을 무마하려고 말년에 사회공헌을 한 것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 재벌 대기업이 사회책임경영에 한계를 보이는 이유를 오너 중심의 경영체제에서 찾는 전문가들도 있다. 지속가능경영 전문컨설팅사인 세인인포테크의 황상규 상무는 “ISO 26000의 사회책임경영에 대한 기본 철학은 기업을 사회적 존재로 보고, 주주(오너) 중심이 아니라 종업원·소비자·투자자·시민단체·지역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 중심으로 경영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기업을 총수 일가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재벌체제에서는 사회책임경영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의 사회책임에 대한 인식과 실천도 이웃 일본이나 중국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영호 석좌교수는 “중국은 정부가 직접 사회책임을 주도하는데, 한국 정부는 시늉만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회책임’이라는 용어는 이명박 정부가 지난해 이후 제시한 공정사회, 동반성장, 공생발전 등은 물론 그동안 기업 경영과 관련해 강조돼온 윤리경영, 준법경영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정부가 이미 글로벌 표준이 된 사회책임이라는 용어를 쓰는 대신 자꾸 생소한 용어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은 대기업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선진국들이 앞다퉈 사회책임경영에 관한 국가표준을 제정하는 것도 우리에게는 먼 얘기다. 정부는 아직 ISO 26000 번역 작업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명박 정부가 사회책임에 소극적인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ISO 26000 제정을 위해 2009년 캐나다 퀘벡에서 총회가 열렸을 때 반대표를 던졌다. 이 때문에 ISO 26000 제정을 확정짓는 마지막 총회를 한국에서 열기로 한 2006년 빈 총회의 결정은 없던 일이 돼버렸다. 김영호 석좌교수는 “결국 역사적인 최종 총회가 지난해 5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렸다”며 “한국이 세계적인 큰 흐름을 주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했다.
“혁명 참여가 늦으면 대가도 커진다”
이제는 사회책임경영의 후진국은 경제 선진국이 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사회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기업은 글로벌 시장에서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EU의 톰 토드는 “미래에는 CSR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평소에는 생존을 위해 절대 필요한 공기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듯, 머지않아 기업들의 사업 전략과 사회책임경영 전략이 완전히 하나로 통합돼 따로 떼어내 구분하기 힘들어질 것이라는 역설적 표현이다. 사회책임은 미래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부드러운 혁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국 기업들이 이 혁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시점이 늦어질수록 치러야 할 대가도 커질 수밖에 없다. 황상규 상무는 “이제 국제기구에서 국가별 사회책임 경쟁력 순위가 발표될 날도 머지않았다”며 “사회책임이 갈수록 강조되는 글로벌 시장의 변화를 보면 한국 기업은 ‘쓰나미 전야’와 같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브뤼셀(벨기에)·베를린·프랑크푸르트(독일)·빈(오스트리아)=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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