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인류 60억 명에겐 60억 개의 양심이 있다.”
여기서 양심은 ‘내면의 진지한 소리’로, 선악의 구분을 넘어선 말이다. 병역거부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여호와의 증인’ 통계에 바탕하면, 지금껏 한국에선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이래로 1만6013명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가 3만779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2001~2010년 4185명의 병역거부자가 6473년 수감생활을 했고, 2011년 3월 현재 819명의 병역거부자가 감옥에 갇혀 있다. 병역거부의 역사는 반세기를 넘었지만, 병역거부가 공론화된 지는 올해로 10년이다. 2001년 12월 정토회 활동가 오태양씨가 병역거부를 선언했고, 앞서 보도를 계기로 논란이 뜨거웠다. 이렇게 10년 동안 51명이 병역거부자와 후원인의 모임 ‘전쟁없는세상’과 함께 병역을 거부했다. 이들 외에도 최근 병역을 거부한 강의석씨 같은 이들이나 사회적 선언 없이 조용히 감옥을 택한 ‘이름 없는 거부자들’도 있다. 지난 5월15일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을 즈음해 전쟁없는세상이 주도하고 평화·인권단체들이 함께한 ‘2011 세계병역거부자의날 준비팀’이 1인시위를 벌이고, 평화난장을 열었다. 여기서 만난 이들의 말을 듣고, 글을 살폈다. 누가 병역거부를 하는지 보면, 거꾸로 군대가 누구를 배제하고 누가 군대와 불화하는지 보인다.
나약한 것이 평화다“군대는 강합니다. 저는 약합니다.”
지난 5월2일, 릴레이 1인시위 첫날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 선 이준규씨는 피켓에 스스로 “약하다”고 썼다. 이날이 입영일이던 이씨의 글귀는 “총의 강함이 아니라 다른 이의 평화를 보게 하는 약함이 평화를 가져옵니다”라고 이어진다. 그에게 물었다. “혹시 참여해온 운동단체가 있나요?” “딱히 없는데요.” 대구에서 올라온 청년은 오롯이 단독자로 병역거부를 결심했다. 그의 병역거부는 폭력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때리지 않는 선생이 되겠다”고 선택한 교대에서 교수에게 뺨을 맞았다. 수업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교수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대학문화도 폭력적이었다. 복학생과 학군단을 중심으로 한 ‘남자단합대회’를 거부했다. 그는 병역거부 소견서에 “선후배 간의 관계를 돈독히 한다는 명목하에 선배의 권력을 확인하는 행사”라고 썼다. 그는 가해자로서의 기억도 고백한다. 당시에 여자친구는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이별을 통보받은 저는 제 곁에 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절망감에 그녀의 뺨을 때렸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가해와 피해의 기억이 그를 괴롭힌다. “눈을 감으면 교수에게 폭행을 당했던 왼쪽 뺨과 허벅지는 딱딱한 돌처럼 느껴지고, 폭행을 했던 오른손은 피가 잔뜩 묻은 것처럼 보인다.” 이런 그는 총을 든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자신이 없다.
병역거부자 임재성씨는 자신의 책 (그린비 펴냄)에 이렇게 썼다. “한국의 병역거부자의 경우 역시 감옥행을 감수하면서도 군사훈련을 거부하는 이유가 강한 신념 때문인 것으로 비춰졌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를 살펴보면 전쟁과 군사훈련, 남성성과 위계질서의 폭력에 동화될 혹은 버텨낼 자신이 없다는 두려움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51명의 병역거부 소견서에도 두려운 폭력의 경험은 자주 나온다. 2005년 4월 병역을 거부한 조정의민씨는 “남성 위주의 폭력적인 군사문화는… 가족에서도 역시 피할 수 없는 폭력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라고 썼다. 가정폭력을 보며 “무기력하게 방에서 숨어서 울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소년은 폭력을 거부하는 청년이 되었다. 그는 병역거부 전에 학교폭력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헌법재판소엔 아픈 기억을 씻어줄 기회가 있다. 현재 헌재에는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병역법 88조 1항과 향토예비군 설치법 15조 8항에 대해 6건의 위헌법률심판이 제청돼 있다. 이미 헌재는 2004년 병역법 88조 1항에 합헌결정을 내리면서도 사실상 국회에 대체복무제 도입을 권고했다.
릴레이 1인시위 마지막 날인 5월1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이정식씨가 피켓을 들었다. 병역거부로 수감됐다 닷새 전에 세상 밖으로 나온 이씨의 머리는 짧았다. 그는 “성소수자로서 군대에서 도저히 인권을 지킬 수 없어 병역을 거부했다”고 말했다. 2003년 7월 임태훈씨를 시작으로 성소수자 병역거부자는 4명이다. 이들은 ‘성별’로 수감되는 감옥에서 남다른 고충을 겪는다. 이씨도 교도관에 의해 ‘아우팅’(당사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타인이 성정체성을 알리는 행위)당한 경험이 있다. 2006년 3월 병역거부를 선언한 유정민석씨는 현역 전투경찰이었다. 그는 “테러진압 훈련을 받는 날이 잡히면 수일 전부터 잠을 설쳐야 했던” 심성의 소유자다. 도저히 견디지 못한 그가 병역거부 의사를 밝히자 부대에서는 의가사제대를 제안했다. 재판에서도 실형이 아니라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성주체성장애’ 진단서를 제출하면 병역이 면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매력적인 오답’을 거부했다. 자신의 병역거부 소견서 제목처럼 ‘나약하고 유약한 제 안의 여전사는 병역을 거부’하는 용기를 낸 것이다. 51명의 양심이 다른 것처럼 모두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병역거부자 일부는 유정민석씨의 글처럼 “남을 죽이는 연습을 해야 하는 시뮬레이션의 군사훈련조차 벌컥 손부터 떨리는” 이들이다. 도미야마 이치로의 에는 “폭력을 예감한 이는 선지자도, 영웅도 아니다. 그것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겁쟁이의 신체를 가진 자이다”라는 글귀가 나온다. 남성 중심 시선에서 이들은 겁쟁이일지 모르지만, 양심을 지키려고 감옥을 피하지 않는 용감한 거부자이기도 하다.
성소수자가 아니라도 군대의 성별 분립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2006년 7월 병역거부를 선언한 박철씨는 소견서에 “‘군대’와 관계 맺기 시작하며 누군가 ‘남자’나 ‘여자’로 분류되는 순간들이 거북합니다”라고 썼다. 2010년 11월 병역을 거부한 이태준씨도 ‘정상 남성 이데올로기’를 비판했다.
장애인 차별을 강화하는 군대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다. 2008년 11월 병역거부를 선언한 장애인권활동가 권순욱씨는 “장애인 문제의 핵심은 군대가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는 ‘신체 건강한 남성’의 정상성 규정과 일맥상통합니다”라고 밝혔다. 충북 청주에서 장애인권운동을 하던 문상현씨도 2005년 6월 병역을 거부했다.
이날 피켓을 든 이정식씨의 뒤에 있는 국회는 헌재의 입법권고에도 8년째 묵묵부답이다. 2004년 당시 임종인 열린우리당 의원,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이 각각 발의한 대체복무제 법안은 국회 본회의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대추리와 이라크의 이름으로지난 5월15일 오전 11시, 서울 용산 국방부 앞으로 자전거가 모여들었다. 이날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 행사에 참여하는 이들이다. 7살 승한이와 12살 승윤이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실장인 아버지 박진옥씨와 함께 자전거 행진에 참가했다. 강화도에서 온 고등학생은 병역거부를 고민한다고 했다. 이들은 국방부 앞에서 몸으로 함께 ‘PEACE’를 만드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바로 여기서 지난해 12월14일 문명진씨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연평도 포격사건(11월23일)이 벌어진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의 병역거부 소견서에는 지난 10년의 ‘전쟁과 평화’가 있다. “병역거부를 계속 고민하던 저는 미군기지 확장 이전 반대 투쟁이 벌어지던 2006년 평택 대추리에서 펼쳐진 일련의 사건들을 경험하며 병역거부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명의 황새울’ 작전이 벌어지던 5월4일 동틀 녘 대추리에서 저는 군대와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을 눈앞에서 보았습니다”라고 썼다. 이렇게 국가폭력의 체험은 이들에게 병역거부의 확신을 심었다. 51명의 병역거부 소견서에 ‘대추리’는 ‘이라크’와 함께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이라크 반전평화팀’으로 2003년 3월 이라크에 갔던 은국씨도 2009년 2월 병역을 거부했다. 그에게 미국의 선전포고 뒤에 바그다드를 떠난 일은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내가 도망쳐나온 곳에서, 도망쳐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아무도 이 학살을 멈출 수 없었고, 심지어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조차 막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마음먹었다. 이런 전범국에서 병역을 이행하지 않겠다고.” 2003년 5월 팔레스타인에서 그는 여권을 보여달라며 총을 들이미는 이스라엘 병사들과 마주쳤다. 은국씨는 “장전된 총에 조준돼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오줌을 지리고 온몸이 얼어붙어 숨쉬기 어려운 공포였다”고 기억한다.
행정부인 국방부는 입법부인 국회, 사법부인 헌재와 더불어 삼권분립, 아니 삼권동맹을 구축해 병역거부자의 인권을 가로막는 통곡의 벽이 되었다. 국방부는 2007년 9월 대체복무제 도입 계획을 밝혔다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 여론을 이유로 도입을 백지화했다. 5월15일 캠페인이 국방부 앞에서 시작된 이유다. 자전거 행진은 ‘너의 평화가 나를 부를 때’ 깃발을 앞세우고 국방부 앞을 떠났다.
산만한 것이 평화다5월15일 낮 1시,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 자전거 행렬이 도착했다. 먼저 와서 평화난장을 준비한 이들은 수감 중인 병역거부자를 알리는 피켓을 공원에 세워두었다. 2009년 11월 병역을 거부한 현민씨 사진도 있었다. 현민씨에게 마로니에공원은 각별한 곳이다. “말랑말랑한 대학 초년생 시절, 남성성의 결핍을 고민하며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병역거부운동에 가슴이 두근거린 적이 있다. 마로니에공원 앞에서 나눠주는 자료집을 읽고 눈물을 울컥 쏟았던 기억이 막연하게 떠오른다.” 그의 병역거부 사유서 일부다. 이처럼 그는 20대 내내 병역거부를 고민했지만 “내겐 키워드가 없는 것 같다”고 썼다. “가톨릭 세례명이 있지만 냉담자다. 단체에 속해 있지도 않다. …평화를 사랑하기보다 그냥 싸움을 못하는 것 같다. …후원모임 카페에다 대학 동기 녀석은 ‘평화의 꽃’이 되라고 적어놓았던데, 나는 ‘꽃’보다는 ‘꽃미남’이 되고 싶은 바람과 욕망이 훨씬 크다. 정말 그릇도 안 되는 놈이 분단국가에서 태어나서 주제넘게 욕을 보는구나 싶다.” 이토록 솔직한 청년은 “하지만 이런 경계에서 피어나는 요상한 방식의 주체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썼다.
평화난장은 노래도 하고 얘기도 하며 이어졌다. 병역거부운동의 오랜 친구인 가수 조약골씨는 “저도 10년 전에 아프가니스탄 침공 반대 시위를 하며 평화운동을 시작했다”며 을 불렀다. 고 권정생 선생의 글에 조약골이 곡을 붙인 노래는 “이 세상 어느 나라에도 애국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 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 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 테고~”라고 이어진다.
이날 사람들 앞에 선 이준규씨는 “가장 자랑스럽고 원망스럽고 후회스러운 나날이 병역거부 이후였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평화난장에 오래 참여해온 사회자 ‘아침’이 행사에 처음 참가한 다른 사회자에게 물었다. “오늘 어땠어요?” “산만했어요. 근데 산만한 것이 평화죠.”
5월16일 오전 11시,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 나동혁, 염창근 등 ‘오래된’ 병역거부자들이 모였다. 이날 병역거부권 연대회의는 헌재에 ‘대체복무제 입법부작위 위헌확인 소송’을 내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오재창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국제연대위원장은 “2004년 헌재가 국회에 대체복무제 입법을 권고했지만 국회에서 아직도 법을 만들지 않았다”며 “입법 의무를 방기하는 국회 때문에 침해된 병역거부자의 기본권을 확인해달라는 소송”이라고 밝혔다. 국내의 모든 법 절차를 마치고 유엔에 개인 청원을 내서 2010년 개인 통보를 받은 11명의 병역거부자가 소송 당사자다. 유엔자유권규약위원회는 한국 정부가 가입한 자유권 규약을 위반하고 병역거부자의 인권을 침해했으니 이들에 대해 보상을 포함한 구제 조처와 재발방지 대책을 세우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입법부작위 위헌소송’은 최후의 수단에 가깝다. 이미 병역거부자의 인권을 보장하란 요구가 국내외에서 쏟아졌고, 법적인 수단도 최대한 강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여한 병역거부자 대부분은 10년의 세월을 함께해왔다. 어느새 이들도 서른의 문턱을 넘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여한 염창근씨처럼 누구는 평화운동가로, 누구는 생활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 바빠서 오지 못한 이들도 있다. 오태양씨는 여전히 평화재단 활동가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고, 주민운동을 해온 유호근씨는 ‘한국의 몬드라곤(스페인의 협동조합)’을 만들 꿈을 향해 달리고 있다.
병역거부자 51명의 양심은 무지개처럼 다르다. 2003년 3월 풀무학교를 다닌 최준호는 “농부와 전쟁이 상반된다는 생태주의 신념”으로 병역거부를 선택했다. 경기도 평택에서 교사를 하다가 2006년 3월 병역거부를 선언한 김훈태씨는 1년6개월형을 마치고 대안학교인 경기도 과천 자유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 병역거부자 고동주와 백승덕, 개신교 거부자 하동기, 평화운동가 출신 오정록, 영화감독 상우… 양심의 이유는 달라도 대개의 병역거부자는 가정폭력·학교폭력·국가폭력 같은 폭력의 구조를 성찰하며 병역거부에 이르렀다. 예민한 감수성을 옥죄는 풍토에 굴하지 않고 맞선 이들은 일종의 생존자 아닐까.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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