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늘 삼성 회장직에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할 일도 많아 아쉬움이 크지만 지난날의 허물은 모두 제가 떠안고 가겠습니다. (중략) 국민 여러분께 간곡히 호소합니다. 오늘날의 삼성이 있기까지는 무엇보다 국민 여러분과 사회의 도움이 컸습니다. 앞으로 더 아끼고 도와주셔서 삼성을 세계 일류기업으로 키워주시기 바랍니다.”
이건희 회장은 2008년 4월22일 이 말을 남기고 삼성을 떠났다. 이날 삼성은 10개항의 경영쇄신안을 발표했다. 삼성 특검이 수사 결과를 발표한 지 5일 뒤였다.
경영쇄신안 중 맨 앞 3개 항목은 총수 일가 퇴진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이건희 회장과 홍라희 리움미술관장이 퇴진하고, 이재용 전무는 사임한 뒤 해외시장 개척 관련 업무를 맡는다는 것이었다. 그다음 두 항목은 전략기획실을 해체하고 이 회장의 핵심 측근인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이 퇴진한다는 것이었다.
이 쇄신안에 따라, 이건희 회장은 2009년 4월 삼성전자 대표이사 회장 및 등기이사에서 물러났다. 홍라희 관장은 앞서 2008년 4월 사임했다. 이재용 전무는 2008년 5월 최고고객책임자(CCO) 자리를 내놓고 해외를 돌며 ‘경영 수업’을 받아왔다.
삼성은 경영쇄신안 1년을 맞은 지난해 4월 쇄신안 10개 항목 중 대부분은 이행됐다고 밝혔다. 2008년 6월 말까지 전략기획실 임직원들의 계열사 배치를 완료했고, 같은 해 7월 이학수 부회장이 삼성전자 등기이사에서 사임했다고 밝혔다. 삼성은 이 회장의 차명 재산을 실명 전환했으며 대법원 판결 뒤 관련 세금과 벌금이 확정되면 잔여분을 유익한 일에 사용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삼성은 경영쇄신안 가운데 차명계좌 자금을 사회의 유익한 일에 쓰겠다고 한 것과 그룹 지배구조 개선을 빼고는 대부분 이행된 상태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 복귀로 약속은 모두 물거품이 됐다. 지난해 12월 이미 이재용 전무가 부사장으로 승진했고, 이번에는 이 회장이 복귀했다. 앞으로도 약속 파기는 계속될 것 같다. 이 회장의 복귀와 함께 전략기획실도 부활할 것으로 보인다. 이학수 고문 등 전략기획실 출신 인사들의 대거 복귀를 통한 ‘구체제 회귀’로 이어질 가능성도 높다. 홍라희 관장 복귀도 점쳐지고 있다.
홍라희 관장 복귀설도 솔솔
나머지 약속들은 어떻게 됐을까? 삼성생명과 삼성증권 등 금융 계열사의 투명성을 높이겠다는 약속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퇴진하겠다던 배호원 전 삼성증권 사장은 삼성정밀 사장으로 갔고, 황태선 전 삼성화재 사장은 거액의 스톡옵션을 받았다. 직무상 연관이 있는 인사를 사외이사로 선임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흐지부지됐다. 삼성은 3월19일 이인호 전 신한금융지주 사장을 삼성전자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신한금융은 김용철 변호사 이름의 차명계좌를 삼성에 불법적으로 개설해준 신한금융투자를 자회사로 두고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이 회장 복귀 선언 뒤 곧바로 논평을 내고 “삼성이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것만 강조하고, 2년 전 스스로 약속했던 경영쇄신안을 제대로 지켰는지에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다. 결국 경영쇄신안은 형사재판에서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한 ‘대국민 사기극’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꼬집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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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3일 한겨레 그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