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종(45)씨는 진보신당의 서울 동대문구 당원협의회 위원장이다. 민주노동당(민노당)과의 통합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는 요즘 대표적인 통합파로 분류된다. 그는 임시당대회 이틀 뒤인 6월28일 당 누리집 게시판에 “난 통합파, 아내는 강경 독자파”란 고백으로 시작하는 ‘당대회 후기’를 올렸다. 글은 당원들 사이에서 적잖은 화제를 뿌리며 1천 회에 가까운 조회 수를 기록했다.
아내는 독자, 남편은 통합지난 6월29일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당 노인 조직을 준비하는 일로 지방 출장을 가는 중이었다. 게시판 글에 대한 아내의 반응을 묻자 “쉽게 마음을 돌릴 것 같지 않다. 정치적 결별의 순간을 준비하는 것 같다”고 했다. 1991년 한 비합법 정당운동 조직에서 인연을 맺은 뒤 1998년 결혼한 두 사람은 국민승리21과 민노당을 거쳐 진보신당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이념과 노선을 달리해본 적이 없다. 고씨는 이를 “부부 이전에 끈끈한 동지 관계”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언제부턴가 정치적 이상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독자파와 통합파가 처음으로 격돌했던 3·27 당대회부터다. 나는 통합이든 독자 노선이든, 당이 결정하면 따라간다는 생각이었다. 아내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3월 당대회 때 보니 민노당과의 통합이 결정되면 따르지 않겠다는 뜻이 아내에겐 확고했다.”
중앙당 대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내는 이번 당대회에서 진보정당 통합 합의에 대한 승인 여부를 2개월 뒤 다시 논의하자는 긴급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분당이 불가피한 상황인데, 공연히 시간을 끌며 정치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고씨는 “아무리 어려워도 ‘도로 민노당’으로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아내에겐 강하다. 당을 함께하던 시절 지금의 민노당 인사들이 보여준 패권적 행태를 용납하기 어려운 것 같다”고 말했다.
6·26 당대회에선 곡절 끝에 통합파와 독자파 일부가 손잡고 ‘진보신당 조직진로와 관련한 특별결의안’을 통과시켜 당이 깨지는 파국은 면했다. 하지만 통합 이후 민노당 자주파의 ‘패권’에 대한 제어 방안을 통합파가 제시하지 못하고, 독자 생존을 위한 구체적 전략과 전망을 독자파가 내놓지 못하는 한 2개월 뒤 당대회는 분당을 최종 확인하는 자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고씨는 2개월 동안 아내를 포함한 독자파 당원들과 접점을 만들려고 최선을 다할 생각이지만, 결과를 낙관하기 힘든 상황임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로선 정치적 이견 때문에 인간관계 정리마저 깨지는 상황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을 뿐이다.
민노당과의 통합에 반대하는 진보신당 독자파의 대의원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가늠하기 어렵다. 독자파로 분류되는 인사들조차 “우리도 집계가 안 된다”고 말한다. 독자-통합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파 규모가 만만찮은 탓이다. 게다가 각종 선거에서 거둔 당의 성적표나 통합에 대한 사회적 압력의 강도에 따라 각각의 의견 분포가 달라져왔다. 한 당직자는 “당대회의 투표 결과를 통해 간접적으로 추론할 수밖에 없는데, 독자파가 통합안 가결을 저지할 수 있는 3분의1 이상을 확보한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독자-통합-중립파 비율을 ‘4 대 3 대 3’ 정도로 추정한다.
‘진보의 재구성’ 끝나지 않았다독자파를 구성하는 것은 대략 세 그룹이다. 과거 민노당 시절 당내 평등파(PD) 계열 최대 정파인 ‘전진’ 그룹과 사회당 탈당파가 중심인 ‘진보정치포럼’ 계열, 평당원 쇄신파를 자처하는 ‘진보작당’ 그룹이다. 이들을 연결하는 고리는 특정한 정치이념이나 노선, 정책이 아니다. 외부의 압력에 밀려 민노당과의 재결합을 추진하는 움직임에 대한 강한 반감이다. 이들 외에도 세 의견 그룹에 속하지 않고 다양한 이유로 통합을 반대하는 개인들도 있다.
독자파 그룹은 민노당의 주류를 구성하는 자주파(NL)에 대한 불신과 반감이 통합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한 편이다. 독자파 진영의 ‘이론가’로 꼽히는 장석준 전 상상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은 “당을 일사불란한 사상의 통일체로 생각하는 세력이 주류인 민노당에서, 소수파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는 뚜렷하다”며 “통합해야 할 당이 아닌데도 통합을 밀어붙이니 갈등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 전진 그룹의 핵심 활동가이던 김종철 서울 동작구 당협위원장은 ‘패권’이 작동할 수밖에 없는 통합 정당의 구조적 한계를 지적한다. 민노당의 주류가 과거 패권적 당 운영을 반성한다지만, NL-PD의 정파적 대립 구도가 해소되지 않는 한, 정치적 이견이 표출될 경우 다수의 힘에 의존한 패권적 의사결정이 재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 경우 통합에 대한 회의론이 커지는 것은 물론, 진보신당을 통해 확보해온 새로운 진보를 향한 비전과 동력마저 유실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런 독자파의 호소는 진보신당의 당세가 강한 수도권보다는, 그렇지 못한 지방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독자파로 분류되는 수도권의 한 당협 위원장은 “수도권이 아닌 지방의 경우 민노당과 당세에서 워낙 차이가 크기 때문에 아무런 조건 없이 통합하게 되면 그쪽에 완전히 잡아먹히는 상황이 온다”며 “이들에게 ‘국민이 원하니 하나로 합치라’고 말하는 건 정치적으로 무책임한 것”이라고 했다. 서울의 한 당협위원장도 “서울은 통합을 하더라도 민노당과 조직력에서 크게 밀리지 않기 때문에 통합파가 다수지만, 조직적 열세가 뚜렷하거나 과거 당내 자주파 그룹과 갈등이 심했던 지역은 독자파의 입지가 강한 게 사실”이라고 전했다.
창당 명분으로 내건 ‘진보의 재구성’이 결실을 맺지 못한 상황에서, 외부 압력에 밀려 당 간판을 내려야 한다는 점도 독자파가 반발하는 이유다. 강상구 전 대변인은 “새로운 진보를 열망하며 민노당을 뛰쳐나온 당원들에게 ‘반MB를 위해, 국민이 원하니 다시 합쳐라’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며 “통합이 선거에서 당선자를 내기 위한 공학적 수단이 아니라, 진보정당을 제대로 세우려는 성찰의 결과물이란 점을 당원들이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혼란과 분열은 통합파가 불러”진보 대통합 연석회의의 5·31 합의 뒤 돌출한 이정희 민노당 대표와 유시민 국민참여당(참여당) 대표의 합당 교감설도 통합에 대한 민노당의 진의를 의심받게 만들고 있다. 과거 신자유주의 세력으로 규정했던 참여당을 통합 진보정당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은 단계적 몸집 키우기를 통해 민주당 세력과 연립정부를 추진하려는 정치적 수순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선 통합파 역시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정희 대표를 비롯한 민노당 당권파가 참여당과 원활한 합당을 위해 진보신당과의 통합을 후순위로 미루려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통합파 일각에서 유시민 등 자유주의 세력의 침투를 막으려면 민노당과의 통합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정치적 일관성과 이념적 순수성을 앞세우는 독자파지만, 현실적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진보세력 통합을 요구하는 안팎의 압력이 워낙 강한 탓에, 민노당과의 통합을 거부하는 자신들의 태도가 조직 이기주의, 분열주의로 비쳐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경기 지역의 한 독자파 당원은 “갑작스러운 변심으로 당에 혼란과 분열을 가져온 것은 저들(통합파)인데, 오히려 원칙에 충실한 우리를 향해 분열주의라고 손가락질하니 답답한 노릇”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결을 달리하는 흐름도 있다. 막연히 통합에 반대하는 비토전략에서 벗어나, 녹색(생태)과 적색(노동)의 가치를 전면에 내걸고 재창당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다. 이른바 ‘녹색사회당’ 계열로 분류되는 이 흐름은 김현우 중앙당 녹색위원장이 선도하고 있는데, 최근엔 통합파의 일부에서도 녹색사회당론을 진보신당의 당론으로 합의하자는 제안이 나온다. 김 위원장은 “통합파 노선은 87년 체제의 NL-PD 정파 연합 구도를 복원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자는 것인데, 이 경우 진보세력 혁신의 길은 한층 요원해진다”며 “생태와 평등, 여성과 소수자, 평화와 연대의 가치를 구현할 ‘등대정당’으로 당을 재편해야 한다”고 말했다. 집권은 고사하고 의회 진출조차 당분간 쉽지 않겠지만, 새로운 진보의 가치가 반MB 연대의 흐름 속에서 유실되지 않도록 당의 불씨부터 살려보자는 얘기다.
이런 움직임에 통합파의 다수는 냉소적이다. 서울 지역의 한 당협위원장은 “지역 현장 활동 경험이 부족한 지식인 활동가들 사이에서나 통할 법한 얘기”라며 “정당 활동은 문서나 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조직하고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이상과 당위만 앞세워 무모한 실험을 감행하는 것은 정당보다 이념서클에 어울리는 행태라는 것이다.
2개월은 이혼 숙려 기간?
그러나 독자파는 이런 ‘소수파 전략’이 진보정치 세력이 더 장기적으로 지속할 수 있는 길이라고 본다. 장석준 전 실장은 “통합 진보 정당이 만들어지더라도 총선 후보 선정, 연립정부 참여 문제 등이 균열의 원심력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며 “2012년 대통령 선거까지 활발하게 전개될 진보정치권의 세력 재편에 대비해 하나의 정치적 구심을 만들어두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런 논의와 정치 행보로 미뤄 독자파는 분당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8월 당대회까지 남은 2개월은 독자파에게 숙려의 기간보다는 결별 이후 독자 생존을 위한 준비 기간이 될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이 점은 통합파인 고현종 위원장도 예감하고 있는 바다. “일단은 정치적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하겠지만, 최악의 상황에도 대비해야 한다. 그러려면 논쟁하고 비판하더라도 상대방에 인간적 상처를 주지 않는 게 중요하다. 지금 갈라져도 언젠가 다시 당을 함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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