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시위는 이상했다. 작당부터 축제를 닮아 있었다. 7월16일 한국판 슬럿워크(SlutWalk) ‘잡년행진’을 일주일 앞두고 저녁마다 서울 명동 3구역 강제철거 반대 농성장 ‘카페 마리’가 들썩였다. 여성단체에서 일해본 적도, 시위를 조직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야말로 정체 모를 잡년들이었다. 잡년행진을 거든 지난 보름 동안 여성주의자들이 지난 40년 동안 겪었을 법한 해방과 좌절을 한꺼번에 느꼈다고 했다. 야한 시위를 준비하는 평범한 여자들의 입에서 ‘여성성’과 ‘권리선언’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
고대·현대 성폭력 사건이 발화점7월12일과 14일 ‘마리’에서 만난 잡년행진 준비모임은 들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자원결사만으로 시위를 조직하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는 참이다. 실무적인 이야기는 후닥닥 해치운다. 그다음에는 웃고 춤추고 술 마시며 며칠 남지 않은 행진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려간다. 준비모임은 자신들을 기획단이나 주최 쪽으로 부르는 것도 딱 질색이란다. 핵심 잡년들이라고 한다면 몰라도, 라며 웃었다.
잡년행진의 발단은 이랬다. 5월쯤 트위터에 캐나다의 슬럿워크를 소개하는 멘션이 떴다. 리트윗이 이어졌다. 우리도 하면 좋겠다는 멘션이 덧붙었다. 슬럿워크는 지난 1월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요크대학의 ‘안전교육’ 강연에서 마이클 생귀네티라는 경찰관이 “여자들이 성폭행 희생자가 되지 않으려면 매춘부(슬럿·Slut)처럼 옷을 입고 다니지 말아야 한다”고 한 발언이 발단이 된 시위다. 4월3일 토론토에서 3천 명이 모여 성폭행 피해자의 야한 옷차림을 문제 삼는 사회를 향해 시위를 벌였다. “평소처럼 입고 와도 된다”는 주최 쪽의 당부에도 많은 여자들은 속옷과 비슷한 차림으로 나타나 “내가 입은 옷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는 피켓을 들고 거리를 활보했다. 야한 시위는 국경을 넘어갔다. 7월 초까지 보스톤·시애틀 등 북미 주요 도시와 런던·시드니·멕시코시티까지 대륙을 넘나들며 세계 60여 개 도시로 시위가 이어졌다. 북미 여성운동 진영은 슬럿워크를 지난 20년 새 가장 성공적인 시위라고 평가한다.
같은 시기 한국에선 성희롱과 성폭력 사건이 줄을 이었다. 현대차 협력업체 성희롱 사건과 성폭력을 당한 노래방 도우미가 재판 과정에서 수치심과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살하는 일이 있었다. 고려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이 불을 댕겼다. 성추행 가해자들의 출교를 요구하는 시위에 슬럿워크 차림새의 1인시위자가 나타났다. 한국 잡년행진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처음 모인 것도 그즈음인 6월26일이었다. 일주일 새 시위 기획단은 25명으로 불어났다. 단체도 없고 조직책도 없다. 처음 슬럿워크를 소개한 대화명 괭이라고 불리는 여자가 총대를 메고 서울 광화문 원표공원에 집회 신고를 냈다. 트위터에서 멘션을 주고받던 사람들이 바통을 이어 자연스럽게 할 일을 나눴다. 섭외도 없었다. 하다못해 가수·배우·밴드들도 모두 알아서 왔다. 시위에서 퍼포먼스를 맡은 배우 레드걸(38)은 “보통 여성단체에서 2~3개월 걸려 조직할 시위를 모금도 안 하고 사무실조차 없이 2주 만에 해치웠다”며 신기해했다. 가수 지현은 “한국판 슬럿워크는 두리반과 마리의 철거 반대 투쟁을 닮았다. 단체는 사라지고 개인들이 모여 인연도 맺고 운동도 만든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퇴근 후에 새롭게 만들어가는 운동 방식”이라고 했다.
시위에 가담한 ‘잡년’들의 평균연령은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이다. 다난했던 연애사부터 성추행당한 경험까지 별별 이야기를 다 나눴지만 서로 이름도 나이도 잘 모른다. 그냥 트위터 별명으로 통한다. 시오란(31)은 경기도 부천의 아동발달센터에서 특수교사로 일하고 있다. 많은 여자들처럼 그도 콤플렉스와 두려움이 많았다. 고향집과 부천을 오가는 기차에서 몇 번 성추행을 당한 뒤 기차를 혼자 타지 못한다. 어릴 때 왕따를 당한 뒤로는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여성학 덕분에 그 콤플렉스와 별거가 가능해졌다. 그에게 자신이 속할 땅은 어디인지 아직 확실하지 않다. 자신이 가르치는 장애아동들을 돌아보는 소수자 감수성 덕분에 여성주의가 하는 말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두려움은 여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를 키웠다. 대학생인 정희경(24·가명)씨는 인터넷 영화전문지에서 인턴기자로 일하다가 편집장한테 성추행을 당했다. ‘슬럿’ ‘잡년’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땐 가슴이 내려앉았다. 성추행을 폭로하고 고소장을 냈을 때 전직 동료들과 경찰, 검찰까지 서로 짜기라도 한 듯이 ‘헤픈 년’은 아닌지 물었기 때문이다. 피해자에게 “성추행으로 고소하면 한 남자의 인생이나 인격을 모두 망가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봤느냐”고 묻는 검사도 있었다. 두려울 게 없어진 자신을 발견했다. “잡년행진 하다가 사진이 찍히면 어떨까 생각해봤는데요, 스스로 당당해지려고 참여하는데 남이 볼까 무서워한다는 것은 모순 같았어요. 징징대기 싫어요. 이젠 기념사진도 찍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여자들이 공통분모를 발견하는 데 성폭력 피해 경험은 기준이 되지 못한다. 여성가족부가 조사해보니 2010년 대한민국 성인여성 1천 명에 4명꼴로 성폭행이나 성폭행 미수를 겪었다. 더구나 전체의 40%가 넘는 여성이 한햇동안 심한 성희롱을 겪거나 ‘바바리맨’과 마주치는 세상에서는 모두가 예비 피해자다. 나캉(25)은 대학을 졸업하고 이 땅의 많은 청년 노동자처럼 비정규직이 되었다. 그런데 ‘비정규직 철폐’보다는 ‘두려움 없는 세상을 향해’라는 구호가 더 와닿았다. 집 앞에서 괴한을 만난 경험 때문일지도 몰랐다. 화가인 아이엠어비타이거(29)는 자꾸 피해의식을 심어주는 남자들의 세상이 싫어서 여성주의 문턱을 밟았다.
슬럿워크가 ‘슬럿’을 택한 것은 여자들을 구별 통치하려는 가부장제에 대한 정면 대결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구별 통치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는 헤픈 년이 아니다’라고 하소연하는 게 아니다. 누가 ‘당해도 싼 헤픈 여자’인지 알아볼 수 없게 만드는 전략이다. 모두 다 같이 ‘슬럿’이라 불리는 순간 공포는 사라진다. 구별 통치는 힘을 잃는다. 슬럿워크가 담력 운동이라 불리는 이유다. 한국 트위터에서는 시위 이름을 둘러싼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창녀처럼 더 구체적으로 부르자는 의견부터 착한 년은 끼기 싫은 저급 시위라는 불만도 있었다. “천박하게 잡년이 뭐냐는데.” “그럼 선진국형 고급 시위 잡년행진이라고 하자.” 잡년들의 대답은 늘 이런 식이다. “운동의 외연을 넓히는 대중투쟁을 하려면 누구에게도 거부감을 주지 말아야 한다.” “싫은데? 그게 가능이나 해?” “행진할 때 모금해야 하지 않을까. 고려대와 현대 성폭행 사건 대책위에도 보내고.” “뭐라 하며 돈을 걷지?” “만지려면 돈을 내거라, 어때?” “와우, 완전 좋아.” 시위에서 여자들이 자유롭게 입고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살 권리를 외치는 구호는 두 가지로 정해졌다. “내 몸이야, 손대지 마!” “꼴리냐, 넣어둬라!” 한국 사회 곳곳에 서식하는 마초들이 수시로 덤벼들어 ‘빡치게’ 하지만 엄숙하게 대드는 것은 체질에 맞지 않는다. 웃고 놀리는 게 좋단다. 40년 전 여성주의자들이 브래지어를 불태웠다면, 2011년 한국의 잡년들은 브래지어를 모아 줄넘기하는 쪽을 택했다. 잡년행진 포스터는 이렇게 선동한다. “벗어라, 던져라, 잡년이 걷는다!”
올드해진 영과도 다르게저항은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클지도 모른다. 중산층 여자와 성노동자 사이의 위화감만 문제가 아니다. 남자들의 정력이 자랑거리인 사회에서 중산층 여자가 상간녀(간통녀를 부르는 말)에게 갖는 혐오와 피해의식도 크다. 가수 지현은 “한국 사회에서 누구를 매춘부라 부르는 것은 몹시 민감한 문제다. 중산층 여자들을 기반으로 한 여성단체에서는 실행하기 어려운 시위”라고 말했다. 성폭력에 반대하는 운동을 해온 사람들이 잡년행진을 지켜보는 심정은 복잡하다. 지난 4월 한국성폭력상담소가 20돌을 맞아 성폭력 상담 활동가들이 모여 고민을 털어놓는 자리가 있었다. 여기에 참여했던 배복주 장애여성공감 소장은 반성폭력 운동의 고민을 이렇게 전한다. “정부 지원을 받는 단체를 포함해 전국에 200여 곳의 성폭력상담소가 있다. 반성폭력 운동 단체라면 이제 상담 서비스가 아니라 운동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쉽지 않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구도에서 벗어나 여성의 몸과 성에 대한 다양한 담론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한국여성민우회의 한 활동가는 “오랫동안 여자들이 안전하게 밤길 걸을 권리를 외치며 달빛 시위를 해왔는데, 사회 통념은 그대로고 여성단체들은 주춤한 상황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새로울 것 없이 선정적인 시위라는 비판도 있지만 성폭력의 원인을 여성에게 돌리는 사회 분위기에 항의할 필요는 느낀다. 뜻 맞는 회원들은 여럿 참여할 것”이라고도 했다.
잡년행진이 새로운 담론의 길을 열 수 있을까. 2005년 반년간 학술지 에서 고정갑희 한신대 교수(영문학)는 “아내와 매춘부 어느 쪽이 더 가부장제에 의존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가 큰 파장을 일으켰다. 2008년에는 성노동자 인권 지원모임과 함께 성녀와 창녀를 가르는 사회를 조롱하는 퍼포먼스를 한 일도 있다. 뜻은 한 가지다. 가부장제가 여자들을 갈라놓는 방식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고정갑희 교수는 “잡년행진에 기대를 건다. 여성의 옷차림 때문에 성폭력이 일어날 수 있다는 원시적인 믿음에 대항하면서 성노동자에게도 폭력이나 폭행은 안 된다는 사회적 상식을 쌓자는 주장이 이제 통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고 했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의례화·권력화되고 나이 든 여성운동에서 벗어나 축제 중심의 여성주의 시위문화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슬럿워크를 주목한다. “1990년대 기존의 마르크시스트 페미니스트에 대해 섹슈얼리티를 내세운 한국 영 페미니스트들이 대열을 형성한 일이 있었다. 지금은 그때의 영이 올드가 됐다. 돌파구가 필요하다. 우리는 창녀이기도 하고, 파트너이기도 하다는 구호는 뜻깊다. 아직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잡것과 고급 여자의 구분에 매달려 있지만 지금 많은 젊은 여성들은 그렇지 않더라”고 분석했다.
‘똥습녀’도 같이 걷자‘무당파 여성주의’라고 볼 수 있는 잡년행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서울 북아현동 철거지역 세입자라고 자신을 밝힌 구로(33)는 잡년행진 준비를 거드는 남자다. “가해자 책임을 성폭력 생존자 탓으로 돌리는 사회의 시선이 불편해서” 참여했단다. “작은 것이 큰 것에 저항하는 광경을 보고 싶어서” 마리를 찾은 동성애자 김성석(21)씨도 있다. 영화감독이기도 한 ‘친구사이’ 김조광수 회원은 일찌감치 “팬티가 다 보이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잡년들과 행진하겠다”고 선언했다. 행진 이틀 전에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도 참여 뜻을 밝혔다. 캐나다 토론토 시위대의 절반 가까이는 남자들이었다.
미처 예기치 못했던 연대의 문제도 있었다. 잡년행진 트위터에서는 똥습녀에 대한 토론이 오갔다. 한 참여자가 행진에 입을 망사 의상을 보여줬더니 남자친구가 “똥습녀 같다”고 경악했다는 것이다. 똥습녀는 2006년 독일 월드컵 응원 기간에 속이 훤히 비치는 망사 한복과 엉덩이가 통째로 보이는 옷으로 화제가 됐던 여자다. 여성주의적 의식 없이 자신을 마케팅하려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상품화하려는 여자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 우리도 그들처럼 남자들의 시선에 소비당하고 마는 것은 아닐까? 똥습녀처럼 사진이 찍혀 인터넷 게시판 곳곳에 오르내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털어놓는 이도 있었다.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남성들의 페티시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페티시를 지향하련다.” “똥습녀가 온다면 두 팔 벌려 환영이다. 누구에게도 그녀에게 낙인찍고 희화화하고 ‘싼 년’ 취급할 권리는 없으니까.”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을 꿈꾼다. “그녀는 친절함이나 겸손함이 아니라 동료의 마음으로 작고 향기로운 방으로 갈 것이다. 고급 정부, 매춘부, 퍼그 강아지를 안은 숙녀가 앉아 있는.” 여성주의자들의 ‘동료의식’이라는 오래된 꿈이 실현될 것인가. 일단 잡년들은 먼저 길을 떠났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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