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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순은 ‘KBS의 이명박’이런가


이 사장 취임 열 달 맞은 한국방송엔 어떤 변화가…
“상명하달식 관료 문화에 ‘색깔’과 충성심 따른 인사로 위기 불러”
등록 2009-06-11 14:12 수정 2020-05-03 04:25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열린 5월29일 서울역 앞에서 한국방송 취재팀이 시민들의 항의를 받고 철수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열린 5월29일 서울역 앞에서 한국방송 취재팀이 시민들의 항의를 받고 철수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지난해 8월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국방송 본관 앞. 첫 출근길에 나선 이병순 신임 사장이 탄 차량이 입구 쪽으로 진입하기 무섭게 현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사장이 차량에서 내리자 그에게 항의하려는 ‘사원행동’ 소속 사원들과 이를 막으려는 안전관리팀 요원 수백 명이 뒤엉키며 여기저기서 고성이 오갔고, 옷이 찢기고 단추가 떨어져나갔다. 하지만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 사장은 요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안전하게 취임식장으로 들어섰고, 사원들은 사지가 붙들린 채 밖으로 끌려나왔다.

곧이어 사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취임사를 읽는 이 사장의 목소리였다. “사랑하는 KBS 선후배 동료 여러분! 반갑습니다. KBS 공채 4기 이병순입니다. …KBS가 공영방송으로 출범한 지 35년 만에 첫 내부 출신 사장 시대가… 벅찬 감회와 함께 무거운 책임감을 깊이 새기고….”

“첫 공채 출신 사장” 감회 밝혔건만…

이런 치열한 ‘육탄전’을 거쳐 이병순 신임 한국방송 사장이 취임한 지 어느덧 열 달이 지났다. 첫 내부 공채 출신으로 ‘벅찬 감회와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임기를 시작했다는 ‘이병순 체제의 한국방송호’에 대한 종합적인 점검이나 평가를 해볼 만한 시점이 된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문제에 대한 질문보다 답들이 먼저 쏟아지고 있다.

계기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였다. 서거 뉴스를 다루는 방식을 두고 한국방송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유해가 안치됐던 경남 김해 봉하마을과 시민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한국방송 취재진은 시민들에게 쫓겨나야 했고, 심지어 한국방송 로고를 가린 채 촬영해야만 했다.

과연 뭘 잘못했기에 이런 상황이 됐을까? 한국방송 내부에서 터져나온 비판의 수위부터 심상치 않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이틀 뒤인 5월25일 한국방송 노동조합은 성명을 내어 △전날 저녁 9시 톱뉴스로 ‘국민장 거행하기로’를 다루고 이어 ‘대통령 첫 화장’ ‘국민장 어떻게 진행되나’를 다룬 반면, ‘봉하마을 13만 명 이상 조문’은 11번째 꼭지로 내보내고, 전 국민적인 ‘추모 민심’은 24번째와 25번째 꼭지에 배치하고 △24일 PD들이 대신 이미 제작해놓은 ‘대통령의 귀향-봉하마을 72시간’을 내보낼 것을 요구했지만 영화 을 방송한 사실 등을 들어 회사 수뇌부를 성토했다. 당시 성명의 제목은 ‘KBS 정녕 정권의 개가 되려 하는가’. 현 노조 지도부가 정연주 전 사장에게 비판적이되 이병순 사장 체제는 받아들인 전임 노조의 노선을 계승했음을 감안하면 자못 이례적인 톤이었다.

노조는 다음날에도 ‘무능한 사측 수뇌부들은 즉각 사퇴하라’는 제목으로 성명을 내어 △보도본부장이 조문객의 정부 비판 인터뷰를 빼라고 지시한 점 △경찰의 추모 방해는 언급하지 않으며 정치권 인사 조문 발길 소식을 두 번이나 내보낸 점 등을 들며 “그야말로 철학과 원칙이 없는 편성으로 국민들의 거센 비판을 자초했다”고 지적했다.

내부의 자성 목소리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5월28일에는 라디오 PD들이 ‘KBS 매국노들에게 고한다’는 제목으로 성명을 내어 “서거 아이템과 관련해 1라디오 제작진에게 관련자 인터뷰는 자제하고 단순 보도를 지향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며 “북 핵실험 보도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북핵 실험으로 이후 모든 프로그램의 아이템을 올인”했다고 폭로했다. 이어 29일에는 PD협회가 ‘나락으로 추락한 KBS, 이병순은 책임져라’라는 제목으로 성명을 내고 “고인과 함께 명복을 빌어야 할 시간에 오락 프로그램과 코미디 영화가 나가고 어이없는 축소보도와 어이없는 방송 사고들이 잇따”랐다며 “KBS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민심을 외면하고 왜곡하는 정권의 방송, 관제 방송으로 낙인찍혔다”고 비판했다.

“고개를 들 수 없어” 내부 비판 쇄도

구성원 개개인들도 회사 게시판에 실명으로 글을 올려 수뇌부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87년 6월에도 이렇게까지 쪽팔리지는 않았다. 사장, 부사장, 편성본부장, 보도본부장, KBS인으로 밥값 좀 하시오.”(김○○)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을 동네 가족장으로 만드는 KBS 보도를 보면서 KBS의 망조가 짙게, 그리고 가까이 왔다는 느낌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MBC를 시청하길.”(신○○)

“노 전 대통령 서거를 분수령으로 KBS의 수뇌부들은 커밍아웃을 제대로 했고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같습니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이○○)

비록 노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여러 비판이 쏟아졌지만, 그 바탕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이병순 사장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다.

‘이병순 체제 열 달의 변화’가 무엇이기에 불신을 이렇게 키웠을까? 상당수 내부 구성원들은 편향 인사와 관료적인 조직 문화, 방송철학 부재 등을 들었다.

관료적인 조직 문화와 관련해서는 라디오 PD들의 5월28일 성명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노 전 대통령) 장례 기간에 매일 4시에 하는 국장 주재 1라디오 PD 아이템 회의는 그 자리에서 결정되지 못하고 부사장까지 그대로 올라가서 방송의 지침을 받는다고 하니 더 할 말을 잃었다. 물론 부사장도 그 자리에서 결정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후 최종 결정은 사장이 해주는 것일까?”

결정 권한이 위로만 쏠리며 중간 간부들이 눈치만 본다는 말이었다. 이 사장은 실제 본부장과 팀장 사이에 국장 자리를 신설해 ‘관리’에 용이한 조직 개편을 단행한 바 있다. 문제는 이런 경향이 라디오 제작본부나 시사 프로그램에만 적용되는 얘기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지난해 8월27일 이병순 사장(가운데 안경 쓴 이)은 ‘사원행동’ 소속 사원들과 안전관리팀 직원들의 심한 몸싸움을 거친 뒤 첫 출근을 할 수 있었다. 사진 한겨레 신소영 기자

지난해 8월27일 이병순 사장(가운데 안경 쓴 이)은 ‘사원행동’ 소속 사원들과 안전관리팀 직원들의 심한 몸싸움을 거친 뒤 첫 출근을 할 수 있었다. 사진 한겨레 신소영 기자

올해 한국방송 봄 프로그램 개편을 지켜본 한 구성원의 말이다. “보통 한 달 전에는 개편안이 나와야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그런데 올해 봄 개편에서는 보름 전에야 개편안이 나왔단다. 편성 쪽에서는 정해진 것이 없다고 일절 말을 안 해주고, 제작 쪽은 제작대로 답답해하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알고 보니 편성 쪽에서 사장이 최종 결정을 내려주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말했다가 번복되면 책임을 못 지니까 모두 함구하고 있다가 최종 오케이가 난 뒤에야 말해줬다더라. 예전엔 안 그랬는데, 너무 황당해 말을 잊었다.”

대형 기획의 좌초도 눈에 띄는 ‘변화’ 가운데 하나다. 이와 관련해서는 에 이어 야심차게 준비됐던 이 엎어진 점이 주로 언급된다. PD 2~3명이 붙어 1년 넘게 5부작 또는 7부작 수준으로 기획하고 답사까지 모두 마쳤는데 올해 초 촬영 직전 단계에서 제작 계획이 무산됐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서는 “이 사장이 PD들을 싫어해서 그런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기독교 신자여서 알아서 불교 기획은 뺐다” 등의 말이 구성원들 사이에 돌았다고 한다. 한 PD는 “아예 처음부터 선을 긋고 하지 말라고 했으면 모르겠는데, 몇 달 동안 유야무야 끌더니 올해 초에야 아이템이 무산돼 담당자들이 모두 허탈해했다”고 말했다.

노골적 정치 플레이 했던 인사들 중용

관료제가 형식이라면, 그 형식을 채우는 내용물은 인사다. 이 사장의 인사 정책은 지난해부터 이미 여러 차례 구설에 오른 바 있다. 낙하산 사장 취임 반대를 표명했던 ‘사원행동’ 소속 사원들 대다수가 주요 보직에서 쫓겨나고 일부는 지방 발령을 받은 반면, 평소 한나라당 지지를 공언해온 인사들은 주요 보직을 꿰찼다.

강동순 전 방송위원회 상임위원, 유승민 한나라당 의원, 신현덕 전 경인방송 대표 등과 술자리를 갖고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언론을 어떻게 장악할 것인지’ 등의 대화를 주고받았던 윤명식 PD가 편성본부 외주제작국장으로 임명된 게 대표적이다. PD협회 정상화추진협의회를 꾸려 회사 쪽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던 PD협회와 각을 세웠던 고성균 PD는 라디오제작본부장에 올랐고, 올해 1월1일 새벽 제야의 종 타종식 때 ‘조작 방송’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오세영 예능2팀장은 행사 직전 예능국장으로 승진했다.

보도본부의 인사는 더욱 노골적이었다. 정부에 비판적인 발언을 한 조문객 인터뷰를 빼도록 지시한 김종율 보도본부장은 임명 당시부터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과 신일고 동문 인연이 구설에 올랐고, 김인규 전 한국방송 이사를 사장으로 옹립하려던 비공식 조직인 ‘수요회’를 주도했던 고대영 보도총괄팀장은 보도국장 자리를 꿰찼다. 김인규 전 이사는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후보 특보를 지냈다.

이같은 이 사장의 조직 운영과 인사 방침은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과도 상당히 유사하다. 전임자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과도한 ‘인위적 물갈이’를 한 뒤 정치색과 충성심이 검증된 인사를 주요 보직에 앉히는 행태가 그렇다. 특정 정당에 노골적인 줄대기를 한 인사에게 주요 보직을 맡기는 것을 두고 비상식적이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일단 밀어붙이고 보는 행태 또한 흡사했다.

대통령과 비슷한 이 사장의 조직 운영 스타일은 노 전 대통령 서거 보도를 계기로 위기를 맞았지만, 어떤 결론이 나올지는 아무도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상당수가 변화를 갈구하고 있지만, 일부는 그와 반대의 뜻을 가지고 있고, 또 내부 구성원 전반에 패배의식이 깊이 뿌리내린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장에 대한 평가에서 유보적인 의견을 표명했던 ‘중간층’ 가운데 상당수가 변화 조짐을 보이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한 구성원은 “이병순 사장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을 올리면 예전엔 ‘너는 KBS 사원 아니냐’는 등의 비판적인 댓글이 많았지만,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에는 동조하는 댓글이 더 많아졌다”고 전했다.

자신을 ‘중간자’라고 표현한 한 구성원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이 사장이) 들어오는 과정이 (경찰력을 동원하는 등) 분개할 만한 상황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KBS 출신이고 해서 긍정적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지난 열 달 동안 사장과 관련해서는 ‘결재 서류는 마침표 하나까지 챙길 정도로 편집증적으로 살핀다’ ‘지출을 줄이는 것이 지상 최대 목표여서 돈 쓰는 것에 엄격하다’ 등의 말만 들었을 뿐, 현장에 내려와 제작진들 얘기를 듣거나 방송에 대한 소신이나 비전을 얘기했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없다. 회계 전문가로 데려온 것도 아닌데, 지출만 챙기고… 한마디로 사장으로서 자질이 너무 부족한 것 같다.”

구성원 개개인의 저항은 아직 미온적

이같은 여론의 뒷받침을 받아 구체적인 움직임도 잇따르고 있다.한국방송 PD협회(회장 김덕재)는 6월4~5일 최종을 편성본부장, 조대현 TV제작본부장, 고성균 라디오제작본부장의 신임투표에 들어갔다. 한국방송 기자협회(회장 민필규)도 우여곡절 끝에 6월8~9일 김종율 보도본부장과 고대영 보도국장의 신임투표를 하기로 했다.

결과는 쉽게 장담하기 어렵다. 이미 이병순 사장 취임 뒤 사내외 비판 여론이 비등했지만, 한국방송 내부 구성원들은 노조 선거, 기자협회장 선거 등에서 ‘온건파’ 내지는 ‘타협파’를 선택한 전례도 있다. 게다가 보도본부장과 보도국장 신임투표 여부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민필규 한국방송 기자협회장이 사퇴 의사를 밝히는 등 이미 내부 분란을 겪는 중이다.

한국방송의 한 직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장 크게는 사장의 문제다. 하지만 방송 제작에 참여하는 제작자들의 문제도 있다. (위에서) 강압적으로 나오는데 내부적 반향이 미약한 것이다. 좀 해보다가 ‘아니면 말고’ 식의 저항을 할 뿐이다. 집단적 저항으로 키워지려면 방송 제작 일선에서 자율성이 침해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들이 즉각 개별적으로 저항하고, 이런 것들이 각 협회나 노조를 통해 모아져야 한다. 그런데 그 부분은 모자란 것이 사실이다.”

한국방송 구성원들이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 국민적 관심이 또다시 모아지는 시점이다.




현직 한국방송 기자가 보내온 ‘넋두리’
먹으로 쓴 거짓이 피로 쓴 사실을 가릴 수 없건만


얼마 전 모처럼 택시를 탔습니다. 기본요금이 2400원이더군요. ‘불과 100원 차이인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신료 말입니다. 월 2500원씩 전기요금 납부고지서에 함께 묻어나오는 시청료 말입니다. 택시 기본요금보다 100원 비싼 한 달 수신료. 그런데도 시청자들은 왜 올려줄 맘이 없을까? 지난 보름간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겠더군요.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떴습니다. 취재에 나선 한국방송 기자들은 참 맞기도 많이 맞았습니다. 취재 거부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중계차에서 생방송하던 여기자가 책으로 머리를 난타당하기도 했습니다. 네티즌들은 한국방송 머리글자를 따서 ‘김비서’라며 비아냥대더군요.
왜 이런 일이 빚어지고 있을까? 이유는 분명합니다. 잘라 말해 한국방송 뉴스가 뉴스답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절로 모여든 추모 인파를 축소하는 데 급급했습니다. 추모 열기는 감추는 데 바빴고, 민심의 진정성은 정치적이라며 색안경을 끼고 바라봤습니다. 대신 장례 절차 같은 정부의 방침은 시시콜콜한 것까지 받아썼지요. 뉴스 특보를 없애고, 기사를 축소하고, 중계차를 옮기고, 인터뷰를 빼고…. 구체적인 사례가 너무 많아 나열하기 힘들 지경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꼭 이번 사태만을 두고 한국방송을 백안시하는 건 아닐 겁니다. 지난해 여름과 가을, 촛불을 든 시민들은 한국방송 본관 앞에 모여 연방 ‘지못미’를 외쳐대지 않았던가요. 그 뜨겁던 지지와 성원의 메아리는 이제 호된 질타로 돌아와 제 가슴을 파고듭니다.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았건만 한국방송은 참 변해도 많이 변했습니다. 전임 사장 시절의 진행자들은 모두 잘렸습니다. 새해 벽두 보신각 타종식 땐 귀에 거슬리는 현장음도 지워졌습니다. 부당한 권력에 항거하던 기자들은 보복 인사와 징계를 당했습니다. 정권에 삐딱한(?) 태도를 취한 나 은 사라졌지만 이명박 대통령 라디오 연설은 꼬박꼬박 틀어대고 있습니다. ‘정권의 나팔수’로 충실히 복무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커지는 찰나에 이번 사태가 터진 것입니다.
지난 6월3일 밤, 견디다 못한 한국방송 기자들이 모여 총회를 열었습니다. 한국방송이 시민들로부터 외면받는 현실을 기자 스스로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함께 이야기해보자는 자리였습니다. 200명 가까운 기자들이 모였고 20명이 넘는 기자들이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의견은 갈렸습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국면을 애써 외면하며 제대로 준비조차 하지 않은 무능한 수뇌부에 책임을 묻자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한국방송 중계차가 쫓겨난 것은 결단코 한국방송 잘못이 아니며 돌을 맞을 정도로 편파적으로 방송하진 않았다는 항변도 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날 보도본부장과 보도국장에 대한 신임투표 여부를 결정하는 투표- 그러니까 투표를 위한 투표라는 초유의 사건이죠- 를 실시했고, 참석자 대다수의 동의로 신임투표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총회에서 나온 후배 기자의 말이 아직 귓전을 맴돕니다. 입사지원서에 썼던 빛나는 문장을 생각해보라고. 초심으로 돌아가보면 이번 사태의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 10여 년 전 쓴 입사지원서를 떠올려봤습니다. “먹으로 쓴 거짓이 피로 쓴 사실을 가릴 수는 없다”라고 썼던가. 그런데 먹이 아니라 마이크라고 해서 너무나 많은 거짓을 떠들어온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한국방송 한 기자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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