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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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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이 달리면 세상이 달라진다


2천만원 네티즌 모금으로 ‘홈리스 월드컵’에 첫 출전…
다양한 사회적 기업과 제도 개혁으로 빈곤 문제 해결해야
등록 2010-09-08 11:42 수정 2020-05-03 04:26
‘홈리스 월드컵’ 출전을 앞둔 빅이슈코리아팀이 친선 경기 도중 모여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사진 홍진훤

‘홈리스 월드컵’ 출전을 앞둔 빅이슈코리아팀이 친선 경기 도중 모여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사진 홍진훤

김영철(54)씨는 지난 1998년 외환위기 때 실직을 한 뒤 노숙자가 됐다. 우희진(26)씨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가난하게 살다가 할머니마저 돌아가신 뒤 거리에서 생활해왔다. 둘 다 잘 웃지 않는다. 미래를 계획하지 않으며 살아온 지 오래다. 그런 두 사람이 함께 오는 9월15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로 떠난다. 9월16일부터 25일까지 열리는 ‘홈리스 월드컵’ 출전을 위해서다.

노숙인 자활의 디딤돌

지난 2003년 오스트리아 대회를 시작으로 매년 열린 홈리스 월드컵은 노숙자의 재활을 돕기 위해 1991년 영국에서 창간된 잡지 의 제안으로 탄생했다. 1회 대회 때 18개국이 참여했는데 올해는 64개국이 참가할 예정이다. 한국팀이 참가하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홈리스 월드컵 한국팀에서 김씨는 최고령, 우씨는 최연소 선수다. 팀에는 총 7명의 선수가 있다. 모두 노숙인이다.

홈리스 월드컵 한국팀의 노숙인 7명에게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소셜 엔터테인먼트 매거진 의 판매원들이다. 영국 의 한국판인 는 2년이 넘는 준비 기간을 거쳐 지난 7월 창간호를 냈다. 노숙인이 직접 잡지를 판매하며 수익을 올리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는 현재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등 38개국에서 제작·판매하고 있다. 영국에서만 5천여 명의 노숙인이 를 통해 자활에 성공했다.

는 온라인 카페의 작품이다. 2008년 10월 한국에도 가 만들어지길 희망하는 사람들이 모여 온라인 카페(cafe.daum.net/2bi)를 열었다. 현재 회원 수만 1306명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재능을 기부하며 창간 준비를 도왔다. 실질적인 창간은 노숙인 자활을 지원하는 비영리 민간단체 ‘거리의 천사들’(www.st1004.net)이 창간 자금을 지원하면서 이루어졌다. 올해 ‘서울형 사회적 기업’으로 지정돼 서울시에서 운영비도 일부 지원받고 있다.

운영 시스템은 간단하다. 판매자들은 처음 10권을 공짜로 받아 지하철역 등 거리에서 3천원에 판다. 이렇게 번 돈으로 11권째부터 권당 1400원에 사다가 팔면 1600원씩 이윤이 남는다. 9월호까지 총 3호가 발행된 지금, 노숙인 20명이 판매원으로 뛰고 있다. 판매 지원자 중 ‘실제로 성실하게 판매하는’ 사원만 꼽은 수다. 창간호 당시 10명이던 것이 3개월 만에 두 배로 늘어났다.

홈리스 월드컵 출전의 배경에는 바로 이 가 있다. 지난 7월, 홈리스 월드컵 조직위원회가 ‘빅이슈코리아팀’을 공식 초정했다. 홈리스 월드컵이 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잡지가 창간되자 바로 연락이 온 것이다. 곧바로 판매원으로 나선 노숙인들을 모아 선수를 구성했다. 홈리스 월드컵의 경기 종목은 4명의 양팀 선수가 겨루는 ‘풋살’이다. 축구보다 정교한 패스, 빠른 상황 판단이 중시된다. 선수들은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서울 영등포공원에 모여 연습을 했다. 토요일에는 친선 경기도 연다. 선수가 된 노숙인들은 술을 끊고, 몸 관리를 시작했다.

노숙인 후원은 기업 이미지 망친다?

하지만 브라질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비행기 티켓을 살 돈도 없는 이들에게 홈리스 월드컵 참가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심샛별 문화사업국장은 “수많은 기업의 사회공헌 담당자에게 지원을 부탁했지만 노숙자를 지원하는 일이 기업 이미지에 미칠 영향이 정확지 않아 꺼리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홈리스 월드컵 참가의 꿈은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브라질행 티켓을 안겨준 것은 네티즌들이었다. 지난 8월 의 한 직원이 포털 사이트 다음의 게시판인 아고라에 글을 올렸다. 홈리스 올림픽 참가 비용을 위한 모금운동을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그 게시물이 인터넷 공간에 퍼 날라지면서 후원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음 아고라 모금 운동만으로 100만원, 네이버 기부 프로그램인 ‘해피빈’으로 100만원이 들어왔다. 인터넷에서 글을 봤다는 이들의 직접 기부액은 2천만원에 달한다.

비행기 티켓을 얻은 선수들은 바빠졌다. 일단 9월15일로 예정된 출국일 전에 9월호를 최대한 많이 팔고 가야 한다. ‘본업’이기 때문이다. 지난 8월 판매원들은 1인당 80만원 정도의 수입을 올렸다. 9월호는 축구팀에 소속된 판매원들이 속도를 내서인지 나온 지 3일 만에 3500부가 팔려나갔다. 판매원들은 “창간호와 2호를 사갔던 사람들이 3호가 나오자 바로 알아보고 사가더라”며 기뻐했다.

3호의 반응이 좋은 이유는 또 하나 있다. 표지 모델이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다. 디캐프리오는 전세계에서 발행하는 에 자신의 얼굴을 써도 좋다며 초상권을 기부했다. 해외 유명 스타들 중에는 이런 경우가 많지만 아직까지 한국의 스타 중에는 없다. 진무두 영업국장은 “한국에서는 노숙자를 지원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스타들도 나서지 않고 기업들도 광고를 망설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는 적자 구조이지만 기대보다 반응이 좋고 판매원이 된 노숙인들도 성실하게 일하고 있어 앞으로가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노숙인을 위한 사회적 기업은 더 있다. 경기도 안양에는 ‘그 꽃집’이란 이름의 예쁜 꽃가게가 있다. 노숙자 쉼터 ‘안양 희망 사랑방’에서 운영하는 곳이다. 인테리어부터 꽃배달까지 노숙인들이 직접 한다. 대전역 주변의 노숙인 50여 명이 모여 꽃을 키우는 (주)야베스공동체 작업장도 있다. 대전시가 노숙인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만든 드림화훼사업단 산하 사회적 기업으로, 직원들은 꽃과 분재를 키우면서 월급 80만~90만원을 받는다. 경기도 수원에는 노숙인 쉼터 ‘행복한집’이 운영하는 ‘손끝사랑’이란 사회적 기업이 있다. 노숙자 30여 명이 조립·포장 업무를 하며 사회 복귀를 준비한다.

노숙인 야학도 불 밝혀

노숙인을 위한 야학도 문을 열었다. 지난 8월 홈리스행동(homelessaction.or.kr)이 서울 서대문구 사무실에서 개강한 ‘홈리스 야학’이다. 노숙인이나 쪽방·고시원 등에서 불안정 주거 상태로 사는 이들 35명이 모여 매주 월·화·수·토요일 저녁에 공부를 한다. 인터넷으로 교사 모집 공고를 냈더니 대학생, 직장인 등이 모여들어 현재 교사 수가 31명이다. 이동현 홈리스행동 대표는 “지난 2006년에 조사해보니 노숙인의 45%가 구직 활동을 꾸준히 하는데도 절대빈곤을 탈출하지 못했다”며 “노숙인의 빈곤 문제는 열악한 사회복지 안전망, 주거 불안 등 다층적인 사회문제에서 기인하는 만큼 노숙인의 자활 의지만 북돋을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 철폐 등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렸던 홈리스 월드컵에 참가했던 그리스 선수들은 “더 가난한 나라의 홈리스를 위해 써달라”며 기금을 모아 홈리스월드컵재단에 기부했다. 기금은 선수들이 마라톤 경기에 출전해 조성했다. 홈리스들이 달리면 세상이 변한다. 그 달리기가 천천히 시작되고 있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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