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월16일 새벽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이 한강을 넘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당시 국영방송이던 한국방송이었다. 박정희 소장의 지시를 받은 군인들은 새벽에 혼자 근무를 서고 있던 박종세 아나운서를 위협해 군사 쿠데타가 성공했음을 알리는 라디오 방송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49년이 지난 2010년, 이번엔 이명박 정부의 숨이 가쁘다. 한 치의 쉴 틈도 없이 ‘방송사 접수’의 길을 달려온 탓이다. 탱크와 군홧발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검찰과 경찰, 감사원, 방송통신위원회 등 국가기관의 일사불란한 뜀박질 소리가 들린다.
취임 2년여 만에 YTN과 한국방송을 손아귀에 넣은 정부는 이제 문화방송 접수를 코앞에 두고 있다, 고 그들은 생각할 것이다. 지난 2월8일 강제로 물러나다시피 한 엄기영 사장의 후임에 정권 친화형 인물을 앉히면 된다. 반면 문화방송 노동조합은 2월18일 조합원들에게서 ‘총파업 동의서’를 받아놓고 집행할 날짜만 기다리고 있다. 정권과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노조의 의지는 결연하다. 2월18일 서울 여의도 문화방송 로비에서 농성 중이던 이근행 문화방송 노조위원장은 을 만나 “총파업으로 이어지는 수순은 피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방송사 접수, 일사불란한 뜀박질 소리앞선 두 방송사의 폭력적인 접수 과정을 봐놓고도 그들은 왜 정권에 저항하려고 할까? 진실을 왜곡하고 국민을 속이던 과거의 방송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문화방송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를 1992년 이전과 그 뒤로 구분한다. 그해 문화방송 노조는 9월2일부터 50일 동안 온갖 방송 파행에도 불구하고 ‘정권의 손에서, 국민의 품으로’란 구호를 내걸고 공정 보도와 제작 자율성 확보를 위해 싸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문화방송을 비롯한 공영방송사들은 온갖 사실 왜곡을 서슴지 않았고, 이를 견제하려는 노조는 일상적으로 무시됐다. 당시 총파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한 PD는 과의 통화에서 “파업을 앞뒤로 문화방송이 권력에 굴종하지 않는 불퇴전의 정신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엄기영 사장이 떠난 자리에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가 지명하는 새 사장이 안착하는 순간 문화방송은 20여 년 전의 기억을 데자뷔하게 될 것이다. 그 순간 이명박 정부의 ‘방송사 접수’는 마침표를 찍게 된다. 문화방송의 ‘불퇴전의 정신’은 정권을 향한 굴종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멀리 볼 필요 없다. 한국방송을 보면 된다. 이병순 사장에 이어 이명박 대통령 후보 특보 출신의 김인규 사장이 지배하고 있는 한국방송에서 정권 비판적인 보도를 본 지 오래다. 국가적 재원 낭비와 환경 파괴 우려를 사는 4대강 사업과 국토 균형발전의 원칙을 저버린 세종시 수정안 문제도 가끔 ‘논란’으로 다뤄질 뿐,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파헤치는 보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비판 보도 대신 ‘정권의 얼굴들’이 텔레비전 화면을 채우고 있다.
최근 한국방송 노조는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이 지난해 11월21일 에 출연한 데 이어 1월31일에는 에 나와 노래를 부르는 등 70여 일 동안 무려 네 차례나 한국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사실을 밝히며 이를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노조는 성명에서 “(한국방송) 내·외부에서는 한국방송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방선거기획위원장을 맡은 정 의원에 대해 홍보와 미화를 시도하며 한나라당의 지방선거를 돕고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방송 노조(위원장 강동구)는 최근 만들어진 전국언론노조 한국방송본부(본부장 엄경철)와 달리 회사 친화형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노조라는 점에서, 이들이 제기한 사태의 심각성은 도드라진다. 정 의원은 지난해 10월3일 에도 출연한 바 있다. 지난 2008년 7월 “한국방송 사장은 정부 산하기관장으로서 새 정부의 국정철학과 기조를 적극적으로 구현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던 박재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의 말은 이렇게 현실이 돼가고 있다.
어떻게 순치되는지 그 과정도 한국방송이 잘 보여준다. 징계와 해고라는 강력한 수단이 동원된다. 김현석 전 기자협회장은 파면 뒤 정직으로 징계를 낮춰 춘천총국으로 보내버렸고, 그 뒤 바통을 이어받은 민필규 전 협회장도 경고 징계를 했다. 최근엔 김인규 사장이 5공 시절 민정당을 찬양하는 보도를 한 내용을 모아 공개했다는 이유로 김진우 기자협회장에게 감봉 2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성실 의무 위반’과 ‘콘텐츠 유출’이라는 이유에서다. 전국언론노조 한국방송본부는 2월16일 성명을 내어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KBS에서는 3대에 걸친 기자협회장과 2대에 걸친 PD협회장(양승동·김덕재)이 모두 관제 사장과 특보 사장으로부터 징계당하는 기록이 세워졌다”고 비난했다.
이처럼 비판적 기자와 PD들을 징계·해고하는 건 박정희 군사정권 초반부터 시작해 1975년 기자 대량 해직 사태를 거쳐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집권 때도 계속돼온 행태지만, 이 정부 들어서는 다소 다른 특징을 보인다. 해당 방송사 사장들을 우선 못살게 굴어 쫓아내거나 해임한 뒤 관제 사장을 들어앉히는 과정이 앞선다. 각 방송사 이사회가 총대를 메는 것도 똑같다. YTN 이사회와 한국방송 이사회에 이어 이번엔 문화방송의 방문진이 그 구실을 하고 있다. 방문진은 2월20일까지 문화방송의 새 사장 공모를 마치고 26일 최종 내정한 뒤 그날 주주총회에서 선임 절차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문화방송 내부에서도 새 사장이 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다. 〈PD수첩〉팀의 한 PD는 “새로 오는 사장이 강성 PD 등을 다른 국실로 전출 보내는 등 인사를 통해 순치를 시도할 것”이라며 “(신임) 윤혁 제작본부장도 〈PD수첩〉을 제어하기 위해 온 사람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엄기영 전 사장의 반대에도 방문진이 임명을 강행한 윤 본부장과 황희만 보도본부장은 아직까지 노조의 출근 저지에 막혀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엄 전 사장의 잔여 임기 1년을 채울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들은 주로 이 대통령과 같은 고려대 출신이거나 한나라당 성향이다. 대구문화방송 사장을 지낸 김종오 경인TV 상임고문과 구영회 문화방송 미술센터 사장은 고려대 출신이고, 김재철 청주문화방송 사장도 이 대통령과 친밀한 관계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사장 직무대행을 맡고 있는 김종국 문화방송 기획조정실장도 후보로 거론된다. 그는 2월10일 사원들에게 보낸 글에서 “사원들은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의견을 표시하겠다는 원칙을 지키기 바란다”며 “누구라도 이 원칙을 어긴다면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고, 책임을 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총파업에 대한 경고다.
문화방송 노조는 누가 사장으로 선임되더라도, 현재의 방문진이 선임하는 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다. 어차피 ‘낙하산 사장’이라는 것이다. 이근행 위원장은 “지금처럼 방문진이 문화방송의 목줄을 쥐고 칼날을 들이대는 상황에서는 어떤 사람이 사장으로 온다고 해도 공정방송을 지키고 비판 기능을 유지하지 못한다”며 “인물론은 무의미하다”고 못박았다. 그는 “1992년의 투쟁이 공정방송 사수라는 내부의 문제였다면 지금은 권력에 맞선 언론 독립의 문제라는 측면에서 훨씬 상황이 심각하다”고 말했다.
방문진의 후임 사장 선임을 앞두고 문화방송 내부는 긴장감이 높아지는 가운데 노조를 중심으로 한 정권과의 싸움이 불가피하다는 ‘주전론’이 대세를 이뤄가고 있다. 입사 10년 안팎의 한 기자는 “우리가 케이오당하거나 수건을 던질 수는 없고 끝까지 링에서 버텨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보도국의 분위기를 전했다.
높은 투표율, 다소 낮은 찬성률동시에 이번 싸움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위기감도 감지된다. 이명박 정부가 YTN과 한국방송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완력’이 워낙 거센 탓이다.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과 노종면 전 YTN 노조위원장 해임 사건처럼, 나중에 법원에 가서 패소하건 말건 밑도 끝도 없이 불도저처럼 일단 밀어붙이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생긴 ‘학습효과’다. 문화방송 노조가 2월17일 완료한 총파업 찬반 투표에서 96.7%(조합원 1911명 가운데 1847명 투표)라는 높은 투표율과 함께 기대보다 다소 낮은 75.9%(1402명 찬성)의 찬성률이 나온 것도 이런 복잡한 상황 인식이 투영된 결과로 보인다.
외부 여건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문화방송 노조의 총파업에 동참할 수 있는 외부 세력이 그다지 많지 않다. 1992년 총파업 때는 한국방송 노조가 부분적이나마 연대 파업에 동참하는 한편 시민의 성원이 쏟아졌으나 이번엔 다소 불확실하다. 지난해 벌어진 미디어법 반대 투쟁은 문화방송 하나가 아니라 다른 방송사는 물론 신문 쪽까지 연계된 주제인데다 국회를 상대로 벌인 것이어서 큰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김유진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일단은 MBC 내부 구성원들이 먼저 싸우는 길밖에 없다”며 “그럴 때 시민사회단체와 국민이 힘을 실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쨌건 문화방송 노조로서도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많지 않다. 한 시사교양국 PD는 “우리가 타협할 수 있는 부분이 그려지지 않는 싸움이라 두렵다”고 했다. 당장 2월26일 새 사장이 선임되면 노조는 이튿날부터 출근 저지에 나설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사장의 출근을 위해 경찰력이 투입되는 수순 속에서 노조는 총파업을 선언하고, ‘정권의 힘 대 문화방송+시민사회의 힘’이 맞부닥칠 공산이 크다. ‘불법 파업’ 논란 속에서 노조 집행부를 비롯한 조합원들의 대량 검거 사태도 충분히 예견된다. 문화방송 안팎에서 “어느 정도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말이 계속 흘러나오는 까닭이다.
‘문화방송 장악’에 성공하면 이명박 정부는 우리나라의 모든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안테나를 청와대를 향해 돌려세워놓는 효과를 볼 것이다. 그러나 높은 기대이익에는 많은 위험이 따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새 사장이 이른 시일 안에 정상적인 출근에 성공하고 후임 인사를 통해 조직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로 6월 지방선거를 맞게 되는 경우 한나라당은 역풍을 맞을 수 있다. 문화방송 민영화도 물건너가고, 극우신문들이 진출을 노리고 있는 종합편성채널 사업자 선정도 늦어지고, 한국방송 수신료 인상을 통해 7천∼8천억원 가량의 광고 재원을 종편채널에 몰아주려는 계획에도 차질이 불가피하다.
1992년 총파업 투쟁이 끝난 뒤 안성일 전 문화방송 노조위원장은 이런 말을 남겼다. “방송이란 직업은 우리가 창조한 게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다. 그것은 많은 불특정 다수의 권리를 위임받은 것이며 공공의 재산을 위탁관리하는 것이며 시간을 다루는 것이며 약속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방송은 약속에 의해 존재하는 것”문화방송은 18년 만에 이 말이 진심인지 입증하기를 요구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 라디오 PD는 “싸움을 건 쪽은 MBC를 접수하는 과정의 파열음이 별것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쪽이 견적을 잘못 뽑았다는 사실을 입증할 책임이 노조와 시민사회에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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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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