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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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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민생정당’은 괴로워

MB가 친서민 정책으로 전선을 흩뜨려버려…
원내 소수인 진보 정당은 민생 의제를 제기하는 데 한계
등록 2009-09-30 18:51 수정 2020-05-03 04:25

“사과가 배라고 우긴다 해서 믿을 사람이 있겠느냐고 안이하게 생각했다. 어떻게 대처할지 초기에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던 건 완전히 정치적인 오판이었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가 전국 순회 민생대장정을 시작한 9월8일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상인들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 연합 박지호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가 전국 순회 민생대장정을 시작한 9월8일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상인들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 연합 박지호

“실체가 없다” 판단하다가…

민주노동당의 한 고참 보좌관은 가슴을 쳤다. 이명박 대통령의 ‘중도실용’과 관련한 얘기였다. 그는 “중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보수가 뜬금없이 들고 나온 중도실용이 먹힐 줄 몰랐다”고 했다. 이 보좌관의 얘기는 최근 친서민·중도실용 강조로 안정적인 지지율을 회복한 이 대통령을 바라보는 진보 정당의 속 타는 심정 그대로 보여준다. 중도는 보수 진영의 정치적 필요에 따른 규정일 뿐 실체는 없다는 인식이 강한 진보 정당으로선 이 대통령의 ‘중도실용 프레임’에 제대로 걸려든 셈이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정당 지지도 조사 결과를 보면, 올해 초만 해도 12~13%에 불과했던 민주당 지지도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뛰어오른 뒤 지난 8월까지 22~23%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친서민·중도실용을 강조하면서 안정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반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한 자릿수 지지율은 별다른 변화가 없다. ‘반MB연대’로 공동전선을 형성했던 민주당이 두 전직 대통령 서거로 인해 독자적으로 주목된데다, 서민을 위한 민생 의제는 여권이 모조리 흡수해버린 탓이다. 정치권이 양강 구도로 흘러가면서 그러잖아도 미약했던 진보 정당은 더욱 주변화되는 모양새다.

사실 그간 이명박 정부가 보여준 부자 감세, 고위 공직자의 도덕성 시비, 독선적·권위주의적 국정운영 등은 두 진보 정당이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였다. 이명박 정부를 반민주·독재로 몰아세우는 한편 부자 감세 비판, 복지 확충 요구 등 민생 의제를 강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당·창조한국당과 공조한 ‘반MB연대’를 통해 ‘민주 대 반민주’라는 이슈를 효과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었다. 실제로 민주노동당은 지난 6월20~21일 정책당대회에서 이명박 정권을 ‘독재’로 규정하고, 정권 퇴진을 공식 목표로 결정했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도 “국정운영 방식과 정책 내용을 근원적으로 바꾸지 못한다면 남은 건 대통령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이 7월22일 언론악법 날치기를 막으려다 한나라당 의원에게 끌려나가는 모습. 사진 한겨레 김진수 기자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이 7월22일 언론악법 날치기를 막으려다 한나라당 의원에게 끌려나가는 모습. 사진 한겨레 김진수 기자

2004년 민주노동당 10석에 공이 큰 중도층

그런데 이 대통령은 한순간에 전선을 흩뜨려버렸다. 진보 정당이 줄기차게 요구한 친서민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나서면서 ‘이념 대 민생’의 구도가 돼버린 것이다. 이지안 진보신당 부대변인은 “시장 가서 어묵 먹는 게 친서민 행보냐고 비판하듯, 정부가 추진하는 친서민 정책은 우리가 볼 때 턱없이 모자라다. 하지만 대통령이 중도실용 기치를 들고 친서민을 강조한 이상 진보 세력이 그를 대체하거나 공격할 만한 의제를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원조 민생정당’을 자부하는 민주노동당·진보신당이니만큼 중도층이 선호하는 서민·중산층 이슈에 불을 붙이려는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노사 협상 촉구와 공권력 투입 항의, 대형마트·슈퍼슈퍼마켓(SSM) 허가제 도입 촉구, 대학 등록금과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촉구 등 그간 논란이 된 크고 작은 민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대책을 내놓았다. 이와 함께 진보신당은 ‘반MB연대’가 ‘반이명박’ 프레임을 넘어 서민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며 생활정치를 표방하는 ‘민들레 연대’를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이 전체 구도를 바꾸는 변수로 작용하기엔 두 정당의 힘이 너무 달렸다. 이 대통령이 선언한 중도실용에 모든 이슈가 빨려 들어갔다. 이는 중도층의 선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잠시 거슬러 올라가보면, 2004년 총선 때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얻은 덴 중도층의 ‘공’이 적지 않았다. 한나라당에 염증을 느낀 중도층 일부가 ‘서민과 노동자를 위한 정당’이라는 슬로건에 호응을 보냈다는 게 정치권 주변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노력이 기대만큼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탓일까? 이후 선거에서 중도층은 냉정히 돌아섰다. 특히 2007년 대선 때 민주노동당이 얻은 지지는 3.9%에 그쳤고, 2008년 총선에서 진보신당은 3%에도 못 미치는 당 득표율로 원내 진입에 실패했다.

정치평론가 김윤재 미국 변호사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대안 정당, 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 정당으로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에 민생 분야에서 구체적인 정책을 내놔도 쉽게 지지를 얻기 어렵다”고 말했다. 정부가 중도층을 끌어들이려고 노선 변경 움직임을 보이면, 정책을 실현할 자원을 가진 정부 쪽에 지지를 보내지 ‘약속’ 말곤 줄 게 없는 소수 야당을 지지하진 않는다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돌파구는 전혀 없을까? 두 당은 일단 4대강 정비사업과 감세로 서민이 얼마나 피해를 보게 되는지를 알리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중도실용의 실체가 진정성 없는 정치적 수사임을 먼저 알려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은 지난 9월 초 의원단 연수에서 ‘서민경제 파탄 4대강 사업을 민생 살리기 우선 정책으로’를 이번 정기국회 슬로건으로 결정했다. 4대강 사업 추진으로 예상되는 부동산·일자리·지역경제·농촌피해 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킬 계획이다. 진보신당은 노회찬 대표가 전국을 돌며 국민을 직접 만나는 ‘민생 대장정’을 통해 감세 영향으로 지방재정과 교육재정이 얼마나 줄었는지를 알리고, 통신비 인하 같은 생활 속 틈새 이슈도 제기하고 있다. 원내에선 조승수 의원이 주도하는 진보개혁입법연대를 통해 ‘대안의 정책화’를 시도할 생각이다.

연대는 사활이 걸린 문제

민주노동당 관계자는 “우리가 힘이 없기 때문에 민생 의제를 제기하는 데 한계가 있다. 2004년처럼 신선한 느낌을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제아무리 ‘발칙한’ 정책을 내놔도 ‘그런가 보다’ 여길 뿐”이라며 “현재 처한 상황은 가능한 한 힘을 모아 선거로 돌파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의 지적대로 10월 재보선과 내년 지방선거에 대비해 민주당·창조한국당, 시민사회 등과의 연대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은 아직 홀로 설 수 없는 두 당으로선 사활이 걸린 문제다. 이미 연대가 가시화되는 곳도 있다. 경기 안산 상록을 재보선에선 무소속 임종인 후보를 지지하기로 이미 합의해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과 심상정 진보신당 전 대표가 공동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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