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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비준했는데 니들이 반대해?”

금융위기로 더욱 주목되는 한-미 FTA 비준…금융 종속 우려로 반대 여론 높아져도 9월 미국에서 비준되면 여당 단독 처리 가능성
등록 2011-08-18 16:42 수정 2020-05-03 04:26
지난 7월8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회의실에서 열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여·야·정 협의체 회의에서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맨 왼쪽)이 발언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지난 7월8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회의실에서 열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여·야·정 협의체 회의에서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맨 왼쪽)이 발언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미국의 국가신용등급 하락으로 세계경제가 더블딥 공포에 휩싸였다. 이런 가운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빚더미에 올라앉은 미국이 최대한 지출을 줄인 채 한국을 ‘시장’으로 이용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특히 금융 분야에서는 사실상 규제 없는 투자가 가능해져 한국 경제가 미국 경제에 종속되다시피 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온다.

민주당의 ‘10+2’ 재재협상론

정부와 한나라당은 이미 예고한 대로 한-미 FTA 비준동의안을 8월 임시국회에 상정하고, 조속한 시일 안에 통과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거듭하고 있다. 이시형 외교통상부 통상교섭조정관은 8월10일 정례 브리핑에서 “(9월에 처리하겠다는 미국의) 한-미 FTA 비준 일정에 특별히 다른 동향이 감지되지 않는다”며 “세계경제가 어려울수록 보호주의에 대한 경계, 일자리 창출 등의 문제들이 화두가 되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추진하는 주요 통상정책에는 오히려 더 자극제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도 이보다 하루 앞선 8월9일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와 만나 “야당의 일부 반미주의자들의 책동 때문에 (비준동의안 처리가) 좀 지연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미국에서 9월에는 한-미 FTA가 통과될 것으로 아는데, 저희들도 조속한 시일 내에 통과시켜 한-미 군사동맹, 한-미 경제동맹을 같이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미 FTA를 반대하거나 재협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야당들은 이번 경제위기가 자신들의 주장을 확산시킬 기회라고 본다. 더구나 한-미 FTA는 4·27 재·보궐 선거 당시 한-유럽연합(EU) FTA와 함께 ‘비준 저지와 전면적 재검토’를 하기로 민주당 등 야당들이 합의한 사안이다. 그런데 민주당은 지난 5월 이 합의를 깨고 정부·여당과 한-EU FTA 처리에 동의해줌으로써 다른 야당들의 거센 비판을 받은 바 있어, 이번엔 독단적으로 행동하기 어렵다. 한 번 더 합의를 깼다간 야권 연대의 틀 자체가 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한-미 양국의 최종 합의안이 “이익 균형에 맞지 않는다”며 재재협상을 요구하고 있다. 민주당은 지난 7월19일 △농축산업 주요 품목 일정 기간 관세철폐 유예 △부속서에 중소상인 보호장치 기재 △의약품 분야의 허가-특허 연계 제도 폐지 △투자자가 직접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내는 제도(ISD) 폐기 △금융 세이프가드 실효성 강화 등 수정해야 할 핵심 과제 10가지와 통상절차법 제정 등 정부가 별도로 마련해야 할 보완대책 2가지로 구성된 ‘10+2’ 재재협상안을 당론으로 정했다. 정부·여당과 함께 참여하는 한-미 FTA 여·야·정 협의체에도 이 재재협상안을 제출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한-미 FTA 자체를 반대한다. 특히 진보신당은 2008년에 이어 또다시 미국발 금융위기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한-미 FTA가 발효되면 한국 경제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수 있다며 개방형 통상국가 모델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방형 통상국가 추구를 당 강령에 못박은 국민참여당은, 최근 통합 논의가 오가는 민주노동당의 요구로 유시민 대표가 참여정부의 한-미 FTA 추진을 사과한 뒤 반대 쪽으로 기울었다.

여·야·정 협의체, 부메랑이 될지도

한나라당은 8월 임시국회에 한-미 FTA 합의안이 상정되도록 야당을 최대한 설득하되, 단독으로 강행 처리하지는 않겠다는 태도다. 황우여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지난 8월1일 한국방송 라디오 에서 “국제적으로 큰 조약 수준의 협정이라 강행 처리는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황 원내대표는 “제일 중요한 것은 철저히 검토하고 문제점에 대비해 보완하는 것이다. 야당이 빨리 저희와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장인 남경필 의원도 8월5일 기자간담회를 열어 “미국이 9월에 비준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외통위) 여야 간사가 합의해 8월 임시국회 상임위에 상정되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며 “상임위에 상정해 구체적인 절차를 밟아나가되 처리만큼은 여야 합의로, 물리력이 동원되지 않은 상황에서 하겠다. 내 정치 생명을 걸고 강행 처리는 안 하겠다는 대국민 약속보다 더 확실한 의사표현이 뭐가 있겠느냐”고 강조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여·야·정 협의체가 가동 중인데 8월에 상정하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외통위 민주당 간사인 김동철 의원은 “여·야·정 협의체는 한-미 FTA 합의문을 심층적으로 검토하자고 만든 것이다. 검토 결과 문제가 없으면 야당도 더는 반대하지 않고, 문제가 있으면 정부가 합의문을 고수하면 안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며 “합의문을 살펴보고 있고, 문제점이 있으니 재재협상을 하라고 민주당이 요구하는데 상임위에 상정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다른 법안과 달리, 비준동의안은 일단 상정되면 국회가 찬성·반대만 할 수 있을 뿐 내용을 수정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이와 관련해 야 4당 의원 44명이 참여하는 ‘한-미 FTA 전면 폐기를 위한 비상시국회의’ 소속 의원들은 8월17일 조찬 모임을 열어 대응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8월 임시국회가 비교적 순탄하게 넘어가더라도, 이런 분위기는 오는 9월 미국이 예정대로 한-미 FTA를 비준하면 급반전될 가능성이 크다. ‘이미 미국이 비준했는데, 야당이 발목을 잡는 바람에 수출에 막대한 차질을 빚는 등 한국이 치르는 기회비용이 너무 크다’는 식으로 여권과 재계, 보수언론의 여론몰이가 거세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여·야·정 협의체 가동 중엔 비준동의안을 상정할 수 없다”는 민주당의 방어 논리는 거꾸로 “비준동의안을 상정하면 여·야·정 협의체를 깰 수 있다”는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여당은 끝까지 노력했지만, 민주당이 재재협상을 고집해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강경파 외통위원장 등장하면?

청와대가 한나라당에 가하는 압력의 수위도 높아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여야 합의를 강조하는 남경필 의원의 외통위원장 임기가 8월 임시국회까지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한나라당 몫인 외통위원장을 남 의원 대신 강경파가 맡게 되면, ‘1차 전선’인 상임위에서부터 한나라당이 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비준동의안을 처리할 길이 열린다. 지금으로선 희박하지만, 청와대와 한나라당의 분위기에 따라 박희태 국회의장이 비준안을 본회의에 직권상정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어느 길이 옳을까. 한-미 FTA는 아직 ‘가지 않은 길’이기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비슷한 과거와 주어진 현실에서 예측은 가능하다. 어떤 선택이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일지, 지금 목에 핏대를 올리는 이들은 얼마나 고민하고 있을까.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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