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재임 중 한국 재계에 ‘물먹은’ 비화가 있다. 코피 아난 사무총장은 2005년부터 유엔 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의 출범을 적극 추진하면서 한국 재계의 대표 격인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에 협조를 요청했다. 글로벌콤팩트는 기업 경영전략을 인권·노동·환경·반부패에 관한 10대 원칙에 충실하게 수립·실천하자는 취지로 2000년에 창설한 유엔 산하기구다. 코피 아난은 전경련이 앞장서면 한국의 대기업들이 대거 동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2년간의 끈질긴 설득과 요청에도 전경련은 계속 난색을 보였다. 코피 아난의 뒤를 이은 반기문 신임 사무총장도 취임 직후인 2007년 초 글로벌콤팩트 고위 인사를 한국에 직접 파견해 전경련을 설득하는 승부수를 띄웠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결국 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는 2007년 4월 전경련의 참여 없이 출범했다.
전경련은 왜 유엔의 제의를 끝내 외면했을까? 더구나 코피 아난 사무총장은 전경련이 앞장서면 본인이 방한해 직접 행사를 주관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내놓았다고 한다. 그 해답은 바로 삼성에 있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의 무노조 경영은 글로벌콤팩트의 세 번째 원칙인 ‘노동자에 대한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 인정’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면서 “전경련이 삼성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덕분에 삼성은 글로벌콤팩트로부터 ‘한국 내 공적 1호’로 불린다.
삼성의 무노조 경영 역사는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회장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직후 발생한 제일모직 대구공장의 파업사태로 큰 충격을 받았다. 또 평생 교과서로 삼아온 일본 경제가 당시 노조의 전국적인 파업으로 휘청거리는 것을 보고 무노조 경영을 결심하게 된다. 이 회장은 1988년 눈을 감기 전에 아들인 이건희 부회장에게 무노조 경영의 유지를 남겼다. 삼성의 67개 계열사 중에서 노조가 있는 곳은 극소수다. 그들은 삼성생명·삼성증권·삼성정밀화학처럼 삼성이 다른 기업에서 인수할 때부터 이미 노조가 있었다.
삼성은 무노조 경영이라는 말 대신 ‘비노조 경영’이라는 용어를 쓴다. 또 비노조 경영은 노사 협의를 통한 자발적 선택이라고 강조한다. 삼성전자의 한 간부는 “상대적으로 양호한 임금과 복지조건 같은 물질적 보상, 노사협의회의 역할로 인해 노조 결성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 외에도 노조가 없는 국내 대기업들이 있다. 신세계·씨제이제일제당·한솔제지·LG상사 등이 대표적이다. 신세계·씨제이·한솔 등이 모두 삼성에서 분리 독립한 것을 감안하면 한국 재계의 무노조 경영은 범삼성그룹이 주도하고 있다.
전경련 관계자는 “글로벌 기업 중에서 월마트·뱅크오브아메리카·휼렛패커드 등은 노조가 없다”면서 “국내의 무노조 기업들을 후진기업으로 보는 일부 시각이 아쉽다”고 말했다. 전경련의 설명에서 이미 눈치를 챈 독자도 있겠지만, 글로벌 무노조 기업의 대다수는 미국계다. 김기원 한국방송통신대 교수(경제학)는 “미국은 노조 설립 조건이 까다롭고 회사 개입도 허용되는 등 제도적 문제 때문에 무노조 기업도 많은 편”이라면서 “미국의 노조 관련 제도는 오바마 정부도 개선책을 추진할 정도로 문제가 많아, 바람직한 노사관계를 기준으로 볼 때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현대자본주의 초기만 해도 대다수 선진국의 자본가나 경영자들의 인식은 노조에 부정적이었지만, 미국은 유달리 더 강했던 것 같다. 19세기 말 미국 경제를 쥐락펴락한 석유왕 록펠러는 노동자의 급여를 다른 기업보다 10%, 심지어 20% 더 높여주더라도, 노조를 결성하거나 집단행동을 하는 일은 추호도 용인할 생각이 없었다.
지식경제·정보화 시대에 역행
삼성이나 재계가 미국 사례를 들어 무노조 경영을 변호하는 것에는 반론이 많다.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사회학)는 “노조가 없는 외국 기업의 경우 노동자의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이라면서 “하지만 삼성은 회사가 물리적 강제력과 공권력의 도움으로 노동자의 노조 설립을 무산시킨 것이기 때문에 전혀 성격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삼성은 그동안 노조 설립을 둘러싼 방해·회유·납치·감금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삼성SDI가 대표적이다. 1997년부터 2004년 사이에 수원과 부산 사업장에서 최소한 여섯 차례 이상 노조 결성 시도가 무산됐다. 지난 2004년 휴대전화를 이용한 불법 위치추적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삼성의 무노조 경영은 한국 재계에서도 유별난 편이다. 한국 대기업 중에서 대립적 노사관계의 대표적 사례로는 현대차가 꼽힌다. 현대차 경영진은 지난해 노동관계법 개정 때 노조의 힘을 약화하기 위해 경총 탈퇴까지 불사하며 노조 전임자에 대한 임금 지급 금지 관철에 총력전을 폈다. 하지만 현대차 경영진이 노골적으로 무노조 경영을 추진한 적은 없다. LG전자는 오히려 1980년대 말 두 차례의 대규모 노사분규를 겪은 뒤 노사관계의 패러다임을 갈등에서 협력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했다.
삼성은 다른 회사보다 높은 임금과 사원복지, 그리고 뛰어난 경영실적을 무노조 경영의 성과로 내세운다. 삼성의 한 임원은 “삼성의 성공 요인으로 여러 가지를 들지만, 그중에서도 노조가 없기 때문에 의사결정이 빠르고 신속한 정책 실행이 가능한 것도 크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돈문 교수는 “국내외에는 노조가 있으면서도 좋은 실적을 내는 기업이 많다”면서 “유럽의 세계적 기업들은 삼성보다 임금을 많이 주면서도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통한 노사협력을 바탕으로 좋은 실적을 거두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의 무노조 경영은 국내외적으로 동시에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다. 노동법 개정으로 내년 7월부터 복수노조가 허용되면 무노조 경영도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김기원 교수는 “복수노조 허용 이후 삼성이 계열사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하겠지만, 결국 무노조 경영은 지속 불가능하다”고 내다봤다. 해외에서는 이미 무노조 경영에 균열이 시작됐다. 삼성의 중국 법인들은 2007년 중국 정부의 압박에 밀려 노조 설립을 허용했다. 전문가들은 노동자에 대한 권리보장은 글로벌 스탠더드이기 때문에 수출과 해외 생산으로 먹고사는 삼성으로서는 무노조 경영을 계속 고수하는 게 더욱 힘들다고 말한다. 무노조 경영으로 중국 사회에서 큰 비판을 받았던 월마트의 변신은 타산지석이다. 월마트는 2006년 중국의 노동기준을 받아들여 노조 설립을 허용한 뒤 중국 내 납품업체들에까지 노동기준과 환경기준의 준수를 요구했다. 이를 두고 중국 언론은 월마트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보안관 노릇을 한다고 대서특필했다. 주철기 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 사무총장은 “글로벌 시대에는 제품의 품질과 가격, 기술이 뛰어난 것만으로 경쟁력을 유지하기 힘들다”면서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잡은 사회책임경영의 흐름을 거부하는 기업은 앞으로 점점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해다.
저숙련 노동자의 단순가공으로 부가가치가 낮은 제품을 생산하던 경제발전 단계에서는 억압적 노사관계를 통한 무노조 경영이 기업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21세기 지식경제·정보화 시대에는 종업원들의 자발성과 창의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경쟁력을 높일 수 없다. 무노조 경영으로 인해 삼성이 치르는 유·무형의 비용도 엄청나다. 2005년 5월 이건희 삼성 회장이 고려대로부터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 고려대생들이 계란 세례를 퍼부으며 내건 반대 이유는 무노조 경영이었다.
경직된 지배구조도 원인전문가들은 삼성이 다른 기업보다 조직관리 능력이 뛰어나고 합리주의를 강조하면서도 무노조 경영을 고수하는 것을 경직적인 지배구조와 연관짓기도 한다. 삼성은 2007년 말 김용철 전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의 양심선언 이후 특검 수사와 재판을 거치며 이건희 회장의 경영 퇴진과 전략기획실의 해체를 포함한 경영 쇄신을 약속했다. 하지만 지난 3월24일 이 회장의 경영 복귀와 함께 전략기획실의 복원까지 추진하면서, ‘과거로의 회귀’라는 비판을 받았다. SK가 2003년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으로 최대 위기를 맞았지만 이후 적극적인 지배구조 개선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지혜를 발휘한 것과 대비된다. 김기원 교수는 “삼성이 뛰어난 관리능력과 경영실적에 걸맞게 노사관계에서도 다른 기업의 모범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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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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