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은 진보 정당들엔 개척 가능성이 무한대인 ‘블루오션’과 같다.”(진보신당 이지안 부대변인)
4월29일 밤, 전남 장흥. 민주노동당 정우태 광역의원 후보 선거사무실에는 환호성이 올랐다. 민주당 김성 후보 3731표(35.64%), 민주노동당 정우태 후보 5112표(48.84%). 민주당의 아성 호남에서 ‘1호’ 민주노동당 광역의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같은 시각 광주 서구 ‘다’선거구. 민주노동당 류정수 기초의원 후보 사무실도 마찬가지 사정이었다. 민주당 고경애 후보(4706표·45.88%)를 10%포인트 가까운 차이(5551표·54.11%)로 누른 것이다.
민주당이 인천 부평을 국회의원 선거와 시흥시장 선거 승리 등으로 ‘이명박 심판론’이 통했다고 선언하던 시각에, 호남에서는 ‘민주당 심판론’이 승기를 가르고 있었다.
민주노동당 오병윤 사무총장은 “정우태 후보의 캐치프레이즈는 ‘장흥의 강기갑’이었고, 민주당 김성 후보는 ‘새로운 출발, 겸손한 봉사’였다”며 “민주노동당이 농민들의 생활 속에서 실천해온 후보를 내세웠다면, 민주당은 탈당과 복당을 밥 먹듯 하던 구태 정치인을 후보로 내세운 결과”라고 말했다. 정우태 광역의원이 내세운 공약은 나락 수매가 7만원 보장(40kg 기준)과 농어민 면세유 확대 등 농어민의 삶과 일치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지난해 11월 지역농협과의 쌀 수매가 협상에서 ‘전국 최고가 매입’이라는 기록을 세운 바 있다. 농협이 당시 내세운 가격은 40kg 가마니당 4만9800원이었다. 그가 이끈 장흥군 농민회는 5만5천원을 받아냈다. 정 광역의원은 “당시 농민들에게선 ‘수매가 협상이 끝나기 전까지는 농협에 한 톨도 넘기지 않겠다’는 동의를 받아냈고, 농협 쪽에는 ‘농민이 살아야 농협이 산다’는 압박을 계속했다”며 “그 결과 2만여 장흥 농민들은 79억원의 추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고 돌이켰다. 당시 장흥농협이 내정한 협상 최고가는 5만1천원이었다고 한다.
정 광역의원과 민주노동당이 장흥 농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었던 근간은 마을 좌담회였다. 이들은 지난해 중순부터 장흥군 일대를 돌며 300회가 넘는 마을 좌담회를 열었다. 정 광역의원은 “지난해 7월에는 군수와의 대화를 통해 따낸 11억원으로 전체 장흥 농민들에게 친환경 비료를 제공하기도 했다”며 “이런 실질적인 결과들을 통해 마을 어른들이 민주노동당을 믿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내세우며 농민들에게 조금씩 나눠주던 정책자금도 없애겠다고 하고 민주당도 이를 수수방관하고 있다”며 “이런 현실을 보면서 농민들 사이에서 자신의 이해를 대변해주는 조직은 농민회이고, 정말 농민에게 필요한 정당은 민주노동당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병윤 사무총장은 “민주당에서는 이번 재보선 결과를 잘못된 공천 탓으로 돌리겠지만, 그렇게만 결론 내리면 큰 낭패를 볼 것”이라며 “호남의 민심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을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호남의 민주노동당 지지율(8.1%)과 진보신당 지지율(3.3%)은 전국 평균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호남의 정치적 한계를 비판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근거가 진보 정당의 낮은 득표율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 정당의 약진을 예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 사무총장은 “현재까지 호남에서 한나라당이 약진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며 “결국 호남에서는 민주당과 진보 정당 후보, 그리고 무소속 후보가 대결하는 구도가 될 텐데, 서민과 중산층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민주당의 내부 개혁 없이는 점차 진보 정당 후보에게 쏠리는 기대가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 사무총장은 광주 출신이다. 지난 2006년에는 광주시장 선거에 출마해 10.5%를 득표한 바 있다.
DJ 집권 뒤로도 삶의 변화 없어진보개혁 세력들은 호남의 개혁 지향성·민중성이 근대화 과정의 결과라고 해석한다. ‘이촌향도’(離村向都)로 통칭되는 농촌 공동체 해체 과정에서 호남을 떠난 이들은 서울과 수도권으로 향해야 했다. 변변한 공장이 없던 호남에는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영남 출신들은 고향과 가까운 곳의 공업단지에 안정적인 일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수도권에 올라오는 영남 출신들은 상대적으로 학생이나 국가고시 합격자 등 선택받은 이들이 많았다. 서울과 수도권의 빈민층을 형성한 호남 출신들은 정치·경제적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오병윤 사무총장은 “호남 유권자들이 그간 ‘김대중 선생님과 민주당’으로 상징되는 정치세력을 계속 선택해온 이유는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서민의 삶이 중심이 되는 사회구조를 만들자는 목적 때문이었다”며 “그러나 정권 교체 이후에도 자신들의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실감하게 된 이후로는 내부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흥 선거에서 수세에 몰린 민주당 후보 쪽은 막판에 ‘후보가 싫으면 민주당을 찍어주고, 민주당이 싫으면 선생님을 보고 찍어달라’는 말까지 만들어 돌렸지만 흐름을 바꿀 수는 없었다. 흘러간 물이 물레방아를 다시 돌릴 수 없듯이.
“당선 가능성이 없다면 나왔겠습니까.” 전북 전주 덕진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정동영 의원에게 맞섰던 염경석 진보신당 후보의 말이다. 염경석 후보는 6.11% 득표에 그쳤다. 염 후보는 2006년 도지사 선거에도 출마해 7.6%를 득표한 바 있다. 염 후보는 “이번 선거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전북에도 ‘다당제’가 도입돼야 한다는 말을 하더라”며 “내년 지방선거에서는 진보 정당뿐만 아니라 한나라당 당선자도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구조가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이 지역의 내년 지방선거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06년 지방선거 당시 민주노동당은 호남에서 기초의원 17명(광주 8명, 전북 6명, 전남 3명)을 배출한 바 있다. 수도권 당선자(11명)와 영남권 당선자(22명)에 비하면 적지 않다. 류정수 민주노동당 기초의원은 “광주를 비롯한 호남의 민심은 큰 정치, 큰 권력에서는 여전히 민주당을 지지할 수밖에 없지만 작은 정치, 작은 권력에서는 민중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진보 정당을 선택하겠다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정우태 광역의원은 “전남의 경우 장흥군처럼 민주노동당 조직이 농민회와 유기적으로 결합된 구조가 화순군과 보성군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며 “내년 지방선거에서는 전남 지역에서만 10명 이상의 광역·기초의원을 배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오병윤 사무총장은 “내부 여론조사를 보면 호남에서 15% 안팎의 지지율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며 “2010년 지방선거에서 토대를 만들고 2012년 총선에서 최초의 호남 지역 국회의원을 탄생시키는 것이 내부 목표”라고 주장했다.
민주노동당·진보신당 경합 벌이는 곳도과제는 있다. 호남에서 당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후보들이 동시에 경합을 벌이게 되는 구조다. 염경석 후보는 “당선 가능성이 높은 곳에서는 두 진보 정당이 후보를 단일화하는 구조를 갖춰야 진보 정당의 공간을 더 넓힐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아직까지는 이런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털어놨다. 후보 단일화가 쉽지는 않다. 비례대표 자리를 확보하려면 전국 득표율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염 후보는 “당선 가능성이 높지 않은 나머지 지역에서는 두 정당 후보들이 치열한 경합을 벌여 누가 진보 정당의 대표주자인지를 가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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