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8월23일, 서울 도봉산 아래 한 연수원에 시민운동가와 지식인 50여 명이 모였다.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밀폐 모임이었다. 서울의 주요 시민단체는 물론 지역 풀뿌리 운동단체의 주요 활동가들이 대거 참석했다.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로 촉발된 촛불집회의 여진이 남아 있던 그해 여름, 시민운동가들은 이틀에 걸친 내부 토론에서 2010년 지방선거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시민운동은 진화를 거듭했다. 최근에는 정치적 중립성의 강박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정치시민운동을 선언했다. 왼쪽부터 2000년 총선시민연대, 2004년 총선시민연대(한겨레 자료), 2008년 촛불시민의 모습(<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정치적 중립’ 강박에서 벗어나다
“정치적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그 싸움이 시작됐다.”(ㄱ교수) “민주당은 지리멸렬하고, 진보정당은 분당했다. 어떻게 정치적 주체를 길러낼 것인가?”(ㄴ교수) “촛불의 에너지를 수용해 2010년 지방선거에 대응하는 게 중요하다.”(ㄷ운동가) “흩어진 진보 역량을 발굴하고 끌어모으는 ‘정치 연합’으로 지방선거를 준비해야 한다.”(ㄹ운동가) “정당에 맡길 수 없다. 시민사회가 지방선거 연대를 일구어 정당을 긴장시켜야 한다.”(ㅁ운동가)
‘도봉 회동’은 시민운동 진영에서 적잖은 의미를 지닌다. 이 모임을 고비로 시민사회단체들은 정치적 중립의 강박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적극적 정치 개입의 방법을 논하기 시작했다. 정치 연합, 지방선거 공동 대응, 정당에 대한 시민사회의 압력 등의 발상이 이 모임에서 처음으로 공론화됐다. 정당에 실망하고 시민운동도 신뢰하지 않는 ‘촛불 시민’이 던진 충격은 시민운동가들을 변화시켰다.
이후 1년에 걸친 연쇄 모임과 다양한 논의는 새로운 ‘정치시민운동’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네트워크’(2009년 7월 출범), ‘희망과 대안’(2009년 10월 출범), ‘풀뿌리 좋은 정치 네트워크’(2010년 1월 출범 예정) 등이 그 결실이다. 시민운동과 구분되는 민중운동 진영에서도 비슷한 논의 끝에 ‘2010연대’(2009년 11월 출범)를 만들었다. 정치적 입장에는 차이가 있지만, ‘민주통합시민행동’(2009년 8월 출범), ‘시민주권’(2009년 10월 출범) 등도 정치시민운동을 표방하며 새로 등장했다. 2010년 시민사회의 판도는 이 6개 조직이 좌우할 것이다. 각 조직이 2009년 여름 이후 속속 출범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의 목표는 같다. 2010년 6월 지방선거 이전에 ‘정치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정치적 중립성? 이제 그런 논쟁은 안 해요. ‘정당과 정파로부터 독립적인 시민운동 고유의 정체성을 지킨다. 그러나 정치적 사안에 적극 개입한다. 정치적 불개입은 정치적 중립성과 상관이 없다’ 이런 정도의 공감대가 지난 1년간 형성됐지요.”
하승창 ‘희망과 대안’ 상임운영위원은 시민운동 내부 논의가 ‘중립성’ 문제에서 두 단계 이상 진화했다고 설명한다. ‘기계적 중립’의 강박은 이미 벗었고, 단순한 ‘후보 단일화’에 대한 미련도 버렸다는 것이다.
“2009년 재보선 때만 해도 ‘후보 단일화’라는 표현을 썼지요. 지금은 아닙니다. 정치 연합 담론이 후보 단일화 담론을 밀어냈습니다. 후보 단일화는 무조건 이기고 보자는 것이지만, 정치 연합은 서로 다른 정책을 조율하면서 진보개혁 세력 전체의 정치적 역량을 한 단계 높이자는 거지요. 그 과정에서 누가 정치 연합을 성사시키는 능력을 발휘하느냐, 그 경쟁에 여러 정당이 뛰어들도록 하는 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원로·중견 명망가 모인 ‘희망과 대안’‘아래로부터의 압력’은 주효했다. 2009년 가을 이후 정치 연합을 논의하기 위한 비공개 테이블이 구성됐다. ‘희망과 대안’ ‘2010연대’ ‘시민주권’ ‘민주통합시민행동’ 등 정치시민운동 조직들이 테이블을 주도하고 있다. 진보개혁 진영의 여러 정당들이 동석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하승창 상임운영위원장은 “모든 세력이 시험대에 올랐다”고 평했다. 정당은 물론 서로 다른 결을 지닌 시민조직 스스로도 조정·협의의 과제를 받았다. 방정식에 비유하자면 고차방정식이다. 변수가 많다.
‘시민주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뜻을 계승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참여정부 인사 및 노사모 회원이 많이 참여했다. ‘민주통합시민행동’에도 친노 인사들이 포진해 있지만, 주로 김대중 정부와 인연이 닿은 인물이 많다. ‘2010연대’는 진보정당 성향의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민주노총·진보연대 등 민중·노동 운동 출신이 주축을 이룬다. 이 3개 조직 사이에만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각 조직은 기존 정당의 단순한 외곽 지원단체가 아니다. 현재의 민주당·국민참여당·진보정당 등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들이 과연 정치 연합의 마중물이 될 수 있을까? 상수는 ‘희망과 대안’이다. 이 조직에는 참여연대·환경운동연합 등으로 대표되는 시민운동 진영의 원로·중견급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를 대표하는 박원순·백낙청 등은 정파적 치우침 없이 독자 행보를 거듭한 명망가들이다. ‘중도파’는 어느 쪽에서건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중재 역할의 적임자일 수 있다. 오광진 ‘희망과 대안’ 팀장은 “예전만 못한 시민사회 내부 동력을 끌어올리고 여러 세력의 이견을 조정하려면, 시민운동 1세대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희망과 대안’은 처음부터 시민운동 1세대의 명망 있는 개인들을 집결시키는 데 주력했다.
정치적 지향의 차이를 중재·조정한다 해도 남는 문제가 있다. 각 정당의 공천 과정에 개입하는 일이다. “중재 역할만 해서는 안 되겠지요. 정당이 시민단체를 믿고 공천권을 내놓지는 않을 테니. 정당의 이해득실을 압도하는 대중적 힘을 어떻게 결집할 것인지가 관건입니다.” 김민영 민주넷 집행위원장은 ‘리더십의 부재’를 걸림돌로 꼽았다. 중재했으나 동의하지 않을 때, 결정했으나 따라오지 않을 때, 이를 압박할 수 있는 정치적 지도자 또는 지도세력이 없다는 것이다. 가히 ‘지도력의 진공상태’라 할 만하다. 김 집행위원장은 “결국은 대중적 압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어지간한 대중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진보정당은 정치 연합 논의를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다. 한국 정치사를 통틀어 소수 정당은 ‘연합의 희생자’였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반한나라당 연합’의 구호에 떠밀려, 의회와 지자체 진출에 번번이 고전했다. 정치세력으로서 지체를 거듭하고 있다. 중재를 자임한 시민사회는 이들에게 무엇을 약속할 수 있을까?
정치시민운동 단체들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시민사회는 진보 정당에 무엇을 약속하나
박석운 2010연대 운영위원은 진보 정당에 대한 우선적 배려를 구상하고 있다. “진보 정당 후보의 당선이 유력한 지역의 단체장은 진보 정당에 우선권을 줘야 합니다. 민주당은 소탐대실하지 말고 전략적 판단을 해야지요.” 민주당이 대선까지 내다보는 집권 구상을 갖고 진보 정당 및 소수 정당 후보의 ‘연합공천’을 인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박 운영위원이 보기에 이 방식은 1980년대식 ‘비판적 지지론’과는 다르다. 특정 후보의 당선을 위해 소수 정당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연합을 통해 당선 가능 지역을 넓히고 그 가운데 전략 지역에서 진보 정당을 배려하자는 구상이다. 민주당을 향한 압력도 이미 시작됐다. 이형남 민주통합시민행동 공동상임운영위원장은 “진정성과 기득권의 포기를 통해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지방선거 민주대연합 논의를 시작하자”고 밝혔다.
‘풀뿌리넷’은 이런 논의에서 약간 비켜 있다. 풀뿌리넷은 정당이나 주요 시민단체와 무관하다. 평범한 시민들이 2010년 지방선거 기초의원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동네에서 생협 활동을 한 주부, 출판업을 하면서 마을 공동체 활동을 한 직장인 등이다. 서울의 도봉·마포·구로·관악구, 광주와 대구 그리고 강원 속초 등에서 말 그대로의 ‘시민 후보’ 20여 명이 이미 출사표를 던졌다. 풀뿌리넷의 정식 출범을 준비하고 있는 오관영 ‘함께하는 시민행동’ 사무처장은 “정당 공천 후보에 맞서 뜻있는 풀뿌리 후보들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공동의 선거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직 그 세력은 미약하지만, 풀뿌리넷의 상징성은 크다. 지방선거의 대의에 가장 잘 부합할 뿐 아니라, 정치 연합이 성사됐을 때 민주당, 진보정당, 국민참여당 등의 후보와 함께 ‘연합 후보’의 한 축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시민사회 차원에서 풀뿌리 후보를 위한 전국 유세를 준비하자는 논의가 시작됐다. 정당 공천을 거부한 무소속 자치단체장과 연합해 풀뿌리 후보의 수를 더 늘이고, 시민사회 유력 인사들이 이들을 위한 선거운동에 나서자는 발상이다. 특히 박원순 변호사가 이 계획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시민 정치조직의 건설과 기획에 참여한 유력 인사들이 직접 선거에 출마한다는 소식은 아직 없다. 황인성 시민주권 ‘소통과 연대’ 위원장은 “좋은 후보를 발굴해 지원하고 싶지만, 주변에서 권유를 받는 분들이 대부분 출마를 자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원순 변호사는 여전히 정치권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다만 “어떤 식으로건 지방선거에서 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변의 압력과 권유는 여전히 강력하다.
“총선·대선까지 내다보는 정치 연합으로”1980년대 학생운동은 이른바 ‘386 정치인’들을 낳았다. 1990년대 시민운동은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의 토양이 됐다. 2000년대 보수파의 ‘뉴라이트 운동’은 이명박 정부의 참모진에 수혈됐다. 시민운동은 한국 현대 정치의 결정적 순간마다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승창 ‘희망과 대안’ 상임운영위원은 “정치 연합을 통해 한국 사회의 새로운 정치 전형을 만들 순간이 왔다”고 말했다. 박석운 2010연대 운영위원은 “전인미답의 길이라 여러 난관이 있겠지만 한국의 정치 발전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정치 연합을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 황인성 시민주권 ‘소통과 연대’ 위원장은 “정치 연합의 능력을 키워 총선·대선까지 내다보는 계기로 삼겠다”고 말했다. 그 구상을 이루는 데 주어진 시간은 6개월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눈살 찌푸리게 한 금남로 극우집회, 더 단단해진 ‘광주 정신’
배우 김새론 자택서 숨진 채 발견
김새론 비보에 김옥빈 ‘국화꽃 애도’…지난해 재기 노력 끝내 물거품
계엄군, 국회 본회의장 진입 막히자 지하로 달려가 전력차단
음식점 폐업률 전국 1위는 이 도시…집값도 급락 직격탄
[단독] 명태균 “오세훈 ‘나경원 이기는 조사 필요’”…오세훈 쪽 “일방 주장”
대통령실, 광주 탄핵찬성 집회 ‘윤석열 부부 합성 영상물’ 법적 대응
“여의도 봉쇄” “수거팀 구성”…‘노상원 수첩’ 실제로 이행됐다
대통령·군부 용산 동거 3년…다음 집무실은? [유레카]
질식해 죽은 산천어 눈엔 피가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