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문제는 고용이야.”
1992년 미국 대선에서 빌 클린턴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란 슬로건에 빗대 ‘문제는 고용’이라고 외치는 경제전문가들이 최근 급속히 늘고 있다. 이명박 정부도 사상 최초로 1월부터 청와대 주재로 ‘국가고용전략회의’를 개최하는 등 ‘일자리 정부’를 표방하고 나섰다. 어느 정부든지 경제정책의 성과는 결국 ‘일자리’로 집약된다. 고용은 곧 ‘소득’을 의미하고, 경제활동의 목적은 벌어들인 소득으로 ‘더 많이 소비’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국내총생산(GDP)이 성장하고 대규모 원전을 수주하고 주요 20개국(G20) 회의 개최국이 되어 국격이 높아졌다 한들 국민한테 충분하고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경제에 관한 한 실패한 정부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가 지난 2년간 펴온 각종 경제정책들은 상당수가 고용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은 ‘고용’을 MB 정부 2년 경제정책의 성과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로 설정하고, ‘고용성적표’를 중심으로 MB 정부 2년과 남은 3년의 경제 분야를 짚어본다.
출범 당시 이명박 정부는 ‘MB노믹스’의 핵심 목표로 ‘집권 기간에 연평균 7% 성장, 임기 내 300만 개 일자리 창출’을 내걸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 성과는 매우 초라하다. 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 1월만 단순 비교하면 지난 2년 동안 일자리(취업자 수)는 9만9천 개가 오히려 줄었다. 연간 평균 취업자로 따져보면, 2년간 취업자 증가는 7만3천 명(2008년 14만5천 명 증가, 2009년 7만2천 명 감소)에 그쳤다. 반면 참여정부 시절에는 연평균 25만 개가량 취업자가 늘었다. 청년층(15∼29살) 고용률은 2004년에 정점(45.1%)을 찍은 뒤 2009년(1∼8월) 40.7%로 외환위기 직후 수준(40.6%)까지 떨어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한국보다 청년고용률이 낮은 곳은 헝가리뿐이다.
실업 지표 역시 처참하다. 지난 1월 실업자는 121만6천 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6만8천 명이나 증가해 2000년 2월(122만3천 명) 이후 10년 만에 최악으로 빠져들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올해 신년사에서 “시장에서 정책에 대한 신뢰가 생겨나고 그러한 신뢰 위에서 우리 경제의 빠른 회복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처참한 고용성적표가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정책에 대한 신뢰는 무너지고, ‘빠른 경제 회복’도 이제 더 이상 자랑거리로 내세우기 어려운 처지가 되고 말았다.
사실 MB 정부는 출범 때부터 따로 ‘고용 전략’이라고 부를 만한 정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대통령부터 경제 당국 수장들 모두 “경제가 성장하면 일자리가 만들어진다”는 시장주의 경제원론 교과서의 가르침을 그대로 신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이제야 깨달은 것일까? 지난 1월21일 경제 관계부처 합동으로 내놓은 ‘1차 국가고용전략회의’ 발표문은 “이제는 경제가 성장하면 고용이 저절로 생겨난다는 시각에서 벗어나 고용을 수반하는 성장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사실 일자리 문제는 지난 2년간 G20 회의 개최나 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주 환호 뒤에 가려져 곪아 있었을 뿐이다.
이제 ‘일자리 300만 개’ 공약은 국가고용전략회의에서조차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대신 국가고용전략회의는 일자리 수 대신 ‘고용률’을 경제정책의 새로운 핵심 지표로 삼고 장·단기 목표를 설정해 관리하겠다고 밝혔다. ‘15살 이상 인구 대비 취업자 수’를 나타내는 고용률은 2008년 59.5%에서 2009년 58.6%로 떨어졌다. 고용률 1%포인트 하락은 대략 일자리가 40만 개 정도 줄었다는 뜻이다. MB 정부가 새롭게 천명한 목표는 고용률을 ‘향후 10년 안에 60%’로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이제 ‘임기 내’ 몇% 성장이니 일자리 몇 개니 하는 식의 슬로건은 찾아보기 어렵다. MB노믹스의 실패를 자인한 것일까? 김병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새사연) 부원장은 “지난해 한국을 포함해 글로벌 경제의 키워드가 금융이었다면 올해는 고용이 될 공산이 크다”며 “이 대통령도 1∼2년 안에 고용이 좋아질 것이라고 말하는 건 정치적 구호에 불과하다고 시인했다”고 말했다.
MB 정부 경제팀은 지금, 대통령 후보 시절 그리고 집권 초반기에 정치적 의도 속에서 잔뜩 부풀려 내세웠던 일자리 공약을 슬그머니 거둬들이고 있는 중이다. 국민의 기대 수준을 현실에 맞게 점차 떨어뜨리는 쪽으로 정책목표를 재설정하는 것이다. 실제로 국가고용전략회의는 2010년 단기 고용목표로 △2010년 취업자 증가 규모 ‘25만 명 플러스알파’ △고용률 58.7%로 설정했다. 고용률을 고작 0.1%포인트 높이겠다고 내놓은 것이다. 이제 ‘일자리 300만 개’ 기대감은 접고, “올해 설정한 목표는 반드시 달성할 테니 나중에 박수를 쳐달라”는 것일까?
고용 문제에 대한 대응 방식도 ‘전략’은 빈곤하고 땜질식 처방에 맞춰져 있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해 6월 공식 실업자 수가 96만 명(3.9%)으로 100만 명에 육박하자 즉각 희망근로사업을 실시했다. 그러나 겨울철 희망근로사업이 종료되면서 올 벽두에 ‘사실상 실업자’가 330만 명에 이른다는 민간 연구소 등의 충격적인 수치가 대서특필되자 부랴부랴 국가고용전략회의의 개최에 나섰다.
그런데 희망근로사업 중단·축소의 배경에는 재정지출 압박이 깔려 있다. 지난 2년간 MB 정부 경제정책의 골간이던 ‘부자 감세’로 인해 재정지출 여력에 한계가 노출되고, 이것이 희망근로사업에까지 파급되면서 그 여파가 고용시장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 것이다. 사실 부자에 대한 세금 감면과 대기업 법인세 감면은 지난 2년 이명박 정부 경제정책 드라이브의 핵심이었다. 세금을 감면해주면 소비가 늘고, 설비투자가 확대되면 경제가 성장하고 일자리가 늘어나게 된다는 MB노믹스의 결과는 그러나 ‘고용 없는 성장’이었다. 더구나 세금 감면으로 인해 재정지출 확대 여력이 갈수록 줄어들면서 재정을 동원해 일자리를 유지·창출하는 능력이 한계에 부닥치고 있다. 예컨대 노동부는 고용조정이 불가피한 사업주가 인력을 감축하지 않고 고용을 계속 유지할 때 지원하는 ‘고용유지지원금’을 2009년 9월 13만여 개 사업장에 2800억원을 지원했으나 올해는 1천억원으로 대폭 축소했다. 이 제도가 그나마 고용의 안전판 역할을 해왔음에도 부자 감세에 따른 재정수입 감소 탓에 지원 금액을 축소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상속·증여세 감세 법안도 마찬가지다. 이 법안이 국회에 계류되면서 부자들이 덩치 큰 증여를 뒤로 미루고 있는 탓에 지난해 증여세 징수액은 1년 전보다 4천억원가량 감소했다. 세수 급감이 정부 일자리 예산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주면서 ‘사실상 실업자’ 약 400만 명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양상이다.
게다가 최근 유럽 국가들의 재정 위기가 터지면서 우리나라의 국가부채와 재정적자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부자 감세는 남은 임기 3년 동안에도 지속적으로 일자리에 후유증을 미치게 될 공산이 크다. 지난 2년 동안 시행했던 경제정책들이 계속 일자리 문제 대응에 발목을 잡는 쪽으로 작용하게 되는 셈이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양도세 감면 등 부동산 감세로 인해 5년간 세수입에서 마이너스 96조원이 발생한다. 그런데 단순 계산으로도 연봉 2천만원짜리 일자리 100만 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원은 연간 20조원이면 된다. 감세의 파괴적 충격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감세의 파괴적 충격
현 정부가 도입한 ‘취업 후 등록금 상환제’는 경제와 교육 두 부문에 걸쳐 있다. 우리 시대에 ‘청년’은 비싼 등록금과 졸업해도 취업이 안 되는 고용 문제가 함께 맞물리면서 가장 크게 고통받고 있는 세대다. 그런데 취업 후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않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취업 후 등록금 상환제는 당장 뿌리부터 흔들리게 될 것이 뻔하다. 즉, 일자리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면 취업 후 등록금 상환제는 실패한 정책이 되어 나중에 수많은 실업청년 채무자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국가고용전략회의 추진 배경으로 “경기 회복에 대한 서민의 낮은 체감도”를 들고 있다. 단지 ‘빠른 경기 회복’이란 경제 성적을 서민이 체감하도록 하는 수단으로 고용 문제를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해 기획재정부는 ‘최근 경제여건 점검 및 대응’ 자료에서 “1월 실업자 급증은 구조적 요인이 아니라 희망근로사업이 중단된 데 따른 마찰적 요인에 기인한다. 경기 회복에 힘입어 고용지표는 2∼3월부터 크게 나아질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경기가 회복되면서 취업자 수가 증가할 것이라는 믿음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 정부의 경제정책 수장들이, 누구나 다 아는 ‘고용 없는 경기 회복’이란 말을 한사코 쓰지 않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기획재정부 경제정책국 이상원 과장은 “한 나라의 소득수준이 올라갈수록 경제정책에서는 사람들이 노동시장으로 많이 나와 적극적으로 일을 찾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이 대통령이 ‘본인의 자활 노력’을 강조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상자기사 참조). 이와 관련해 정부는 올해부터 매년 11월11일을 ‘고용의 날’로 지정해 고용 창출 우수 기업에 고용금탑을 수여하기로 했는데, 11월11일로 정한 건 ‘일’을 뜻하는 숫자 4개가 한데 모여 있는 날이란 점에 착안했다고 한다.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뜻이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일을 찾아 자활 노력을 하라고 촉구하는 뜻이기도 하다. 고용 문제는 정부의 책임이라기보다는 근로 의욕이 부족한 개인의 책임이란 뜻일까.
고용 상황에 대한 인식이 이렇다 보니 각종 일회성 고용 프로그램들만 발굴되고 있다. 정부가 내놓은 ‘2010 고용회복 프로젝트’는 고용장려금 지급 등 각종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에 소요되는 중앙정부 추가 재정은 1천억원 안팎에 불과하다. 반면 이 프로젝트에 포함된 ‘지자체 지역공동체 일자리 3만 개 창출’ 사업에는 약 3천억원이 소요된다. 지자체들이 경비·행사비를 5% 절감해 일자리를 만들어낸다는 프로젝트다. 중앙정부는 그럴듯한 프로그램만 제시하고, 실제로 돈을 써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건 지자체가 알아서 하라는 것일까. 고용과 관련된 방대한 설문조사 원자료를 가진 국가기관은 통계청인데, 통계청 관계자는 “국가고용전략회의나 ‘2010 고용회복 프로젝트’와 관련해 청와대나 관계부처 등에서 우리한테 특별히 정책적 함의를 담고 있는 고용 자료 분석을 요청한 건 아직 없다”고 말했다. ‘치밀한 고용 전략’의 부재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근로 의욕이 부족해서 일 안 한다?
게다가 고용 문제조차 여전히 단기주의에 집착하고 있다. 새로 도입한 중소기업 고용증대 세액공제제도(고용을 늘리는 기업에 추가 고용 1인당 300만원의 법인세액 공제)의 경우 2011년 6월까지만 시행하기로 했다. 현 정부 임기 중에 당장 일자리를 늘려야 세액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 고용 창출 유인을 극대화해 가시적 성과를 내겠다는 것이다. 특히 이 제도의 경우 당장 재정지출을 수반하는 건 아니지만, 법인세 수입이 줄어들게 된다. 지금 당장 고용 수치는 다소 개선될 수 있겠지만, 나중에 들어설 정부와 후세대에 재정수입 감소 부담을 떠넘기는 격이다.
감세와 더불어 이명박 정부가 지난 2년간 핵심 경제정책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규제 완화다. 이 정책 역시 일자리 문제와 맞닿아 있다. 기획재정부 이상원 과장은 “보건·복지·의료·교육 분야에서 일자리를 대대적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이들 분야의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며 “하지만 규제 완화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아 일자리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적 일자리의 경우 규제 완화를 통해 공공 영역에서 민간으로 넘겨야 일자리가 만들어진다는 주장이다. 민간의 일자리 창출 여력이 갈수록 떨어지는데도 ‘시장의 힘’을 이용해 경제를 성장시키고 이를 통해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MB노믹스 철학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재정 여력 소진에 민간으로 떠넘기기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곽승준 위원장도 지난 1월 과 만난 자리에서 “대기업들이 자체적으로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일자리를 만들어가는 모델을 확산시켜야 한다”며 “대기업들이 연간 홍보·광고비의 10% 정도를 떼내 사회적 기업을 설립·운영하면 기업 이미지도 좋아지고 매출도 증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감세 등으로 인해 일자리 창출에 쓸 재정 여력이 소진되고 있는 만큼, 이제 민간이 일자리 만들기에 나서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지난 2년간 그래왔듯 남은 3년 동안 400만 명에 이르는 ‘사실상 실업자’들은 “바보야, 문제는 고용이야”라는 말을 허공에 외치면서 표로 심판할 날이 어서 오기만을 바랄 것인가?
|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박종준 전 경호처장 다시 경찰 출석…김성훈 차장은 세번째 불응
경호처, ‘김건희 라인’ 지휘부로 체포 저지 나설 듯…“사병이냐” 내부 불만
중립인 척 최상목의 ‘여야 합의’…“특검도 수사도 하지 말잔 소리”
김민전에 “잠자는 백골공주” 비판 확산…본회의장서 또 쿨쿨
미 국가안보보좌관 “윤석열 계엄 선포는 충격적이며 잘못됐다”
연봉 지키려는 류희림, 직원과 대치…경찰 불러 4시간만에 ‘탈출’
“김건희가 박찬욱에게, 날 주인공으로 영화 한편 어때요 했다더라”
‘독감 대유행’ 예년보다 길어질 수도...개학 전후 ‘정점’ 가능성 [건강한겨레]
박종준 전 경호처장 긴급체포 없이 귀가…경찰, 구속영장 검토
25년 경호 공무원의 조언 “대통령 ‘개인’ 아닌 ‘공인’ 지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