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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노동자의 양산과 중소 부품업체에 대한 부당한 납품단가 인하 요구는 국내 재벌 대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고 비판받는 단골 메뉴다. 대기업의 사회책임경영 뿌리가 그 어느 나라보다 깊고 세계 최대의 민주노조로 불리는 금속노조가 버티고 있는 독일의 자동차산업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흔들린 ‘동일노동 동일임금’
독일의 자동차·전기·전자 업계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금속노조의 조합원은 무려 250만 명에 달한다. 특히 폴크스바겐, 다임러, BMW, 보슈 등 독일 자동차산업에 종사하는 70만 명의 노동자 가운데 40만 명이 조합원일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독일 금속노조에서 자동차업계 담당자인 크리스티안 브룬코스트는 “완성차업체들의 비정규직 고용 확대와 부품업체에 대한 납품단가 인하 압력은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 자동차산업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이슈”라고 솔직히 털어놓는다.
독일 자동차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 규모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10만 명에 육박했다. 이들은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법상 인력파견회사에 소속돼 고용불안과 상대적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다. 독일 자동차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은 회사마다 다르다. 일부는 정규직과 동일한 임금을 받기도 하지만 상당수는 정규직 초임 수준에 그친다. 산별노조 체제인 독일에서 금과옥조로 여겨지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금속노조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덜 미치는 소규모 부품업체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상황은 훨씬 열악해서 임금이 정규직의 절반 수준에 그치기도 한다. 또 완성차업체들은 경기가 좋아 자동차가 잘 팔릴 때는 파견노동자의 수를 늘렸다가, 경기가 나빠지면 바로 파견을 중단한다. 브룬코스트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독일도 고령화와 저출산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대부분이 젊은 층”이라며 “지금과 같은 임금 격차와 고용불안 속에서는 정상적인 가정생활과 출산을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에, 비정규직 문제는 사회 전체로 볼 때 심각한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독일 금속노조는 비정규직 문제의 개선을 위해 완성차업체들과 1대1 협약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목표는 일반 노동자와 같은 수준의 급여를 받도록 하고, 전체 노동자 중 비정규직의 비중을 4% 이내로 억제하는 것이다. 실제 협약 내용은 개별 기업에 따라 차이가 난다. 대표적 자동차업체인 다임러의 사회책임경영 책임자인 볼프람 헤거 박사는 “비정규직 임금은 정규직의 초임 수준으로 하고, 비정규직 비율을 전체 노동자의 8% 수준을 넘지 않도록 협약을 맺었다”고 설명했다. 반면 BMW, 아우디, 포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준수한다. 오펠과 보슈는 파견노동자가 거의 없다. 금속노조는 이런 내용을 아예 법으로 규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기업들이 반대하고 있다. 금속노조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를 법으로 금지하면, 자동차업체들이 사실상 비정규직을 고용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독일 금속노조에서는 한국처럼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노-노 갈등은 없을까? 브룬코스트는 “10년 전 비정규직 문제를 처음 다룰 때는 일부 정규직 노조원들 사이에 비정규직이 있는 것이 자신들에게 더 유리하다는 시각도 있었지만, 내부 대화를 통해 이견을 극복했다”고 소개했다.
공장의 담벽을 넘어선 연대
독일에서도 완성차업체들이 비용을 절감하려고 부품업체를 상대로 지속적으로 납품단가 인하 압력을 가하고 있다. 납품 계약서에 매년 5%씩 단가 인하를 하도록 공식적으로 명시하는 것은 물론 추가적인 인하 압력을 가하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거래를 끊기도 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많은 자동차 부품회사들이 2008년 경제위기 이후 파산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독일 완성차업체들의 모임인 자동차산업협회(VDA)는 완성차업체와 부품업체 간의 거래 원칙을 담은 행동강령을 제정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숨통을 틔우는 역할을 하는 것이 완성차업체와 부품업체 노동자들의 합동 노동자평의회(노조와 별개로 개별 사업장에 구성돼 있는 노동자 대표기구)다. 완성차업체가 무리한 단가 인하 압력을 가하면 합동 노동자평의회가 완성차업체의 경영진을 만나 대화를 통해 개선책을 모색한다.
독일 사례를 보면 노사 모두 사회책임에 대한 깊은 인식을 바탕으로 비정규직이나 부품업체 문제를 개선하려고 서로 한 발씩 양보해 합의점을 찾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완성차업체의 경영진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상황에서도 금속노조와의 협약을 통해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과 남발 방지를 위해 협조한다. 일부 업체가 파견노동자를 아예 활용하지 않는 것은 놀라울 정도다. 다임러, 폴크스바겐, 포드 등 상당수 완성차업체들은 이와 별도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지속적으로 추진한다. 다임러의 볼프람 헤거 박사는 “그동안 정규직으로 전환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가 총 2만 명에 달한다”고 말했다. 또 완성차업체들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및 부품업체 노동자와 손잡고, 과도한 임금 격차와 부당한 납품단가 인하 압력을 개선하려고 노력한다. 자동차업체의 경영진이 단기적인 이익 극대화에만 매달리고,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에만 안주했다면 이 모든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독일 자동차업계 사례가 한국에 던져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노동부의 실태조사를 보면 국내 대기업의 사내하청 노동자 비중은 적게 잡아도 20%를 넘는다. 대기업 노동자 10명 중 둘은 비정규직 신분으로 언제 회사를 그만둘지 모르는 극심한 고용불안과 정규직의 절반에 그치는 임금 차별에 시달리고 있다는 뜻이다. 대기업의 정규직 고용 기피와 비정규직 양산은 양극화 심화의 주범으로도 꼽힌다.
대법원은 2010년 7월 옛 파견근로자법이 적용되던 2005년 7월 이전부터 현대차에서 2년 이상 일한 사내하청 노동자는 불법 파견에 해당돼 현대차가 직접 고용한 정규직 노동자로 봐야 한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이후 1년이 넘도록 현대차를 포한한 대기업들은 사내하청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거부하고 있다. 기아차, 금호타이어, STX조선해양, 쌍용차, 포스코, 현대하이스코 등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올 들어 회사를 상대로 ‘근로자 지위 확인 및 임금청구 소송’을 잇달아 제기해 갈등은 증폭되고 있다.
오십보씩 양보하는 상생경영
국내 완성차업체들에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를 일시에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재벌 대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비정규직을 활용한 비용 절감과 경기 변동에 따른 인력수급 조절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사내 하도급 노동자를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할 경우 기업 비용이 5조원 증가한다고 추정한다. 그렇다면 노사 모두 사회책임 공유 차원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절반씩만 관철하고, 상대방의 요구도 절반씩 수용하는 타협을 대안으로 고려해볼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임금 쪽은 대기업이 양보해서 단계적으로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적용하되, 대신 노동계는 제조업에 대해서도 노동자 파견을 할 수 있도록 노동시장 유연화 쪽에서 양보하는 방안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금속노조 연구위원인 이상호 박사는 이런 방안에 대해 “하나의 대안으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며 “제조업 파견을 허용할 경우 사용 목적과 기간을 규제하고, 정규직 전환 노력을 곁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또 대기업의 정규직들은 노동자 연대 정신을 발휘해 비정규직과 납품업체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일정 부분 양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슈투트가르트·프랑크푸르트(독일)=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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