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기업 계열 광고회사에 다니던 김기철(가명)씨는 지난해 말 중견기업으로 회사를 옮겼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계속되는 팀장의 폭언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나마 후배들에 비해 욕을 덜 먹는 편이었지만,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낄 정도로 폭언을 일삼았다”며 “1년 넘게 버티긴 했지만 도저히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여기에 팀장은 밤샘 근무도 당연하게 요구했다. 김씨는 “영업하느라 외근을 하고 있는데, 서류 하나 점검하라고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도 회사로 들어오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결국 못된 상사를 피해 회사를 옮기거나 다른 팀으로 간 인원이 여러 명이었다. 그런데도 올해 팀장이 승진하는 모습을 보고 김씨는 “역시 최고경영자에게만 잘 보이면 된다”며 자괴감을 토로했다.
사내 민주주의, 인권경영의 출발점김씨처럼 직장 안의 인권침해로 직원이 회사를 옮기면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는 해당 기업이다. 그동안의 교육한 것이나 업무 노하우 등을 고스란히 잃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권경영 전문가들은 기업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가 인권경영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한다. 노사관계를 비롯해 사내 민주주의가 확보돼야 더 나아가 지역사회, 제3세계에서도 인권경영을 펼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글로벌경쟁력강화포럼 안젤라 강주현 대표는 “본사 및 직영 공장의 노동자들이 가장 우선적인 인권경영의 대상이 돼야 한다”며 “아무리 거금을 들여 지역사회에 공헌해도 행복한 임직원이 없다면 기업은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직장 안의 인권경영 수준은 매우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취업포털 인크루트와 함께 직장인 943명을 상대로 ‘당신의 직장은 얼마나 민주적인가?’라는 주제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사내 민주주의에 대해 부정적 반응이 많았다. ‘비민주적’이라고 응답한 직장인이 딱 절반인 50%(다소 비민주적 28.3%, 매우 비민주적 21.7%)에 달했다. 이어 ‘보통’이 31.2%, ‘다소 민주적’(28.3%), ‘매우 민주적’(4.6%)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또 절반 가까운(46.6%) 직장인들이 폭력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언어 폭력’이 대부분(44.1%)이었지만 ‘구타 등 물리적 폭력’이 있다고 답한 직장인도 2.5%에 이르렀다. 물리적 폭력은 공기업(7.7%)과 대기업(5.1%)이 중견기업(3.6%)·중소기업(2%)에 비해 많았다.
야근·잔업 등 초과근무에 시달리는 직장인도 절반 이상(57.8%)이었다. 특히 중견기업(65.2%)과 중소기업(58.5%)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이 대기업(48.5%)과 외국계기업(44.4%)에 비해 밤늦게까지 일하고 있다는 대답이 많았다. 작은 기업의 직장인들이 더 많이 일하고도 연봉 등 대우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는 셈이다.
성차별도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직장 안에 성차별이 있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48.5%가 ‘있다’고 답했다. 특히 여성 직장인은 평균보다 많은 57.9%가 성차별을 호소했다. 최근 영국 시사주간지 산하 경제분석·정보제공기관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세계 113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여성 경제기회 지수’에서 우리나라는 직장 내 차별에서 38.3점으로 최하위권인 104위에 그쳤다.
‘사내 불만·모순 해결 부서 없다’ 88.8%
출신지·학교·종교 등에 대한 차별의 경우 ‘있다’는 응답이 41.7%로 성차별보다는 적었지만 상당한 수준이었다. 기업별로는 공기업이 61.5%로 대기업(48.5%), 중견기업(50.9%), 중소기업(39.0%), 외국계기업(37.0%) 등에 비해 높았다.
사정이 이런데도 기업 안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를 바로잡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우선 노동자의 목소리를 합법적으로 대변할 노조 가입부터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대다수인 72.1%가 ‘노조 가입이 자유롭지 않다’고 답했다. 중견기업(75.9%), 중소기업(71.8%), 대기업(71.7%), 외국계기업(70.4%) 등 기업 규모에 관계없이 비슷한 상황이었다. 상대적으로 공기업(61.5%)이 그나마 자유로웠지만, 여전히 과반수 이상이 노조 가입의 어려움을 토로한 셈이다. 그런데도 노조 대신 불만을 전달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부서는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내 불만이나 모순을 해결하는 부서가 있나’라는 질문에 88.8%가 ‘없다’고 밝혔다. 이는 직장인들의 생각이나 뜻을 자유롭게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과도 일치했다. ‘직장 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묻는 질문에 절반가량(49.7%)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또 ‘직원들의 의견이 잘 전달되느냐’는 질문에는 52.2%가 ‘거의 반영되지 않는다’고 밝혔고, ‘가끔 반영된다’는 응답이 38%였다.
결국 이같은 상황은 회사에 대한 주인의식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았다. 회사의 주인은 누구인지 묻는 질문에 ‘최고경영자’(CEO)를 꼽은 직장인이 48.7%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직원 모두’(36.6%), ‘임원’(6.2%), ‘주주’(6%) 등의 순이었다. 절반가량이 상당 시간 초과근무까지 하면서 회사를 일해 일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회사의 주인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작업환경에 대해서는 ‘불량하다’는 응답이 36.7%(다소 불량 22.1%, 매우 불량 14.6%)였으며, ‘본인이나 동료의 개인정보를 다른 목적으로 사용한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는 22.4%가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며 고용이 불안정해지면서 직장인들의 인권 상황은 점점 열악해져만 가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와 기업들은 인권 향상을 위한 대안을 마련하는 데 의지가 부족한 상태”라고 말했다. 또 “기업이 의무적으로 ‘사내 성희롱 예방 교육’처럼 인권 교육만 해도 상황은 많이 개선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엔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 주철기 사무총장 역시 “인권 존중 원칙이 회사 조직 전체로 확산돼 기업 안에 내재화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는 기업의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사내 민주주의 문제에 직장인 관심 높아”한편 직장인들의 사내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은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설문조사는 인크루트 회원인 직장인들에게 전자우편을 보내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조사를 시작한 지 나흘 만에 1천 명에 가까운 직장인이 답변을 해왔다. 인크루트 정재훈 홍보팀장은 “900명이 넘는 응답자는 평소 몇주간 설문조사를 진행해야 나오는 수치”라며 “평소 직장인들이 사내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속보] 이재명 ‘위증교사’ 무죄…법원 “통상적 요청과 다르지 않아”
이재명 ‘위증교사’ 선고 앞둔 서초동…“검찰 탄핵” vs “법정 구속”
친자 인정한 정우성…29일 청룡영화제 예정대로 참석
[단독] 김건희 초대장 700명…정권 출범부터 잠복한 문제의 ‘여사 라인’
[속보] ‘위증교사 무죄’ 이재명 “죽이는 정치보다 공존하는 정치 하자”
유승민 “일본에 사도광산 뒤통수…윤, 사과·외교장관 문책해야”
‘겨울이 한꺼번에’…수요일 수도권 첫눈 예보, 기온도 뚝
[단독] 북파공작에 납치돼 남한서 간첩활동…법원 “국가가 18억 배상”
[사설] 의혹만 더 키운 대통령 관저 ‘유령 건물’ 해명
한동훈, 동덕여대에 누워 발 뻗기 [그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