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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노동하는 시민이 되어야 하는가


자본주의 사회의 불청객, 노숙인을 공공성의 이름으로 배제하는 시스템에 반대한다
등록 2010-09-08 11:49 수정 2020-05-03 04:26
사회는 ‘구호’와 ‘자립’의 이름으로 노숙인을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9월1일 서울역에 앉아 있는 노숙인. 사진 한겨레 정용일 기자

사회는 ‘구호’와 ‘자립’의 이름으로 노숙인을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9월1일 서울역에 앉아 있는 노숙인. 사진 한겨레 정용일 기자

올해 초 필자가 논문을 쓰기 위해 서울역에서 70여 일가량 거리 노숙을 감행했을 때, 서울역을 지나는 시민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젊은 놈이 열심히 일해서 먹고살 생각은 안 하고…”였다. 그럴 만도 하다. 서울역에서 생활하는 대부분의 노숙인 나이가 50대 이상인 상황에서 필자는 굉장히 어린 축에 속했으니까. 하지만 이는 ‘젊은 놈’에 초점을 뒀을 때이며, ‘열심히 일해서 먹고사는 것’으로 초점을 옮겨오면 얘기는 달라진다. 요컨대 필자는 굉장히 근본적인 부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노숙인의 ‘자립’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노동’을 하는 자만이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존재로 간주되는가? 바꿔말해, (현 사회가 요구하는) 자립은 왜 당연한 것이며, 노동을 원하지 않는 노숙인은 어째서 비난받아 마땅한 존재가 되는가?

혹자는 이런 질문들이 현실을 무시한 이상적 지적일 뿐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구체적 대안도 없는 추상적 수준의 비판이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좋다. 언제까지 계속 근본적인 부분을 덮어버린 채 ‘현실적’인 얘기만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설령 필자가 이상주의자로 비치더라도, 또는 탁월한 대안을 제시할 역량까지는 비록 갖추지 못했더라도, 한 번쯤 논의해볼 가치가 있는 ‘거리’임에는 분명하다.

시민이지만 시민이 아닌 존재

흔히 사회적 소수자로 간주되는 집단은 대부분 나름의 뚜렷한 정체성을 갖지만 거리 노숙인은 다르다. 분명 대한민국의 국민이자 서울의 시민으로 태어나 살아가고 있음에도, 심지어 사회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국민이나 시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는 거의 없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여기에 위치한 것도 아니고 저기에 위치한 것도 아닌, ‘경계’에 걸쳐 있는 형국이다.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위치지어버렸기 때문이며, 이는 결국 자본주의 문제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자본주의 담론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지금 시대는 모든 것이 ‘교환가치’로 평가되며,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가 권장하는 ‘바람직한’ 시민의 상(像)이 존재한다. 즉, 자본주의 시스템에 ‘순응’하고 여기에 ‘일조’하는 사람이 되기를 요구받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거리 노숙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불청객’이다. 국민이지만 국민이 아닌, 시민이지만 시민이 아닌 아이러니한 상황은 이 때문에 발생한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낙오자’인 거리 노숙인을 ‘구호’한다거나 그들이 ‘자립’하도록 이끈다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에 정면으로 반하는 그들을 다시 자본주의 체제로 끌어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인권’이나 ‘사회복지’라는 잘 차려진 옷을 입고 드러나긴 하지만 말이다.

이쯤이면 분명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든 뭐든 다 떠나서 거리 노숙인은 시민에게 ‘피해’를 입힌다”고. 그렇다면 필자도 할 말이 있다. 당신이 말한 사실이 일반화 가능한 것이냐고. 다시 말해, 당신이 경험한 ‘피해를 주는 노숙인’은 전체 노숙인 중 ‘일부’일 뿐임을 아느냐고. 요컨대 평범한 거리 노숙인, 즉 시민의 기준에서 표준 행동양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노숙인은 애초에 눈에 띄지 않는다. 결국 노숙인은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만’ 노숙인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거리 노숙인이 살아가는 서울역 등 공공 공간에는 ‘공공의 가치’가 담겨 있다. 그러나 공공 공간에 담지된 공공성은 ‘누구에게나 열린 중립적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에게만 허용되는 배타적 공공성으로 개념화돼 있다. 결국 공공 공간의 거리 노숙인은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저해하고 도시 미관을 해치는, 그래서 ‘부정’돼야만 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들은 주류 사회, 그리고 주류 담론이 장악한 공공 공간이 요구하는 특정한 방식·규칙·자격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공공 공간으로부터 공공성을 보장받지 못한다. 오히려 공공성의 미명하에 추방되고 격리된다.

그들의 ‘인도적’ 은폐

지난 2005년 1월, 서울역 거리 노숙인 2명이 잇따라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노숙인과 경찰 간 실랑이가 벌어졌고, 바로 며칠 뒤 서울시는 ‘역사 내 노숙인 단속 및 예방 대책’을 발표했다. 목표는 물론 ‘거리 노숙인 추방’이었다. 이때 서울시가 단속의 근거로 내세운 노숙인 문제점의 주요 골자는 사회적 안전을 위협하고 환경을 저해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 발생한 ‘노숙인 사망으로 인한 (노숙인들의) 역사 내 난동사건’을 비롯해 노숙인이 야기한(혹은 노숙인이 야기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사고들이 사례로 언급됐다. 물론 ‘뉴욕 지하철 노숙자 실화 화재사건 관련 개황(요약)’이라는 또 하나의 자극적 사례를 첨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시 서울역 쪽의 책임이 거론됐을 만큼 의문스러웠던 노숙인의 죽음 정황은 철저히 배제된 채, 그들을 추방·격리할 근거가 되는 사례만 선별적으로 제시됐던 것이다. 결국 서울시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부합하는 시민’의 안전과 권리 보호를 위해, 그리고 ‘공공 공간’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거리 노숙인의 공간적 배제를 합리화했다. 또한 추방의 대안으로 ‘보호시설’을 제시함으로써 특정 공간으로 그들을 포섭할 수 있는 기제까지 갖추었다. 결국 배제의 기제와 포섭의 기제가 공존하는 이런 방식을 통해 서울시는 ①공공 공간에서 거리 노숙인을 추방할 수 있었고, ②‘보호시설 입소’라는 명분을 제시함으로써 노숙인의 인권을 고려한 ‘인도적’ 대책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었으며, ③지배사회가 권장하는 공간(쉼터·시설 등)으로 그들을 포섭함으로써 자본주의 시스템으로의 재편입을 꾀할 수 있었다.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를 앞둔 지금, 정부는 임대주택을 매입해 노숙인에게 ‘그룹홈’을 제공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보건복지부는 ‘기존 쉼터는 항상 인원이 초과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자활 의지를 키울 수 있는 여건을 갖춰 정상적인 사회복귀를 돕기 위해’ 추진 중인 사안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결국 거리 환경 정비를 통해 거리 노숙인을 은폐하려는 전략적 공간 배치의 일환일 뿐이다. 한-일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거리 노숙자들에 대한 특별보호대책’을 발표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거리 노숙인은 ‘공공 공간에 있으면 안 될 존재’ ‘사회적으로 은폐해야 될 존재’로 치부됐기에 ‘국민’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서울시에서 추진하는 노숙인 대상 인문학 수업은, 공공 공간의 배제와 포섭에 응하지 않는 거리 노숙인에게 가해지는 ‘제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노숙인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희망의 인문학 과정’은 인문학을 통해 그들의 자립 의지를 키우게 한다는 취지로 개설된 서울시의 무료 강좌다. 수업에 참여한 사람은 시에서 주도하는 일자리 배정에 우선권이 주어진다. 문제는 쉼터나 시설에 입소한 노숙인만을 대상으로 하고 거리 노숙인은 제외된다는 사실이다. 공간적 재배치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전략의 도구로 인문학 수업이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거리 노숙인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래서 시스템에 동화되지 못하는 그들을 제재하거나 강제로 사회에 편입시키려는 주류 사회의 시도는 굉장히 ‘타당하게’ 비친다. 결국 필자는 “‘틀림’이 ‘다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본의 논리로 점철된 주류 사회는 시스템을 견고히 유지하기 위해 ‘통일성’을 주요 가치로 내건다. 이 과정에서 ‘차이’는 ‘틀림’이 돼버린다. 거리 노숙인을 노마드적 주체로 바라보는 이상적 세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다름’이 ‘틀림’이 돼버리는 세상이라면 그 사회는 굉장히 유감스럽지 않겠는가.

김준호 경희대 지리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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