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후계 체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후계 구도의 형성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북한 체제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 북한의 외교와 대남 정책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유례없는 3대 세습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넘어, 북한의 후계 구도가 한반도 정세에 미칠 영향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과정’으로서의 후계 체제후계 체제는 진행 중이다. 김정은이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 후계자의 위상을 확보한 것은 사실이다. 북한이 군을 앞세우는 선군(先軍) 체제고, 군에 대한 당의 영도라는 측면에서, 그 자리가 후계자의 위상과 지위를 담보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후계자로 공식화되는 과정은 남아 있다. 그런 측면에서 북한의 후계 체제를 과정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중요하다. 이 과정은 ‘김정일 체제’ ‘후계 관리 체제’, 그리고 ‘김정은 체제’라는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물론 각 단계는 겹친다.
현 시점은 김정일 체제에서 후계 관리 체제를 구축하고, 김정은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점을 예고한 상황이다. 당분간 후계 변수가 북한의 정책 결정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기는 어렵다. 지금은 엄연히 ‘김정일 체제’이기 때문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과거 김정일 후계 체제 형성 과정을 들어, 김정일-김정은 공동 통치의 가능성을 거론한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그때와 다르다. 김정일은 이미 1960년대 후반 당내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고, 1970년대 초반에 후계자의 위상을 확보했다.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후계자로 공개됐을 때, 그는 이미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후계자의 지위를 확보했기 때문에 1980년대 중반 이후 김일성-김정일 공동통치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정은과 관련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가 지금까지 어떤 경력을 지녔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 확인할 수 없다. 북한이 ‘비밀의 왕국’이라서 우리가 알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김정일도 후계자 시절에 외부에 공개된 적은 없지만, 그의 지위와 위상은 다양한 경로로 외부에 알려졌다. 예를 들어 1990년 서동권 안기부장이 방북해서 김일성 주석을 만났을 때, 그 자리에 김정일이 배석했다. 서동권 부장은 당시 김일성 주석이 주요 현안에 대해 하나하나 김정일의 의견을 묻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반면 김정은은 젊고 경험이 부족하며, 능력이 검증되지 않았다. 건강이 나빠지고 있는 통치자와 젊은 후계자 사이의 괴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김정일 위원장은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후계 관리 체제를 구축했다. 국방위원회는 장성택, 당은 최룡해, 군은 리영호에게 실무를 맡겼다. 이번 당 대표자회 인사는 북한의 현 권력 서열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지만, 앞으로 이들이 중심이 돼 후계자 형성 과정이 구체화될 것이다.
김정일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는 한 후계자의 정책 성향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김정일의 건강이다. 앞으로 건강이 악화돼 국정을 수행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면, 김정은이 후계 관리 체제를 기반으로 국정 전반에 영향력을 확대할 것이다.
후계 형성 과정이 무난하게 진행될까? 일부의 예측대로 이 과정에서 후계자와 군부, 혹은 엘리트 내부의 갈등이 나타날 것인가? 예측하기 어렵다. 북한 체제의 특성을 고려할 때, ‘불안정 시나리오’는 가능성이 낮다. 북한은 ‘수령제’를 오랫동안 유지해왔다. 이런 ‘일가족 사회주의’의 특성은 과거 소련이나 중국에서 나타났던 집단 체제가 북한에서 등장하기 어려운 이유다. 또한 김정일이 주도한 후계 관리 체제가 작동하고 있다. 이미 국방위원회의 위상을 강화하고 실무 기능을 확대했다. 이번 당 대표자회를 통해 당의 인사와 기능도 정비했다. 인물과 정책에서 연속성도 있다.
북한 군부 또한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정치화돼 있고, 선군 체제 아래에서 이미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개혁파와 보수파, 이렇게 구분할 정도로 엘리트의 성향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정치 체제도 아니다. 후계 구축 과정에서 노선 갈등이 관료제 내부의 이익다툼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별로 없다.
앞으로 드러날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은 결국 내부 요인보다 외부 요인이 더욱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후계자가 물려받아야 할 체제는 여전히 어려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우선적인 과제는 경제다. 식량은 부족하고, 원자재 공급은 원활하지 않으며, 내부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한계가 있다. 북한 경제가 정상화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내부적인 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적인 개방이다.
북한의 선택, 한-미에 달렸다내부적으로 시장 통제는 성공할 수 없음이 최근 화폐 교환 실패 사례에서 확인됐다. 계획을 강화해서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점차 시장의 역할을 확대해야 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개방이다. 자본과 설비를 외부에서 구해야 한다. 그러려면 외교 환경이 개선돼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핵을 포기하는 것이다. 핵개발과 경제부흥은 양립하기 어렵다. 6자회담에 나와야 한다. 그래서 핵 억지력을 포기하는 대가로 평화 체제와 외교관계 정상화, 그리고 경제 지원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 북한이 예고한대로 2012년 강성대국의 문도 열릴 것이다.
북한의 후계 체제를 과정으로해석하는 시각이 중요하다.
이 과정은 ‘김정일 체제’ ‘후계 관리 체제’,
그리고 ‘김정은 체제’라는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이다. 북한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아니라, 북한의 선택을 주도할 수 있는 대북정책이 더욱 중요하다.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인가? 그것은 6자회담 참여국들의 협상 의지에 달려 있다. 북한이 남북관계를 개선할 것인가? 그것은 한국의 대북정책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후계 관리 체제에서 김정은 체제로 이행해가는 북한의 정책 선택은 관련 당사국이 어떤 정책을 선택하느냐에 영향을 받는다. 언제부터 한반도 정세를 북한이 주도했는가? 역사적으로 그것은 착각이고, 사실이 아니다. 지난 20년의 핵 문제 역사에서 협상 국면을 북한이 주도하지 않았다. 한-미 양국과 중국의 적극적인 외교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남북관계도 마찬가지다. 북한이 하면 하고, 안 하면 안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북한이 대화에 나올 수 있는 환경을 남쪽에서 적극적으로 조성할 때, 대화도 이뤄지고 현안 문제도 풀 수 있었다.
중요한 시점이다. 후계 체제를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다. 3대 세습에 대한 도덕적 비판이 거세다. 북한 체제의 전근대적 성격에 대한 평가를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도덕과 정책은 달라야 한다. 대북정책은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상대해야 한다. 당장 후계 변수로 북한의 정책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고, 외교 분야나 대남 분야의 실무 책임자들 역시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 강화된 국방위원회와 더불어 정비된 당이 김정은의 경험 부족을 보완하겠지만, 후계자의 정치가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다만 김정일 위원장 입장에서 현 시점은 초조하다. 김정일 위원장은 후계자에게 더 좋은 정책 환경을 물려주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강성대국 원년이라는 2012년은 다가오고, 건강은 악화되고 있다. 시간이라는 변수가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북한이 서두를 가능성이 크다. 6자회담 환경에서 후계 변수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핵 문제는 김정일 체제에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 시기를 놓치면 더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의 건강이 악화돼 더 이상 국정을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후계 관리 체제를 중심으로 정책 결정이 이뤄질 것이다. 후계 관리 체제는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가? 정책 결정이 분산돼 있다. 관리자들이 후계자의 권력을 넘볼 수 없도록 당과 군, 그리고 국방위원회의 역할을 나눠놓았다. 김정은의 리더십은 시간과 경륜, 그리고 통치의 기술이 축적돼야 발휘될 것이다.
3대 세습에 대한 도덕적 비판이 거세다.그러나 도덕과 정책은 달라야 한다.
대북정책은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상대해야 한다.
당장 후계 변수로 북한의 정책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분산된 후계 관리 체제는 어느 일방의 주도가 아니라 ‘협치’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대외정책에서 유연성을 제한하는 변수다. 북한이 먼저 적극적인 이니셔티브를 행사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6자회담에서 현안을 둘러싸고 입장 차이가 있을 때, 혹은 남북관계에서 불신의 환경이 조성됐을 때 김정일 체제는 ‘결단’할 수 있지만, 후계 관리 체제는 협의해야 한다. 북한 내부적으로 입장 차이가 있을 때 조정 방식이 달라질 수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북한의 후계 문제를 이유로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나 이명박 정부의 ‘기다리는 전략’이 지속돼서는 안 될 것이다. 이미 많이 기다렸다. 북한의 선택만 바라보는, ‘정책도 아닌 정책’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북핵 문제는 악화됐다. 현재 북한의 핵 활동이 동결된 상태가 아니다. 핵실험을 기반으로 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는 핵무기의 소형화 기술은 지금도 진전되고 있을 것이다. 남북관계는 어떻게 되었는가? 불신의 계곡을 넘어 위기의 순간이 계속되고 있다. 또한 동북아 대립 구조는 심화되고, 결정적으로 중국만 대북 영향력을 강화했다.
이제는 한-미 양국이 한반도 현안을 능동적으로 끌고 가야 한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정세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동북아의 주요 2개국(G2) 시대는 협력보다 경쟁으로 나타나고 있다.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있는 오바마 행정부는 환율 문제로 중국을 압박하고 있고, 중국은 이제 동북아에서 힘의 외교를 과시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여전히 천안함 사건의 출구를 찾는 데 소극적이다. 6자회담 관련국들의 크고 작은 갈등을 고려할 때, 6자회담 재개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최악의 대북정책 정부로 남아서야그러나 11월 미국의 중간 선거를 계기로 새로운 협상 환경이 조성될 가능성이 있다. 오바마 행정부 내부에서 이미 ‘전략적 인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시간이 흘러간다고 해서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중국 역시 북한의 핵개발을 지켜볼 수 없다. 미-중 양국 사이에 경쟁적 요소가 있지만, 아직은 협력의 필요성을 무시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도 마찬가지다. 이대로 임기를 마칠 것인가? 남북관계의 역사에서 1972년 7·4 공동성명 이후 최악의 대북정책 성적표를 받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당분간 상황이 어렵지만, 구름이 걷히는 국면을 대비할 필요가 있다. 남북관계 개선을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다. 그리고 변화하는 동북아 정세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준비를 해야 한다. 우선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금강산 관광을 재개해야 한다. 남북관계에 대한 큰 그림 없이 현안을 해결하기는 어렵다. 이번 기회에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고, 이산가족 상봉을 정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남북관계가 너무 멀리 왔지만, 이럴 때일수록 구체적인 분야에서 성과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동북아 질서 변화라는 큰 판에서 우리가 역할을 할 수 있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통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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