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철 수급 불안이 있었다지만, 올가을까지 제강업체들은 호황을 누려왔다. 고물상에 모인 고철들은 제강사들의 전기로 안에서 건설자재와 각종 산업부품으로 거듭 태어났다. 그러나 지난 9월 고철 가격이 유례없는 폭락을 기록하고 곧이어 전세계적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고물상들이 납품을 위해 제집 드나들듯 오가던 제강사의 철제 대문은 굳게 닫히기 시작했다. 포스코 같은 초우량 철강기업들까지 혹독한 겨울을 맞을 것이라는 소문도 돌고 있다. 건설업체에 자재를 대는 철강업체들 중에는 돈줄이 바짝바짝 말라가는 기업들도 많아졌다.
고철을 사용해 건설용 자재를 주로 만드는 제강업체들에 어떤 일이 닥친 것일까. 국내산 고철 매입을 꽉 막아버렸다는 이유로 고철업계로부터 원성을 듣고, 건설사들로부터는 원자재값 하락에도 철근값을 내리지 않는다며 비판받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현대제철, 동국제강 등 제강업체들은 수급 불안을 덜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고철 수입이 짐이 된데다, 고환율이라는 지뢰밭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현대제철 관계자는 “고철 가격이 지난 9월 이후 확 꺾이면서 비싸게 수입한 고철들을 빨리 써버려야 하는 실정”이라며 “이에 따라 수입 고철과 국내산 고철의 사용 비율도 과거 50 대 50에서 최근엔 70 대 30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동국제강에 납품하는 한 고철업자는 “납품권을 가진 대상들에 하루 100t 분량의 납품만 허용하는 등 수급을 죄고 있기 때문에, 중소 규모 고철업자들은 쌓이는 고물을 쌓아놓을 야적 공간도 확보하기 힘든 실정”이라고 하소연했다.
건설사들은 철근 가격이 비싸다며 큰 폭의 인하를 요구하고 나섰다. 건설사 구매 실무자들의 모임인 대한건설자재직협의회(건자회)는 최근 긴급 이사회를 개최하고 “철근의 원재료인 국내외 고철 가격을 감안할 때 고장력 10mm 철근 기준 적정가는 t당 55만원에 불과하다. 제강사들이 t당 28만여원씩 폭리를 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내 제강사들의 수입 고철 사용량이 전체 고철 사용량의 50%를 넘지 않는다는 점과 환율 및 국제 시세 등을 근거로 동원했다. 불황의 터널 앞에 서 감산을 이미 착수했거나 검토 중인 제강업체들에는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시중의 돈줄이 막히면서 건설 쪽과 밀접한 철구조물 업계에도 연쇄 부실이 우려되고 있다. 최근 한 달여만 봐도 매출액 30억~800억원대 중견·중소 업체들이 잇따라 부도를 내고 있다. 지난 10월 말 연매출 800억원대의 철강구조물 및 철강재 제작 전문업체 한신스틸콘이 부도난 게 시발점이었다. 지난 11월1일에는 매출액 200억원대의 부산 지역 강관 유통업체인 대황철강이 7억원의 어음을 막지 못해 부도가 났다. 경남 함양에 본사를 둔 철구조물 전문 유통업체 (주)세영도 11월11일 최종 부도를 맞았다. 또 지난 12월3일에는 현대제철의 지정판매점으로 지난해 683억원의 매출을 올린 중견 유통업체 대부철강마저 도산했다. 그리고 지난 12월10일에는 전북 익산의 자동차 부품용 강관 제조업체인 한국스틸이 자금난을 이기지 못하고 최종 부도 처리됐다.
중소 가공·유통 업체, 첫 번째 희생자?한 중견 철강업체 임원은 “철구조물 업체들은 지난해 대량 수주를 했는데 올해 상반기 원가가 폭등하면서 막대한 손실을 입은 경우가 많다”면서 “중소 건설사들의 부도가 잇따르면서 관련 채권들이 부실화될 가능성도 큰 상황”이라고 털어놓았다. 가격을 아무리 싸게 내놓아도 팔리지 않으면서 창고에 쌓인 철강 제품들이 자금줄을 죄는 악성 재고로 바뀐 상황에서, 연말 어음 만기가 돌아오는 업체들이 많고 건설공사 비수기가 닥쳤다는 것도 우려를 키우는 요인이다. 이들 중소 가공·유통 업체는 쇳물을 생산하는 기업들과의 관계에서 영원한 ‘을’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철강산업의 위기 국면에서 첫 번째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물론 철강업계의 위기는 쇳물을 생산하는 제철·제강 업체들도 비껴가지 않는다. 제조업 감산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일단 내년에는 외환위기 이후 11년 만에 처음으로 국내 쇳물 생산량이 감소세로 돌아서고, 국내 철강 수요의 위축도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한국철강협회가 최근 발표한 ‘2009년 철강재 수급 전망’ 자료를 보면, 내년 우리나라의 쇳물 생산량은 5310만t으로 올해(5396만t)보다 1.6% 감소할 것으로 예견됐다. 국내 철강 수요도 올해보다 9.5% 줄어들 전망이다. 철강재 소비 추이를 3~6개월 먼저 반영하는 지표인 건축물 착공 통계를 보면, 올해 1~9월의 국내 건축물 착공 면적은 지난해보다 21.5% 줄었으며, 이 중 주거용 건축물은 그 감소폭이 53.6%나 됐다. 내년 국내 자동차 생산량도 올해보다 5.1%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주력 산업 중엔 유일하게 조선업종에서 선박 건조가 14.5% 늘어날 전망인데, 이는 4년치 이상을 미리 발주받아놓은 덕분이다.
포스코 등에서 핫코일(열연강판)을 공급받아 냉연강판을 가공·생산하는 냉연업계 대기업들에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중형 자동차 한 대에는 1t 정도의 냉연강판이 들어가는데, GM대우를 비롯한 국내 자동차 업계의 감산 움직임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 냉연업체로 꼽히는 현대하이스코, 동부제철, 유니온스틸 등은 지난 11월부터 4조 3교대로 돌아가던 교대조 중 하나를 조업 대신 사내교육을 받게 하는 방식으로 감산을 하거나 재고량 감축에 나섰다. 충남 당진 전기로 공장 설비투자로 자금 사정이 다급해진 동부제철은 내년 한 해 동안 과장급 이상 간부 사원과 임원 200여 명이 연봉 30%를 자진 반납하기로 결정했다.
잔업 없어지고 업무 시간에 직원 교육현대·기아자동차에 냉연강판을 공급하는 현대하이스코는 순천공장과 당진공장에서 생산되는 자동차 강판의 생산량을 2만t 안팎 감산에 돌입했다. 생산량 감소로 직원들의 잔업이 사라졌으며, 대신 생산라인의 정밀 점검과 신제품 생산 테스트, 직원 교육 등으로 남는 조업 시간을 메우고 있다. 철강제품 가격 폭락의 여파로 t당 1천달러 정도에 도입한 핫코일로 만든 냉연강판을 700달러대에 판매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연간 1300만t을 생산해 세계 냉연강판 시장의 2~3%를 점유하는 포스코도 자동차 생산 감소에 따른 영향을 받고 있다.
이들 제철·제강·냉연 업체 가운데 누가 불황의 찬바람을 맨 먼저 맞게 될까. 굴지의 대기업들이 기침을 하는 사이, 그 밑에 달린 중견·중소 기업들은 올겨울 고물 줍는 노인들처럼 생존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다.
글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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