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3월31일 오전 대구 경북과학기술연구원 총장 취임식에 참석해 정부의 동남권 신공항 건설 계획 백지화 발표를 비판하고 있다. 연합 이재혁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날을 세웠다. 이명박 대통령의 2007년 대선 공약인 동남권 신공항 건설이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폐기’된 다음날인 3월31일 박 전 대표는 “국민과의 약속을 어긴 것이라 유감스럽다. 동남권 신공항은 계속 추진돼야 한다”고 했다. “정부나 정치권이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아야 우리나라가 예측 가능한 국가가 되지 않겠느냐”는 말도 덧붙였다.
그의 말 어디에도 ‘이명박 대통령’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더라도 박 전 대표의 과녁이 이 대통령이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왜 그랬을까? 지난해 8월 청와대 회동 이후 양쪽은 비교적 평화로운 ‘휴전’ 상태였다. 박근혜계의 ‘공적’이나 다름없는 이명박계 이재오 특임장관은 박 전 대표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였고, 박 전 대표 쪽도 이 대통령 쪽을 두고 특별히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그런데 박 전 대표는 왜 이 휴전을 깰 만한 발언을 하고 나섰을까?
국토 균형발전 정치인 이미지박근혜계 구상찬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이 대통령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일 뿐, 그를 압박하려고 한 얘기가 아니다. 박 전 대표가 늘 강조하는 ‘신뢰의 정치’ 연장선에 있는 얘기다.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말아달라.” 다른 박근혜계 인사들도 박 전 대표의 발언에 이 대통령과 각을 세우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럴 작정을 했다면 세종시 논란 때처럼 직접 이 대통령을 비판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해 2월 세종시 수정안 논란과 관련해 “잘되는 집안은 강도가 오면 싸우다가도 멈춘다”는 이 대통령의 발언에 박 전 대표는 “백번 천번 맞는 말씀이지만, 그런데 집안의 한 사람이 마음이 변해 강도로 돌변하는 그때는 또 어떡해야 하는가”라고 강하게 맞받아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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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을 요구한 한 정치 컨설턴트는 “실제 속내가 어떤지는 몰라도,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박 전 대표는 ‘신뢰’ ‘약속’ ‘원칙’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대선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며 “그런 맥락에서 보면, 공약을 지키지 않은 이 대통령에게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니냐”고 말했다. 굳이 이 대통령을 직접 공격하지 않았지만 평소대로 ‘원칙’과 ‘신뢰’를 강조하며, 약속을 어긴 이 대통령과 대비되는 자신의 이미지를 거듭 강조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얘기다.
영남 지역의 이해가 걸린 동남권 신공항 건설을, 이명박 정부의 약점으로 꼽히는 국토 균형발전 이슈와 자연스럽게 연결하면서 자신은 지역 발전 방안까지 고민하는 차기 지도자라는 인식을 심어준 측면도 있다. 서울시장 출신으로 지지 기반 자체가 수도권인 이 대통령은 세종시 수정 시도, 과학비즈니스벨트 충청권 유치 공약 재검토 등으로 충청권의 반발을 사며 지역 발전 문제를 도외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반면에 박 전 대표는 세종시 수정안 논란 때 “당론으로 결정되더라도 반대한다”며 끝까지 맞서 수정 시도를 무산시켰다. 과학비즈니스벨트 입지 논란과 관련해서도 “대통령이 약속하신 것인데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고 하면 그에 대한 책임도 대통령이 지겠다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수도권 대통령’ 프레임 가두기
이렇게 ‘충청 소외론’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두 차례 논란에 이어, 이번엔 동남권 신공항 계획을 백지화함으로써 이 대통령은 영남 지역까지 홀대한다는 비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유승민 의원 등 박근혜계가 대부분인 대구 지역 한나라당 의원 11명은 3월30일 기자회견을 열어 “백지화 결정에서 국가의 미래와 국토남부권의 발전에 대한 국가 지도자의 철학과 비전, 고민과 결단은 찾아볼 수 없었다”며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국토 균형발전에 대한 철학의 부재이며, 2천만 남부권 국민들의 미래가 걸린 문제를 수도권의 논리로 재단한 데 대해 남부권 국민들은 분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논리에 비춰보면 박 전 대표의 발언은, 적어도 영남 지역에선 이 대통령을 ‘수도권 대통령’이라는 프레임에 가두는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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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박 전 대표의 손익계산서에도 플러스(+)만 찍히는 건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4월1일 기자회견에서 박 전 대표의 비판과 관련해 “(박 전 대표가) 지역구인 고향에 내려가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입장도 나는 이해를 한다”고 말했다. 역으로 박 전 대표에게 ‘지역구 의원’이라는 프레임을 덮어씌운 셈이다. 이명박계인 정두언 의원도 “박 전 대표의 신뢰를 지키는 게 국익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냐”며 “실망스러운 발언”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동남권 신공항 건설 추진 백지화 소식이 알려진 지난 3월28일 대구 지역 한나라당 의원들이 국회 의원회관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유승민·서상기·조원진·이한구·박종근·배영식 의원. 한겨레 김경호 기자
이런 관점은 실제로 박 전 대표가 차기 대선 공약으로 동남권 신공항을 재추진할 경우 얼마나 타당성이 높으냐는 논란으로 직결될 수 있다. 정부가 한나라당에 결코 유리하지 않은 4·27 재보선을 앞둔 이 시점에, 더구나 동남권 신공항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경남 김해을에서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치러짐에도 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을 백지화한 이유가 바로 경제적 타당성 부족이었다. 당장 정치적인 부담을 안더라도 경제적 실익이 없는 사업을 계속 추진하면 정권에 더 큰 부담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박 전 대표 말마따나 동남권 신공항이 “지금 당장은 경제성이 없다지만 미래에는 분명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항공 수요 전망을 봐가며 인천공항을 확장할 수도 있고, 지금의 김해·대구 국제공항도 수용 능력보다 실제 이용 현황이 떨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항공업계에서도 “신공항이 생긴다고 없던 수요가 늘어나느냐”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공약으로 (신공항을) 살리겠다고 하는 건 나라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표만 생각하는 포퓰리즘”(심재철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등 수도권의 이명박계 의원들이 박 전 대표를 비난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런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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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면 박 전 대표의 약속은 야당과 언론의 세밀한 ‘검증’을 통과해야 한다. 이 대통령이 대선 기간 내내 ‘한반도 대운하’의 경제성 논란에 시달렸던 것처럼 박 전 대표 역시 동남권 신공항의 경제성 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더구나 정치적 논리로 지어진 대부분의 지방 공항이 적자를 면치 못하는 현실과 맞물려 ‘동남권 신공항=지역 균형발전’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있느냐의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설령 타당성 관문을 무사히 넘기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신공항을 유치하려는 부산 가덕도와 경남 밀양의 경쟁은 부산 대 경남·대구·경북으로 영남 여론이 갈라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박 전 대표가 이를 다시 추진하려면 지금보다 더 구체적인 실현 방안을 내놓자마자 ‘둘 중 어딘가’를 선택하라는 압박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 이미 한 차례 정부로부터 ‘배신’을 당한 지역이기 때문에 모호한 공약으로는 어느 쪽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전 대표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경우엔 다른 지역의 표심은 사실상 포기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동남권 신공항과 관련한 박 전 대표의 태도는 내년 총선과 대선을 둘러싼 한나라당 내부의 구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 같다. 박근혜계 핵심 의원은 “신공항은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계가 박 전 대표를 ‘영남 지역이기주의’로 공격하는 소재가 될 뿐, 본선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의 얘기는 이렇다. “민주당도 ‘박 전 대표는 대통령이 결정한 뒤에야 발언한다’고 공격할 뿐, 신공항 재추진과 관련해선 아무런 언급을 안 하고 있지 않느냐. 영남 지역 발전을 위해선 민주당도 결국 같은 공약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이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건 경선에서 박 전 대표를 떨어뜨리려는 이명박계다.”
영남권 친이계 의원 흔들기
그런데 뒤집어보면, 신공항 문제는 이명박계가 결정적으로 분화하는 계기인 동시에 박 전 대표가 ‘대세론’을 더욱 굳게 다지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정부의 백지화 결정으로 가장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인 건 영남에 지역구를 둔 이명박계 의원들이다. 경남 밀양이 지역구인 이명박계 조해진 의원이 4월1일 MBN 에서 한 얘기엔 그런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저로서는 참 난감하다. 대통령의 고충은 이해되는데, 오늘 (대통령의) 회견을 본 영남 주민들이 볼 때는 만족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다. (박 전 대표의 언급은) 대체로 옳은 지적인 것 같다. (신공항 건설을 차기 대선 공약으로 추진하겠다는 데) 100% 공감한다.” 이 대통령과 지역 여론이 충돌하는 지금 상황에선 박 전 대표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이명박계는 수도권과 영남으로 양분될 수 있다. 의원들로선 내년 총선에서 ‘생환’이 가장 중요한 목표이므로, 특히 영남 의원들은 지역 민심을 붙들어 매줄 ‘미래 권력’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높아진다. 더구나 이명박계엔 박 전 대표에게 맞설 만한 강력한 대선후보나 구심점이 없다. 박근혜계가 똘똘 뭉친 상태에서 영남 이명박계가 박 전 대표 쪽으로 ‘월박’을 하면 박 전 대표의 대세론이 거세지며 중립지대까지 흡수할 공산이 크다. 이명박계 핵심 의원은 “이미 ‘월박’은 시작됐고, 가속화할 수 있다. 이명박계에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에 내년 총선까지는 ‘박근혜 판’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명박계 일부에선 탈당 시나리오도 거론되지만, “따라나갈 때 국회의원 당선을 보장해줄 만한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수도권 친이계와도 전략적 제휴?박 전 대표가 비교적 손쉽게 한나라당을 장악할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흥미롭게도 이런 얘기는 수도권 이명박계에서 나온다. 내년 총선에서 이기려면 지금 당권을 좌우하는 이상득 의원과 이재오 장관 쪽을 밀어내고 세대교체를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박 전 대표 쪽과 ‘전략적 제휴’를 해야 한다는 논리다. 박 전 대표도 한나라당으로 총선·대선을 치러야 하므로 세대교체라는 명분과 이명박계의 지원을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한나라당에선 지금의 안상수 대표 체제로는 내년 총선을 치르기 어렵다는 당내 여론이 높은데, 4·27 재보선에서 지게 되면 조기 전당대회를 통한 지도부 교체는 더욱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전략적 제휴’다. 총선에서 기대만큼 결과를 내지 못하거나, 경선 과정에서 이명박계의 누군가가 박 전 대표의 대항마로 급부상한다면 상황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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