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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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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책임경영하지 않으면 3~4년 뒤 위험”

사회책임의 국제표준 주도한 마르틴 노이라이터 교수…
“한국 기업 사회책임경영 시점 늦을수록 기업 평판 훼손되고 비용 부담 는다” 경고
등록 2011-10-06 17:16 수정 2020-05-03 04:26


“현재 유럽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만든 제품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사회책임경영에 대해서는 모른다. 하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소비자들의 구매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
» 사회책임의 국제표준으로 불리는 ISO 26000 개발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오스트리아 빈대학 마르틴 노이라이터 교수. 한겨레21 곽정수

» 사회책임의 국제표준으로 불리는 ISO 26000 개발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오스트리아 빈대학 마르틴 노이라이터 교수. 한겨레21 곽정수

“사회책임(SR)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기업에는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아야 한다.”

사회책임의 국제표준으로 불리는 ISO 26000 개발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오스트리아 빈대학의 마르틴 노이라이터 교수는 지난 9월11일 빈시 교외에 위치한 자택에서 기자와 만나 “한국 대기업들의 낮은 사회책임경영(CSR) 수준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며 “한국 기업들이 사회책임경영을 제대로 시작하는 시점이 늦어질수록 기업 이미지와 평판은 더 크게 훼손되고 비용부담이 늘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노이라이터 교수는 “한국 대기업들은 사회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도 당장은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3~5년 뒤에는 위험이 가시화할 것”이라며 “한국 정부도 중국에 비해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노이라이터 교수는 빈대학 외에도 미국 보스턴대학과 스위스 장크트갈렌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고, 사회책임 컨설팅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ISO 26000이 2010년 11월 정식으로 출범한 지 만 1년이 돼간다. 그동안 가장 두드러진 변화가 있다면.
=정부·기업 등의 사회책임에 대한 인식이 이전까지는 추상적이었는데, 이제는 구체적으로 바뀌었다. 특히 각 기업들이 사회책임을 자신들의 사업과 직접 연관지어 생각하고 있다. 유럽 각국이 자국 기업을 위해 ISO 26000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도 이런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사회책임을 제대로 이행하는 기업에만 투자하는 사회책임투자(SRI)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ISO 26000이 사회책임경영을 측정하고 평가하는 유효한 수단을 제공한다.

-2008년 이후 글로벌 경제위기가 사회책임 논의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경제위기를 계기로 소비자와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기업의 사회책임이 한층 중요해졌다. 특히 탐욕적이고 무책임한 투자 행태로 인해 금융위기를 초래한 주범으로 비난받는 금융회사들은 사회책임을 이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성이 커졌다.

-유럽의 오스트리아·덴마크·스페인·포르투갈은 물론 중남미의 브라질·멕시코 등 여러 국가가 ISO 26000을 기반으로 기업의 사회책임에 관한 별도의 ‘국가표준’을 만들고 있는데.
= ISO 26000은 법으로 사회책임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행하도록 하는 일종의 권고나 제안의 성격을 지닌다. 하지만 국가표준은 자국 기업의 사회책임 이행에 관한 통일된 행동강령을 제시함으로써 사실상 사회책임을 강제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일부 독일 기업이 ISO 26000에 기반한 사회책임경영 인증을 취득한 것을 놓고 독일 재계가 강도 높게 비난하는데.
=독일 재계는 ISO 26000이 인증체제로 전환되는 것에 반대한다. 인증체제가 되면 사회책임 이행이 자발적인 게 아니라 사실상 강제적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이들 기업은 독일 재계의 방침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인증을 받은 것은 자신들이 사회책임경영을 잘하고 있음을 소비자나 정부에 보여주면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이런 기업이 계속 늘어나지 않을까.
=그렇다. 오스트리아에서도 한 지역가스공급업체가 지난 9월 초에 사회책임경영 이행 관련 심사를 받아 통과했다. 이 회사는 사회책임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지배구조와 시스템을 갖추었다는 것을 보여주면,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는 데 더 유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가스 공급을 위해서는 배관공사가 필요한데 주민들이 반대할 수 있다. 이때 사회책임경영을 잘한다는 평판이 주민들을 설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오스트리아에서 인증을 받은 것은 이 업체가 처음이지만,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애초 인증이 아닌 검증체제로 시작된 ISO 26000의 기본 취지가 바뀌는 게 아닌가.
=ISO 26000은 3년마다 내용을 보완하도록 돼 있다. 결국 3~4년 뒤에는 ISO 26000이 사회책임경영을 인증할 수 있는 표준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ISO 26000이 기업들에 직접 인증서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전문 인증업체가 기업들을 심사해서 인증서를 발부할 수 있는 표준을 제공하는 것이다.

-올 초 방한했을 때 글로벌 사회에서 한국 기업들의 사회책임경영에 대한 평가가 아주 낮다고 말했는데, 그동안 개선되지 않았나.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현재 유럽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만든 제품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사회책임경영에 대해서는 모른다. 하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소비자들의 구매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삼성의 무노조 경영은 유럽 소비자들의 불매운동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 7월 삼성에버랜드 노동자들이 자주적 노조를 설립했는데, 삼성이 노조원을 징계하고 어용노조를 만들어 탄압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유럽 소비자들도 알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다. 한국 기업들의 사회책임경영을 촉진하려면 한국 언론과 사회가 한국 기업들의 문제점을 세계에 좀더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사회책임경영을 비교한다면.
=일본은 처음부터 긍정적인 태도였다. 일본의 전 산업계가 유럽과 마찬가지로 ISO 26000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반면 중국은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뒤에 찬성으로 돌아섰다. 이후 중국은 정부가 앞장서서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다. 지난해 중국에서 강연을 했는데, 700여 명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루어 깜짝 놀랐다. 한국은 중국처럼 처음에 반대했다가 찬성으로 돌아섰는데, 정부는 여전히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다.

-중국 정부는 왜 사회책임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로 바뀌었는가.
=중국은 그동안 저가품 생산으로 전세계의 공장 구실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저가품만으로는 성장하는 데 한계에 부닥쳤다. 경제적으로 더 성장하려면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으로 전환해야 한다. 저가품인 경우는 사회책임 이행 여부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고부가가치의 고가 제품을 사는 유럽과 미국의 소비자들은 다르다. 이들은 좋은 품질 외에도 기업이 제품 생산 과정에서 사회책임을 제대로 이행하도록 요구한다. 중국으로서는 적극적으로 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 정부와 대기업이 사회책임에 계속 소극적일 수 있을까.
=대만계 중국 기업인 폭스콘의 사례를 보자. 12시간 넘는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작업조건이 노동자들의 집단 자살을 낳았다. 폭스콘으로부터 부품을 공급받는 애플이 노동시간 단축, 작업조건 개선 등을 요구했다. 부품사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걸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삼성도 반도체공장 노동자들의 백혈병 사건, 노조 결성 탄압 등으로 사회적 비난을 받고 있다. 삼성으로부터 부품을 공급받는 기업들이 아직 이를 문제 삼지 않고 있지만, 사회적으로 문제가 부각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삼성은 아직 사회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것이 큰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품 구입 회사들이 요구하기 시작하면 달라질 것이다.

-한국 대기업들도 그런 위험을 알고는 있지만, 당장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위험이 곧 가시화할지, 아니면 좀더 시간이 걸릴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3~5년 뒤에는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잠재적 위험을 간과하는 것은 좀더 멀리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대기업의 사회적 영향력이 강한 사회에서 기업의 사회책임을 촉진할 수 있는 방안은.
=정부의 역할이 핵심 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가 대기업의 입김에 약하기 때문에 소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회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기업에는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아야 한다. 한국 기업들이 사회책임경영을 제대로 시작하는 시간이 늦어질수록 기업 이미지와 평판은 더 크게 훼손되고 비용부담은 늘어날 것이다.

빈(오스트리아)=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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