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민노당)은 참 소중했다.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진보정치’를 갈망한 많은 이들에게 민노당은 꿈이었고, ‘일하는 사람들’에겐 희망이었고, 벼랑 끝에 선 이에겐 버팀목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적어도 2008년 분당 전까지는.
한국현대정치사에서 민노당의 족적은 또렷하다. 사회적 약자의 처지를 보듬고 보편 복지를 지향하는 진보 의제들을 제도정치에 밀어넣었기 때문이다. 요즘 대세인 무상급식은 민노당이 가장 먼저 사회적으로 의제화해 10여 년 만에 결실을 본 사례다.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이자제한법, 상가임대차보호법 같은 서민 정책도 민노당 작품이었다. 처음 민노당이 부유세를 주장했을 때 세상은 ‘경악’했지만, 참여정부에서 종합부동산세로 아쉬우나마 빛을 봤다. ‘X파일’로 대표되는 삼성 문제, 론스타로 대표되는 ‘먹튀’ 국외 투기자본 문제 등 어렵지만 중요한 문제가 사회적 의제가 될 수 있었던 데도 민노당의 구실은 작지 않았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 무상급식 같은 ‘착한 정책’들</font></font>민노당이 이런 정책 대안을 내놓고, 문제제기를 할 수 있었던 건 많은 부분 당 정책위원회 덕분이다. 분당 이전 민노당 정책위는 상근자만 최고 50명, 평균 30~40명에 이르렀다. 당시 민노당보다 훨씬 덩치가 큰 한나라당 정책위가 국회의원인 정조위원장을 포함해 40명 규모였다는 점과 비교해보면, 민노당이 정책위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민노당 정책위에서 일한 적이 있는 한 인사는 “실력을 갖춘 젊은 진보주의자들이 모인 이곳은 진보 진영 전체의 싱크탱크나 다름없었다. 명분상으로라도 다른 당이 거절할 수 없는 ‘착한 의제’를 내놓으며 정책 의제를 선점했다. 우리 나름대로는 정책 선거를 해보려고 애썼다”고 회고했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오랜 진보운동의 결실로 만들어진 민노당이 제도 정치 안에서 일정 정도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점을 높이 샀다.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민주적인 정치체제가 들어서자 진보운동이 제도 정치 안에서 분명한 입지를 갖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생겨났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투항’이라며 진보운동 진영에서도 반발이 많았지만, 민노당은 민주당과 구분되는 목소리를 내고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이런 인식을 변화시켰다.”
한계도 분명했다. 대중적인 지지 기반이 넓지 못했다. 분당 전 민노당이 단순히 9석의 소수 정당이어서가 아니다. 신진욱 교수는 “사표 방지 심리나 양당 경쟁 체제 때문이라면, 적어도 총선 정당득표율은 높아야 했다. 민주노총이라는 조직과 일부 화이트칼라·학생 등의 지지 세력이 더 확대되지 못한 건, 대중과 직접 조응하는 정치적 감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제도 정치권에 들어왔으면서도 ‘사회운동’과 ‘정당정치’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운동 집단이 가진 폐쇄성과 공격성도 그들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거나 이해시키지 못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고 지적했다.
이런 평가엔 민노당 당원 출신도 고개를 끄덕인다. “운동권은 다른 사람들과 쓰는 언어부터 다르다. 언어가 다르다는 건 상대를 틀렸다고 규정하고 낙인찍는 거다. 이런 습성 때문에 민노당 스스로를 폐쇄적으로 만든 것 같다”고 했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 이사투표, 줄투표의 패권주의</font></font>진성당원제, 공직후보자공천제 대신 도입한 당원투표제, 철저한 대의제와 합의제 등은 정당 구조와 운영에서 민노당을 돋보이게 한 요소 중 하나였다. 제도로만 보면, 민노당은 대의민주주의가 구현할 수 있는 최선의 당 구조를 갖췄었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당의 당원이 되기엔 ‘시선의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문턱을 넘어 당비 1만원을 낸 당원들에겐 당의 주요 문제를 결정할 커다란 권한이 주어졌고, 이는 민노당이 민주적 정당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물론 이 때문에 치러야 하는 비용, 또는 부작용도 컸다. 정파의 세를 불리려고 대리투표, 특정 지역에 집단으로 전입해 당내 선거를 치르는 ‘이사투표’, 특정 정파 후보를 찍게 하는 ‘줄투표’가 심심찮게 벌어졌다. 역설적으로 당내 민주주의를 위한 장치는 패권주의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진보정당’으로서 뼈아픈 부분은 자유주의 정당, 혹은 개혁세력이라 할 민주당과 한 묶음으로 인식된다는 점일 수 있다. 실제로 민노당이 20% 가까운 당 지지율을 얻은 2004년 무렵은 열린우리당이 가장 많은 지지를 얻었을 때다. 이들과 대립각을 세울 때도 많았지만, 정치에 크게 관심 없는 사람들의 눈엔 다르지 않은 세력으로 비쳤다. 이런 인식은 ‘공동의 적’이 생긴 이 정부 들어 더욱 강화됐다.
이와 관련해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지금은 보수정당에서까지 복지를 이야기하는 판이다. 정세적으로 보면 노무현 정부부터 지금까지 개혁과 진보라는 정책적 차별성이 ‘주류’가 되면서 민노당과 민주당의 차별성을 희미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며 “이는 문제를 푸는 데 이념적 차별성을 강조하는 것보다, 의미 있는 정책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 (각 정치세력들이) 생각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여전히 ‘반이명박 전선’ ‘반한나라당 전선’이 먹히는 걸 보면, 한국 사회에선 아직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와 전략이 유효한 것 같다. 이 때문에 진보정당의 차별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는 일정 부분 민노당이 선점한 진보적 의제와 정책 담론을 민주당이 흡수해서 생긴 문제로도 볼 수 있다. 민노당은 지지층을 두껍게 확대하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동동거리는데, 이보다 형편이 나은 민주당이 민노당의 ‘진보성’이라는 중요한 정치적 위치와 특색을 가져가자 양쪽의 차이가 흐려지고 민노당의 입지는 더욱 옹색해진 것이다. 이를 뒤집어보면, 정당들을 ‘좌클릭’시키는 데 민노당이 큰 구실을 하고도 정작 자신은 쪼그라들고 만 셈이다. 그저 역설일 뿐일까.
<font size="3"><font color="#006699"> “급진적 의제로 구실을 찾아야”</font></font>진보정당은 여전히 소중하다. 김윤철 교수는 “민주당 또는 통합 야당으로 상징되는 세력들에게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정치세력이 필요하다”며 “민주주의를 좀더 급진화할 필요가 있다. 복지국가는 사회·경제적 평등과 분배까지만 이야기할 뿐, 생태·녹색·소수자 등 이미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급진적 의제는 끌어안지 못한다. 진보정당이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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