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20대 학생들은 말한다. “학생일 때가 속 편하고 좋았다”는 이야기는 옛말이라고. 1등만 기억하는 무자비한 사회에서는 ‘함께’보다는 ‘혼자’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친다. 무한경쟁 사회로 내몰린 이들은 혼자 도서관에 가서 문제집을 풀고 혼자 밥을 먹는 것이 편하다.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건 20대에겐 사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적 잃은 현실을 낯설게 바라보는 젊은이들이 여전히 있다. 그들은 2010년 ‘불행의 대학 지도’ 속에 또 다른 풍경을 그려넣고 있다.
밭에서 키운 배추로 김장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양승렬(28·4년)씨는 캠퍼스에서 논밭을 가꾼다. 그는 에코놀이단 ‘반딧불이’ 회원이다. 2005년 환경문제를 고민하면서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친구들이 모였다. 당시 10평으로 시작한 학교 텃밭은 이제 30평이 되었다. 텃밭은 정보과학관 옆, 무성한 나무 사이에 있다. ‘반딧불이’ 회원들은 학교에 삽을 들고 다닌다. 손톱에 흙 때가 낀다. 신발에 흙을 묻힌 채 강의실로 향한다. 점심 도시락 모임에서는 직접 재배한 상추를 반찬 삼는다.
지난해 11월 ‘희망의 김장 나눔 축제’도 열었다. 회원들이 학교 텃밭에서 직접 가꾼 유기농 배추 120여 포기와 무·쪽파를 주재료로 김치를 담갔다. 김치는 영등포 쪽방촌에 사는 독거노인 35가구에 전달됐다. 이 모임에는 회장·대표 등이 따로 없다. 성공회대 학내 소모임 대부분이 그렇다. 누구는 이끌고 누구는 이끌림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한다’는 의미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점심때가 되면 사회과학부 ‘순대’(24·4년·그는 실명보다 별칭인 ‘순대’로 통한다)씨는 바빠진다. ‘동그라미 밥집’이 문을 여는 시간이다. ‘동그라미 밥집’이란 노동과 재료가 순환한다는 의미다. 메뉴는 ‘단추카레’다. 이름은 라는 동화에서 땄다. 어떤 사람이 단추만으로 수프를 만들 수 있다고 나선다. 솥에 단추를 넣고 끓인다. 마을 사람들이 감자가 있으면 더 맛있겠다고 한다. 한 명씩 감자, 고기 등을 가져와 솥에 넣는다. 사람들은 “단추로 어떻게 이런 맛을 내느냐!”고 감탄하며 수프를 다 같이 먹는다. 동화처럼 학생들은 십시일반 재료를 가져온다. 순대씨는 카레를 만든다.
밥집은 수요일 점심시간 중앙도서관 앞에서 문을 연다. 단추카레의 가격은 단돈 1천원. 단골이 많다. 카레에 고기는 넣지 않는다. 채식주의자 학생에게도 인기가 좋다. 사람들은 자신이 먹고 싶은 만큼 퍼서 먹는다. 함께 카레를 만들면 아예 공짜다. 설거지는 밥 먹은 사람이 직접 한다. 카레는 물로도 잘 씻겨나간다. 세제를 쓰지 않는다.
이런 일을 벌이는 학생들의 공통점이 있다. ‘개인’이 아니라 ‘우리’에 주목하는 것이다. “대학생들이 혼자 ‘스펙 쌓기’에 열중하면 승자독식 게임에서 결국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어요. 그 게임은 재미있지도 않고 불안만 부추기죠.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아요.” 연세대 문화학협동과정 석사과정생인 박은진씨는 ‘마을에서 만나는 희망’ 프로젝트를 맡고 있다. 연세대 젠더연구소에서 기획된 것으로 올해 처음 시작됐다.
자치언론, 학교신문에서 다루지 않는 것‘마을에서 만나는 희망’은 함께 여행 준비를 할 친구를 모으는 것에서 시작한다. 서로 뜻을 모은 개개인은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그리고 마을에서 ‘느린 삶’ ‘자연친화적 삶’ 등 삶의 대안을 만나는 여행을 함께한다. 어디를 방문할지, 무엇을 할지, 며칠 묵을지 함께 이야기한다. 모든 것은 함께 기획하는 이들의 자유로운 상상에 달려 있다. 박씨는 이 프로젝트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함께 여행을 기획하면서 대안을 스스로 찾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박씨는 말했다.
대학 ‘자치언론’의 새로운 움직임도 있다. 기왕의 대학언론이 있지만, 자본으로부터 독립돼 있지 않다. 발간 비용을 학교에서 지원받기 때문이다. 학내 언론매체부 소속이던 중앙대 교지 는 재단과 학교본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지원액을 모두 삭감당했다. 반면 학교의 지원을 받지 않는 자치언론은 대학 안팎의 사안을 자유롭게 고발할 수 있다. 앞선 10개 대학 공동 설문조사에서 학생들은 가장 신뢰하는 학내 언론기관으로 학보사(16.2%)와 대등하게 자치언론(15.5%)을 꼽았다. 학내 언론기관이 알려주지 못하는 또 다른 진실을 자치언론이 다룰 수 있다는 기대다.
서울대 (Queer Fly)는 동성애 자치언론이다. 2006년 창간해 한 학기에 한 권씩 발행하고 있다. 발행 부수는 후원금에 따라 달라지지만 대체로 2천 권 정도다. ‘큐이즈’(Q.I.S)라는 학내 성소수자 단체가 만들었다. 고정 독자가 꾸준하다. 매체 특성상 광고가 힘들기 때문에 100% 자치언론기금만으로 운영된다. 현재 서울대 학생회비의 10%가 자치언론기금으로 배정돼 있다. 이를 학내 자치언론들이 분배해서 사용한다.
연세대 자치언론 신문인 은 지난 2008년 2학기 잠시 휴간했다가 이듬해 1학기에 다시 발행됐다. 인력난이 컸다. 학교에서 지원금을 받지 않기 때문에 자치언론 매체를 발행하는 기획사인 ‘캠퍼스라이프’와 계약을 맺어 신문을 내고 있다. 모토는 ‘당신의 생각이 여론이 되는 곳’이다. 학교신문사에서 다룰 수 없는 것, 누군가는 말해줘야 하는 것을 담는다.
학생들 처지에 맞는 패션지를 내는 곳도 있다. 기성 패션지는 어려운 패션 용어가 난무한다. 대학생을 위한 실용적 정보도 없다. 그저 값비싼 명품 소개로 가득하다. 2008년 대안적인 문화매체의 필요성을 느낀 대학생 몇몇이 모여 대학연합 패션지 를 만들었다. 처음엔 고려대 학생들이 주도했지만, 지금은 여러 대학의 학생들로 구성돼 있다. 광고 수주와 여러 단체의 협찬 및 지원금으로 발행 자금을 조달한다. 영리가 목적이 아니라, 패션에 관한 순수한 열정을 담아 대학생 독자와 소통한다.
여대 하면 ‘명품’ ‘된장녀’부터 생각한다. 숙명여대 학생들이 만드는 잡지 (SOOM)은 그런 편견을 깨고 싶었다. 패션·뷰티에 대한 주제를 시중 잡지와는 다르게 잡았다. ‘숙명인’에게 포커스를 맞춰 그들이 자주 쓰는 화장품을 소개한다. 기획자도, 모델도 재학생이다. 한 회당 1천 부를 발행한다. 발행비는 학교 주변 상가들의 광고로 메운다. 부족분은 학교 문화복지지원금으로 충당하지만, 필요한 돈보다는 항상 모자란다.
‘대안 대학평가’도 시동을 걸고 있다. 연세대 학생들은 스스로 평가 기준을 마련하고 그를 토대로 자신이 바라는 ‘대학상’을 수렴해 올 상반기 학교쪽에 전달할 계획이다. 취지는 분명하다. 신희식(문과대 학생회장·사학 3년)씨는 “기존의 대학 평가는 취업률이나 산업경쟁력 등을 앞세우며, 대학인의 삶의 질을 말해주진 않는다”며 “오히려 대학 서열화와 학교 간 경쟁을 부추기거나 등록금 인상의 명분을 주기도 한다”고 말한다.
전국학생행진 소속 중앙대 학생들도 ‘우리가 다니는 대학교는 우리가 평가한다’는 모토를 내걸고 “어떤 대학이 좋은 대학인가”를 묻는다. 대안 대학평가는 ‘대학의 기업화’로 지칭되는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변화에 맞선다. 이들은 최근 5년간 물가 인상률과 비교해 등록금 인상률을 따져묻고, 기초학문에 대한 재정지원 비율을 파악하고, 학생회·동아리 활동 등을 충분히 보장·지원하는지 검토한다. 총학생회와 함께 대안 대학평가 포럼도 개최한다. 대학의 기업화와 관련한 대안을 모색하고 대중적 논의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그러나 열린 공동체를 향한 학생들의 노력은 번번이 시험대에 오른다. 연세대 학생서점 ‘슬기샘’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말 이후 슬기샘은 교보문고 연세점으로 대체될 위기에 처했다. “더 질 높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됐다”며 교보문고의 입점을 반기는 학생들이 있었다. 반면 생활협동조합(생협)이 운영하는 학생서점을 섣불리 문 닫게 할 수 없다는 반발도 있었다.
생협이냐 서비스 좋은 민간기업이냐학내 논의 끝에 연세대 총학생회는 지난 1월 이 문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기로 결정했다. 교보문고 입점은 보류됐고, 책장을 비우던 슬기샘은 다시 책장을 채우게 됐다. 생협의 수익은 학생 복지를 향상시키는 데 사용된다. 반면 민간 기업이 들어오면 그 수익의 대부분은 기업 몫이 된다. 연세대 학생들은 그 갈림길에서 이 문제를 다시 돌아보는 시간을 벌었다. 연세대 총학생회 생협국장 정준영(24·사회학 4년)씨는 “서비스 만족도를 높이는 것이 최우선의 가치가 된다면 학교 내에 교보문고와 같은 외부 업체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며 “그렇게 되면 대학 생협의 존재도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생협의 가치를 지켜낼 수 있을까. 논의가 마무리되는 오는 6월 말, 학생회관 한쪽에 자리한 학생서점의 주인은 학생이 될 수 있을까.
권소영 기획취재부장·김수인 편집국장·김태성 편집국장·백진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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