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전세계가 겪고 있는 전대미문의 국제 금융위기는 금융감독이 느슨해진 가운데 금융과 실물 부문의 괴리가 커지면서 금융에 거품이 생긴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실물경제에 대한 금융의 책임을 중시하는 이슬람 금융은 앞으로 논의될 국제 금융 질서의 개편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이슬람 금융은 국제시장의 새로운 자금 공급처이자 투자처로 전세계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누구의 말일까?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 이슬람 금융에 대한 찬사는 다름 아닌 이명박 대통령의 공식 연설문의 한 대목이다. 때는 지난 2009년 1월이었다. 2008년에 닥친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진은 태평양을 가로질러 한반도를 뒤흔들었다. 외국 투자자금이 주식시장에서 대거 이탈했다. 2008년 5월 1900선을 넘나들던 코스피 지수는 해가 바뀌고 1100선까지 물러섰다. 외환보유액은 2600억달러에서 2천억달러로 줄어들었다. 금융 당국은 외화를 확보하느라 비상이 걸렸다. 미국·유럽계 자금뿐 아니라 제3의 지역을 통해 자본 확보 경로를 늘리자는 목소리가 금융계 안팎에서 높았다. 특히 중동의 ‘오일머니’에 꽂힌 시선이 많았다.
2009년 1월13일 서울 한복판에서 열린 ‘이슬람 금융 세미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우리나라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과 이슬람권 국가 중앙은행들의 모임인 이슬람금융서비스위원회(IFSB)가 준비한 행사였다. 행사장인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는 국내외 금융계 인사 300여 명이 북적였다. 당시 전광우 금융위원장이 대독한 대통령 축사를 보면, 정부는 ‘오일머니’를 끌기 위해 당장 이슬람 금융 방식을 수용할 태세였다. 3월에는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 행정안전부, 금융감독원, 로펌 등이 태스크포스를 짜고 머리를 맞댔다. 반년 뒤인 9월 기획재정부는 “이슬람 자금 도입을 지원하기 위해” 이슬람 채권(수쿠크) 지원 방안을 마련했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개정안은 이른바 ‘이슬람채권법’ 혹은 ‘수쿠크법’이라 불렸다. 현재 개신교의 반대에 주춤하고 있는 이슬람채권법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계기는, 지금은 많이 잊혀졌지만, 2008년 금융위기였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던 이슬람채권법은 종교 문제가 스며들면서 흐름이 다시 크게 바뀌고 있다. 분위기가 널을 뛰면서 가장 피해를 보는 쪽은 이슬람 자본을 유치했던 금융업체들이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최근 우리나라 산업은행에 35억링깃(약 11억6600만달러)어치의 채권 발행을 승인하면서, 그 가운데 20억링깃은 이슬람 채권으로 발행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은 이른바 ‘오일머니’를 유치하기 위해 말레이시아로 진출해, 종교적 색채가 없는 일반 채권인 링깃 채권을 발행하는 방식으로 외화를 확보했다. 이슬람 채권은 율법의 구속을 받지만, 링깃 채권은 이슬람 율법의 구속을 받지 않는 일반 채권이다. 말레이시아 정부의 이번 결정은 현지에서 한국 자본들도 일부 오일머니를 쓰기 위해서는 이슬람식 금융기법을 따르라는 ‘선언’에 가까웠다. 수출입은행도 지난해 10월 말레이시아 정부에 10억달러어치의 링깃 채권 발행을 신청했지만, 3억달러어치만 승인받았다. 역시 이슬람 채권을 사용하라는 우회적인 압박이었다.
한국 건설사와 궁합 맞는 이슬람 채권말레이시아 정부의 압력이, 이슬람채권법을 두고 논란을 벌이는 한국에 대한 보복으로 풀이될 수 있을까? 단언하기는 힘들다. 수출입은행 관계자는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슬람 금융권의 허브로 도약하려는 야심이 있어서 수쿠크 발행을 늘리기 위해 링깃 채권 발행은 줄인다는 입장을 최근 몇 년 사이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정책 변화가 아니라는 얘기다. 물론 최근 국내의 분위기가 말레이시아 정부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있다. 지난 2월 말 한국을 방문한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전 말레이시아 총리는 “금융 시스템의 하나인 이슬람 채권을 한국이 왜 반대하는지 모르겠다“며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여전히 말레이시아 중앙 정계에 영향을 미치는 노회한 정치인의 태도가 해당 국가의 정책에 반영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나라 수출입은행 관계자도 “말레이시아 쪽과 거래하면서 수쿠크가 아니면 앞으로 한동안 아랍권에서 채권 발행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다른 금융회사들도 말레이시아에서 자금 유치를 줄줄이 포기하고 있다. 2008년 말레이시아에서 20억링깃을 빌린 현대캐피탈이나 2009년 말레이시아 채권시장에서 10억링깃을 확보한 하나은행도 최근 현지에서 추가 자금 조달 계획을 유보했다. 말레이시아 정부의 강경한 입장을 보고 ‘눈치껏’ 발을 뺀 셈이었다. 현대캐피탈 관계자는 “말레이시아 정부가 입장을 바꾸거나 우리나라에서 조세특례제한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쿠알라룸푸르에서 채권을 추가 발행하기는 한동안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건설업계도 이슬람채권법이 주저앉을까 걱정하고 있다. 이슬람 채권이 앞으로 중동 시장 진출에 쓸 만한 도약대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건설업계의 얘기를 들어보면, 최근 중동 시장에서 건설업체들의 경쟁이 격화하면서 과거처럼 중동 정부로부터 두둑한 ‘현금’을 보장받는 일은 줄어들었다. 이를테면 수익형 민간투자사업(BOT) 방식처럼, 이제는 건설사가 알아서 자금을 조달하고 도로나 공장 등을 건설한 뒤 일정 기간 사용료 수입을 거둬가는 방식의 계약이 늘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건설사들의 자금조달 부담이 늘어났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중동에 진출하는 국내 건설업체들에 이슬람 채권은 구미가 당기는 메뉴다.
2008년 하나금융경영연구소가 낸 ‘이슬람 금융의 부상’ 보고서를 보면, “(이슬람 채권을 거래하는) 이슬람계 금융회사들은 이자를 노린 단순 자금 제공자가 아닌 일종의 투자자이므로 수익 발생시까지 자금 대가 지급 의무가 없고 담보 설정이 없어 초기 자금 조달 비용이 낮다”는 것을 장점으로 꼽았다. 해외건설협회 관계자는 “이슬람 채권은 현지 자금을 빌릴 때 조건이 좋아서 국외 건설 사업과 궁합이 맞다”고 말했다. 국내 한 건설사의 말레이시아 지사 지부장은 “이슬람권에서는 수쿠크를 활용하면 자금조달 경로가 더 다양해지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수쿠크는 미래의 위기 넘을 방책”
물론 정부가 추진하는 이슬람채권법이 무산되더라도 당장 큰 영향은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일반적이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외화 유동성이 풍부하고, 링깃 채권을 통해 들어오는 오일머니는 아직 미미하기 때문이다. 국내 법인이 이슬람 채권을 발행한 건수는 아직 없다. 문제는 장기적인 영향이다. 한국투자증권 남경훈 과장은 “이슬람채권법을 도입하려는 이유가 미래의 위기에 대비해 자금조달 경로를 다양하게 하자는 것인데, 벌써 금융위기 시절을 잊은 듯하다”고 말했다. 이지언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현재 외환 유동성에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는 오일머니가 아쉬울 이유가 전혀 없지만, 앞으로 어떤 형태로 외환 유동성 위기가 닥칠지 모른다. 따라서 미래의 위험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이슬람 채권 문제는 전향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font color="#006699">■ 수쿠크란? </font>
이슬람 금융의 기본 원칙 가운데 하나는 이자의 청구와 지급을 금지하는 것이다. 단지 돈만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은 불로소득이라는 이유로 엄격하게 금지된다. 이슬람 금융에서 등장한 수쿠크, 즉 이슬람 채권은 이런 전통을 따르는 금융상품이다.
이슬람 채권의 운용 방식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자동차를 사려고 금융기관에 돈을 빌리려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자본주의 방식에서는 금융기관이 그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와 원금을 돌려받는다. 그렇지만 이슬람 금융에서는 그에게 아예 자동차를 사주고 그에 대한 사용료(이자)와 구입비(원금)를 차차 돌려받는 방식을 취한다. 사실 똑같은 거래지만 이슬람 채권 거래 장부에는 이자소득이 발생하지 않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수쿠크가 논란을 낳는 이유도 이 대목 때문이다. 이슬람채권의 거래는 사실상 일반 채권거래와 같지만, 형식만 보면 현물거래이기 때문에 다른 채권거래와 달리 취득세·등록세·양도세 등이 줄줄이 따라붙게 된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은 굳이 세금 부담이 많은 이슬람 채권을 이슬람 채권을 발행하지 않았다. 정부가 조세특례제한법을 개정하려고 하는 취지도 이슬람 채권의 특수성을 인정해 다른 일반채권과 동등한 수준에서 과세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개신교계는 이슬람채권에 대한 특혜라고 맞서고 있다.
그밖에 이슬람 금융의 특징을 들자면, 이슬람채권은 투기적 목적의 파생상품에 대한 투자를 금한다. 율법에 따라 사회적 해악으로 간주되는 담배, 술, 도박, 돼지고기 등에 대한 투자도 금지한다. 금융기관마다 추청치가 엇갈리지만, 전세계 이슬람채권 시장 규모는 1조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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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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