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훈의 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쥐를 생포하라는 전투 지침이 내려왔을 때, 병사들 중에서 눈치 빠른 자들은 간첩이 생포되어 입을 열면 어떠한 운명이 들이닥칠지를 정확히 예견하고 있었다. 생포된 자를 심문하면 침투 경로와 시간대별 이동 상황이 드러날 것이고, 그가 통과해나간 모든 초소의 근무자와 초소장 그리고 그 지휘계통은 대대, 연대까지도 군형법의 적용을 모면할 수 없을 것이었다.”
포위된 ‘쥐’는 결국 누가 쐈는지 모르는 여러 발의 총알을 맞고 죽는다. 군은,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하지 않는다.
전술의 실패, 항로 변경하고 공격당해
천안함 침몰 원인을 조사해온 민·군 합동조사단(합조단)은 5월20일 “북한의 연어급 잠수정이 쏜 어뢰에 피격돼 두 동강 나 침몰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공해로 우회한 130t급 북한 소형 잠수정이, 한-미 연합해상훈련이 실시되는 와중에, 아무런 징후 없이 침투한 뒤, 잠수함을 잡는 초계함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 대기하고 있다가, 천안함을 정확히 가격해 침몰시키고 도주했다는 것이 조사단의 결론이다.
조사 발표에 임박해 어뢰의 수중 폭발에 의한 물기둥으로 해석할 수 있는 “100m 높이의 백색 섬광”을 목격한 초병이 새로 등장한 석연치 않은 대목과 북한의 ‘지문’이 확실하다는 어뢰 추진체를 둘러싼 논란, 여전히 침몰 당시 정황을 알 수 있는 열상감시장비(TOD)나 천안함의 이동 경로를 알 수 있는 한국형 해군전술지휘통제체계(KNTDS)의 영상이 공개되지 않은 점 등은 잠시 접어두자. 즉, 합조단의 발표를 ‘순도 100%의 진실’이라고 전제할 때 우리는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천안함 침몰 사고는 단순히 경계망이 뚫려 무장간첩이 침투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찬찬히 복기해보자.
이명박 정부의 집권 이후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둘러싼 남북 간의 긴장은 어느 때보다 높아진 상태였다. 특히 1999년·2002년 두 차례의 연평해전과 2009년 11월 대청해전 이후, 북한은 ‘함정 대 함정’은 남쪽과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전술을 바꾼다. 북한은 지난 1월 백령도 북쪽과 오른쪽 해상을 항행금지구역으로 선포하고 해안포를 쏘기도 했다. 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서해상 긴장 고조에 대해서는 모든 군사안보 전문가의 견해가 일치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 해군도 전술을 바꾼다. 천안함의 항로 변경도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합조단의 발표대로라면, 공해로 우회한 북한 소형 잠수정의 어뢰에 당했다. 전략·전술의 실패다.
서해 백령도 해역에서 북한의 습격, 즉 비행기와 함정과 잠수함의 침투에 대비한 경계를 주요 임무로 하는 초계함인 천안함과 습격을 감행한 북한의 연어급 잠수정이 우연히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공격하는 쪽에서 피격된 함선의 항해 경로를 정확하게 파악해 대기하지 않는 경우에는 불가능에 가깝다. 소형 잠수정은 초계함보다 운항 속도가 한참 떨어지는데다 소음을 줄여 저속으로 잠행한다. 합조단의 발표대로라면 개흙이 많아 앞이 보이지 않는 바다 밑을 수십km 달려와 물 위를 보니 3km 바깥에 천안함이 서행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 때문에 지난 4월 기자가 만난 전직 해군 최고위급 인사는 서해의 지형과 잠수함의 특징 등을 들어 북한 잠수함에 의한 어뢰 피격 가능성을 낮게 봤다. 합조단의 발표 이후. 그는 서해 작전 구역 변경, 천안함의 항로 같은 민감한 정보가 북에 누출됐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했다.
경계의 실패, 잠수정 침투 아무도 몰라
게다가 합조단 발표를 보면 우리 군은 북한의 신형 잠수함에 대한 정보가 어두웠다. 크기는 유고급(110t)에 가까우면서 어뢰 장착 능력으로 보면 상어급(300t)인 ‘연어급’ 잠수함이 새로 등장했다. 그동안 인간어뢰·기뢰 등 온갖 설이 난무할 때도 단 한 번도 거론되지 않은 신무기다. 정보의 실패다.
군사위성과 감청, 인적 정보 등 한-미 연합정보자산은 북한보다 월등히 앞선 것으로 평가돼왔다. 그런데도 합조단은 연어급 잠수정의 침투를 파악하지도, 방어하지도 못했다. 초계함의 기본 임무는 적의 항공기·함정·잠수함의 침투를 경계하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 서해에는 천안함 말고도 속초함·성남함 등 다른 초계함과 고속정이 있었고, 태안반도 주변에는 미군의 순양함과 구축함 등 10척 이상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북 잠수정의 은밀한 침투를 알아내지 못했다. 경계의 실패다.
갑작스러운 공격을 당했다면 그에 대응하는 작전이라도 제대로 펼쳤어야 했다. 합조단 발표대로라면, 북한의 연어급 잠수함은 어뢰를 쏘고 침투 경로를 따라 유유히 도주했다. 우리 군의 구축함·초계함·지상레이더·대잠헬기·정찰기·초계기, 그리고 미국의 군사위성과 최첨단 무인정찰기 등은 무용지물이었다.
또 천안함이 KNTDS 영상에서 사라졌는데도 청와대·해군작전사령부·제2함대사령부 등 어느 상황실에서도 천안함 함장이 보고를 하기 전까지 이를 파악하지 못했다. 군 최고 지휘부인 김태영 국방장관과 이상의 합참의장은 천안함 침몰 뒤 1시간 가까이 지나도록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지휘통제의 실패, 작전의 실패다.
천안함 침몰 이후 생존자 구조는 해경이 했다. 침몰 지점에 부표를 제대로 설치하지 않아, 떠내려간 함미는 민간 어선이 찾았다. 민간업체가 함수와 함미를 인양했다. 침몰 원인으로 결론을 내린 북한산 21인치 중어뢰 CHT-02D의 추진 모터와 조종 장치를 건져낸 것도 민간 쌍끌이 어선이었다. 거칠게 말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군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기 대응 및 수습 과정의 실패다.
이명박 대통령의 책임은 없을까
그런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없다. 김종구 논설위원은 5월21일치 칼럼에서 “(합조단의) 발표를 보니 군은 아예 실패에 대한 개념조차 없어 보였다. 발표 내용은 쉽게 말해 ‘어떻게 당하는지도 모르게 북에 감쪽같이 당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표정에는 부끄러운 기색이 별로 엿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고 의기양양해 보이기까지 했다. (중략) 어느 나라 군대도 이처럼 부끄러운 일을 이토록 당당하게 말하는 경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썼다.
민주당 등 야당과 시민사회단체, 일부 군 전문가들은 군사재판을 열어 경계·정보·작전·지휘통제 등의 실패에 대해 군형법 위반 혐의를 따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1967년 구축함 리버티호가 이스라엘 어뢰의 공격을 받아 30여 명이 죽고 170여 명이 다치자, 군사재판을 열어 당시 지휘관들의 작전과 대응이 적절했는지 책임을 물은 바 있다.
박선원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참여정부 통일안보전략비서관)은 “합조단 발표대로라면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최악의 패배”라며 “직접 책임이 있는 천안함 함장은 물론 제2함대사령관, 합참의장, 국방장관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필요한 지원을 제때 했는지에 따라 그 범위가 넓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 연구원은 또 “상황 변화에 따라 평소 새로운 대응 전략을 수립하고 공격에 대비했어야 하는데, 적의 전략과 전투 역량을 가볍게 본 경적(輕敵)의 죄에 대해 엄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경계·정보·작전·지휘통제의 실패와 관련된 군형법 조항은 24조(직무유기)와 35조(근무태만)다. 군법무관 출신인 최강욱 변호사는 “그동안 군은 유사 사례를 방지한다는 이유로 군형법 위반 사건을 엄히 처벌해왔다”며 “군형법이 문제가 많은 법이긴 하지만, 합조단의 발표대로라면 교전을 전제로 훈련하는 상황이었던 만큼 35조 1항 ‘지휘관 또는 이에 준하는 장교로서 그 임무를 수행하면서 적과의 교전이 예측되는 경우에 전투 준비를 게을리한’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천안함 침몰을 전후한 군의 실무적인 책임을 묻는다면, 군 최고통수권자인 이명박 대통령의 책임은 없을까?
현 정부 들어 발생한 굵직한 안보 관련 이슈만 꼽아봐도 정치적 책임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대통령 측근인 장수만 국방부 차관은 ‘국방 예산 효율화’라는 이름으로 국방 예산 삭감을 밀어붙였고, 이 문제로 갈등을 빚던 이상희 전 장관이 지난해 경질됐다. 군사시설인 성남 비행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100층짜리 제2롯데월드 건설을 허가했다. 국가안보와 비행 안전 등을 이유로 15년 동안 불허됐던 사안이다. 또 ‘국방개혁 2020’에 따라 추진되던 3천t급 차기 잠수함과 차기 호위함 등 첨단 전력 도입 사업이 연기되거나 중지됐다. 해군·공군 예산은 삭감되고 다시 육군 전력 강화 쪽으로 예산이 편성됐다. 노무현 정부 때 서해를 지키던 최신형 구축함인 문무대왕함은 현재 소말리아 주변 해역에 파견돼 있다.
이 때문에 민주당 등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는 천안함이 북한 소형 잠수정에 당했다면 이명박 대통령에게 궁극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명박 정권이 안보 이슈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데는 능하면서 정작 안보에는 큰 구멍을 냈다는 것이 핵심이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5월21일 중앙선대위 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국군통수권자로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지 못하고 주력 전함을 두 동강 낸 안보 무능에 대해 국민에게 사죄해야 한다”며 내각 총사퇴와 천안함 사고 책임자의 군사재판 회부를 주장했다.
실체적 진실에 관한 논란 없이 천안함 침몰의 원인이 깨끗이 밝혀졌다면 냉정하고 엄정하게 그 책임을 물으면 될 일인데, 합조단의 발표에 이런저런 의문이 제기되면서 이명박 정부의 정치적 책임은 6·2 지방선거와 맞물린 정치 공방의 소재로 변질되고 있다.
“대북 응징은 냉정하고 신중하게”한나라당은 군의 실무적 책임은 묻겠지만 정치적 책임 논란으로 번지는 것은 차단하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김무성 원내대표는 “잠수함 공격 가능성을 소홀히 해 어뢰를 맞은 것은 군이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며 감사원의 감사 이후 문책 의지를 내비쳤다. 김 대표는 또 “명백한 북한의 소행이라고 밝혀졌는데도 북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없이 정부의 안보 무능 운운하며 문책에 대해서만 목소리를 높이는 정치권이 안타깝다”며 민주당을 에둘러 비판했다. 야권이 정권 심판론의 주요 목록에 안보 이슈를 집어넣으려는 데 반해, 한나라당은 군 책임 선에서 차단하겠다는 태도다.
안보와 직결된 문제가 또다시 ‘안보몰이’의 대상으로만 전락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앞으로 펼쳐질 한반도 정세와 관련해서도 위험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합조단의 발표를 ‘참’으로 놓고 볼 때, 가장 민감한 부분은 군사적 도발을 감행한 북에 어떻게 책임을 묻느냐이다. 국제사회가 용인하는 자위권 행사와 군사적 보복에는 적시성, 상응성 등 몇 가지 원칙이 있다. 피격 즉시 혹은 원인을 밝혀낸 이후 즉시, 그리고 피격에 의한 피해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보복하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 문제는 전면전으로 비화할 수 있는 위험성을 어떻게 통제하느냐이다. 이 부분과 관련해 전직 군 최고위급 인사의 조언은 중요한 시기에 중요한 결정을 앞둔 이 대통령이나 수많은 ‘전쟁불사론자’들이 귀기울여 들을 만하다.
“현재 우리 군은 군사적 보복과 응징을 할 능력과 수단을 확보하고 있지만 무엇이 대한민국의 국익에 부합하는지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국제 역학관계, 국력 등을 두루 살펴 냉정하고 신중한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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