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화와 더불어 자유주의가 되살아나면서 국민국가는 최소국가로 롤백하고 있다. 시장을 통한 사권(私權)과 사익(私益)의 극대화를 돕는 후견인으로 국가의 역할이 후퇴하는 것이다. 경쟁국가, 촉매국가, 시장국가, 기업국가 등은 신자유주의 시대 국가의 모습이다. 한국도 이런 경향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하지만 한국의 국가 역할은 훨씬 왜곡된 방식으로 변하고 있다. 대규모 토건개발에 국력을 쏟거나 소유권의 수용 권한을 민간기업에 넘겨주는 일 등이 그러하다. 두 사례는 신자유주의 시대 퇴행적인 국가 역할의 절단면을 노출하고 있다.
세계 추세와 거꾸로 ‘국토의 신자유주의화’
대규모 토건개발은 1960~70년대 개발국가(Developmental State) 시절에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토건은 국가재정을 쏟아부을 정도로 긴요한 정책 대상이 아니다. 개발보다 보전이 더 중요한 국가 역할로 요청되고 있다. 개발국가는 자본과 시장을 직접 육성하는 데 역량을 집중했고, 국토 개발은 인프라 건설에 한정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를 지나면서 개발국가의 역할에 지각 변화가 생겼다. 자본과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은 줄어든 반면, 토지나 환경에 대한 국가 개입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국가가 지켜야 할 국토 환경의 빗장을 직접 풀어 돈이 되는 것으로 개조하는 데 역량을 쏟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Post) 개발국가의 이런 역할 이념을 ‘신개발주의’라 부른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등장한 신개발주의는 MB 정부에 이르러 강한 토건주의가 가미된 채 ‘국가에 의한 국토 환경의 대규모 파괴적 개발’을 정당화해주는 이념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국가가 자본을 대신해 국토 환경을 시장거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국토 환경의 신자유주의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국토 환경의 신자유주의화란 측면에서 본다면 신개발국가는 자본을 대신하는 데만 머물지 않는다. 공익의 수호자로서 권한을 자본에 통째는 넘기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공동체적 삶의 터전인 국토 환경의 파수꾼 역할의 포기를 넘어, 신개발국가는 그 파수의 권한을 자본의 손에 맡겨 국가를 대신해 국토 환경의 공익성을 지키도록 하고 있다. 국토 환경을 돈이 되게 개발하는 것 자체를 공익 증진에 기여한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민간의 토지 수용권 확대다. 공익을 위한 토지소유권 수용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사유재산권 침해란 체제 도전적 문제로 인해 되도록 최소화하거나 금하는 게 앞선 나라들의 최근 추세다. 우리나라는 그 반대다. 수용권이 남용되는 단계를 지나 민간자본이 오용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지난 30~40년간 정부가 주도한 주요 개발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됐다면, 그 이면에는 국가에 의한 강력한 토지수용권 발동이 예외 없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택지개발이다. 1981년 이래 신규로 공급된 전국의 주택 70% 이상은 택지개발촉진법에 의한 것이다. 이 법에 의해 택지개발예정지구로 지정되면 시행자는 민간 토지를 헐값으로 강제 수용할 수 있다. 이렇게 확보된 토지를 택지로 조성한 뒤 분양하면, 민간기업은 여기에 주택을 지어 선분양 방식으로 팔아 막대한 개발이익을 남긴다. 국가기관이 아닌 시행자(개발공사 등)에 수용권을 부여한 것은 국가를 대신해 국민의 주거 안정을 도모할 주택 공급을 수월하게 하도록 돕기 위한 명분 때문이었다.
강한 자를 위한 50 대 502000년대 들어 국가를 대신해 공공성을 실현하는 이런 사업 방식은 민간 영역으로 급속히 확대됐다. 토지 수용을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일련의 법 제·개정도 이뤄졌다. 도시개발법과 기업도시법이 비근한 예다. 도시개발법에서 민간 시행자(민간조합 등)가 토지를 강제 수용하려면 대상 토지 면적의 3분의 2 이상을 소유해야 하고, 이에 더해 토지 소유주의 3분의 2 이상 동의를 얻어야 했다. 그러나 2007년 법 개정을 통해 소유주 동의 수준이 2분의 1로 낮아졌다. ‘2분의 1 동의에 의한 수용’은 ‘반은 반대하고 반은 찬성하는 상황’에서 ‘찬성 쪽 반’의 동의에 기초해 수용되는 것을 뜻한다. 3분의 2에서 2분의 1로 낮춰진 것도 그렇지만, ‘2분의 1 동의’를 찬성 쪽으로만 해석하겠다는 것은 모두 민간이 사업을 추진하는 데 수월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이 수월성은 곧 수익성을 말한다.
기업도시법은 민간 시행자가 사업 목적에 맞춰 도시 하나를 독자적으로 건설할 수 있게 뒷받침하려고 2004년에 제정됐다. 이 법에서 시행자(당초 대기업을 전제)는 개발구역 토지 면적의 100분의 50 이상에 해당하는 토지를 확보하면 나머지 토지를 자동적으로 강제 수용할 수 있게 한다. 민간기업이 공공성의 집합체인 도시를 건설하도록 허용한 것도 파격적이지만, 2분의 1 토지 확보로 다른 2분의 1 소유권을 강탈하게 한 것은 더욱 파격적이다. 이는 토지수용권 오용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 법은 참여정부 때 민간기업이 낙후 지역에 기업도시를 건설해 국토균형발전에 기여하도록 하기 위해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제정됐다.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수용권은 더 이상 공공의 고유 권한이 아니다. 수용권 남용이 사적소유제를 근간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뿌리째 흔들 수 있지만, 어느 국민도 이를 시비하지 않는다. 위헌심판을 청구해도 대부분 패소했다. 공공성이 담보된 상태에서 수용권이 민간에 부여됐다는 이유 때문이다. 즉, 공공계획 틀 내에서 개발사업이 추진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필요로 하는 토지 수용은 계획의 공공성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법의 형식논리에 따른 해석일 뿐, 실제 효과는 그 반대다. 수용권을 이용해 민간개발자는 공익 창출의 기여분을 훨씬 초과하는 개발이익을 취해가지만 국가는 이를 수수방관한다.
마침내 도래한 ‘토건적 기업국가’민간의 토지 수용은 공익성으로 위장된 사익의 독점적 추구이고, 자연의 독점적 착취란 등식을 은닉한다. 더욱이 민간에 의한 수용은 사실상 타인의 소유권을 사적으로 강탈하는 것에 해당한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국가법으로 허용된다는 점이다. 이는 국가의 법과 제도가 기업의 이익을 교묘하게 대변하는 것으로 변형되고 있음을 뜻한다. 자본을 대신해 국토 환경을 돈이 되는 것으로 바꾸든, 국가의 고유 권한인 수용권을 민간에 넘기든, 이 모두는 한국이 ‘토건적 기업국가’로 변질해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조명래 단국대 교수·도시지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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