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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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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세력의 배반 10년

규모로는 87년 이후 최대지만 감동 없는 ‘연석회의’의 출범,
민주당은 번번이 정치적 타이밍 놓치며 표류해
등록 2008-12-11 15:30 수정 2020-05-03 04:25

84학번, 치열한 1980년대를 지냈던 이에게 12월4일 만들어진 ‘경제·민생 위기 극복을 위한 제 정당·시민사회단체·각계인사 연석회의’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답은 솔직했다.
“정세균은 지지율이 떨어지니까 강하게 나가나 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늘 그랬고. 시민단체들은 촛불도 끝나고 주요 단체 대표가 구속되니까 뭔가 새로운 전기를 찾으려나 보다. 그게 끝이다.”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지난 11월2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에서 굳은 표정으로 나란히 앉아 있는 정세균 민주당 대표(왼쪽)와 원혜영 원내대표. 2008년 한 해의 민주당에 대한 평가는 그들의 표정만큼 굳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지난 11월2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에서 굳은 표정으로 나란히 앉아 있는 정세균 민주당 대표(왼쪽)와 원혜영 원내대표. 2008년 한 해의 민주당에 대한 평가는 그들의 표정만큼 굳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2004년 지지도 정점 찍고 끝없는 추락

이름도 긴 이 기구에는 민주당·민주노동당·창조한국당·진보신당·사회당 등 5개 정당과 대표들이 참여했다. 참여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민주노총,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시민사회단체들도 총망라했다. 이명박 정부에 반대하는, 한시적인 정책연합이라고 했다. 형식적으로 보면, 87년 ‘민주화쟁취국민운동본부’에 버금가는 대연합이다. 4일 연석회의 출범식이 열린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장에는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렸다. 열기는 후끈했다. 모임은 열렸지만, 감동은 없었다. 그들 역시 ‘노바디’였던 탓이다.

박상훈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유럽은 물론 심지어 미국에서도 민주당이 집권하면 중·하층의 소득이 5% 안팎으로 오르고, 공화당이 집권하면 상층의 소득이 올라가는 유의미한 결과가 나타난다”며 “어느 당을 찍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예측이 분명할 때 구성원들은 지지 정당을 정할 수 있게 된다”고 지적했다. 박 대표는 “한국에서는 민주·개혁 세력이 집권했다는 지난 10년간 중·하층의 생활 수준은 더욱 나빠졌다”며 “먼저 지난 10년의 통치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이들이 이에 대한 반성과 자각을 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반이명박 전선’이라는 식의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감동이 없다는 것이다. 서민들에게 지난 10년은 진짜 잃어버린 10년이었다. 2007년 12월 대선을 앞둔 서민들은 노무현과 이명박의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의 지지율 추이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새천년민주당에서 열린우리당이 갈려 나온 것은 2003년 11월이었다. 열린우리당은 2004년 3월26일 50.1%의 지지율로 최고를 기록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 덕이었다. 이때 민주노동당은 6.6%, 민주당은 5.8%를 기록했다. 3당 지지율을 모두 합치면 62.5%에 달했다. 민주노동당에 몰린 때도 있었다. 2004년 5월15일. 민주노동당은 21.9%의 지지율을 기록한다. 이후는 끝없는 추락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를 ‘좌파 신자유주의자’라고 부르며 지지층을 배신했다. 여당은 우왕좌왕했다. 국민은 그 무능력과 무책임함에 경악했다. 상황은 2007년 8월7일 최악에 이른다. 열린우리당에서 갓 이름을 바꾼 대통합민주신당 지지율은 3.2%. 같은 날의 민주노동당(3.9%)과 민주당(4.7%)보다 낮았다. 3당 합계 지지율 11.8%. 2004년 대비 최고치에서 50%가 날아갔다. 이날 한나라당 지지율은 57.2%로 최고를 경신한다.

2003년 (새천년)민주당이 2008년 7월 민주당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7개 정당이 명멸했다. 창당과 해당(解黨)을 거듭하면서 정치적 공간을 확보해온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이 남긴 업보였다. 정치공학 속에서만 움직인 결과다. 지지자들을 위한 배려는 없었다. 2007년 12월 17대 대선 투표율은 63%였다. 이미 37%가 무당층이었던 셈이다. 무당층 50%의 토대는 이때 만들어졌다.

민주당 변천사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민주당 변천사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독주 견제는커녕 협조하고 있다”

지지층에 대한 배신과 무능은 올해도 이어졌다. 이목희 민주연대 정책위원장(전 의원)은 “민주당은 올해에도 촛불 현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정부의 방송사 장악에 대해서는 방송사 앞에서 몇 번 시위하는 것으로 그쳤다”며 “헌법재판소의 종합부동산세 위헌 판결에 대해서도 그날부터 ‘부자 살리기’라는 전선을 펼쳤어야 하는데, 그 타이밍도 놓쳤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당이라는 정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를 벗어난 결과”라고 비판했다. 민주당은 엉뚱하게 김민석 최고위원에 대한 영장 집행 거부, 강만수 장관의 헌법재판소 접촉설 진상 조사, 직불금 국정 조사 등에서 전선을 만들었다.

이종걸 의원(3선)이 민주연대 출범식에서 “민주당이 지난 10년 정권의 기득권 지키기에 병들었던지, 한나라당 정권의 독주를 견제하기는커녕 협조하고 있다. 그들의 ‘밑을 닦아주고’ 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평소 ‘영국 신사’라는 말을 듣던 이종걸 의원이다.

익명을 요구한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김영삼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으면, 그런 상황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판을 만들었을 것”이라며 “야당은 판이 크게 흔들려도 불리할 것이 없는 집단인데, 정치력이 없어 매번 판단 실수를 했다”고 했다.

이목희 위원장은 “예산안 협상에서도 성장률 하락을 반영한 예산안을 내놓으라는 추상적인 제안을 할 것이 아니라, 서민과 중산층을 위해 예산의 30%를 배정한 안을 내놓으라는 식으로 구체적으로 요구해야 전선이 명확해진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의 다른 의원도 “민주주의나 남북관계를 매개로 제 정당과 사회세력이 모이는 것으로 보이면 위험하다”며 “지금 중요한 것은 서민경제이고 민생이기 때문에 여기에만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정치학)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북 문제에 우려를 표시하는 것은 평생의 공적이 훼손될 것을 우려한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면서도 “지금 중요한 것은 서민들의 월급과 무너지는 집값이기 때문에 여기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2004년 이후 정당별 지지율 추이

2004년 이후 정당별 지지율 추이

누가 진짜 계급을 배반했나

유권자들이 자신의 사회·경제적 이익과 일치하지 않는 정당에 투표하는 것을 ‘계급배반 투표’라고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해결을 최우선하는 진보적 정당이 아닌, 부자를 우선하는 한나라당에 투표하는 경우를 말한다. 진보학계에서는 지난 17대 대통령 선거와 18대 총선을 대표적인 계급배반 투표로 꼽는다. 유권자들에 대한 은근한 비난이 배어 있다. 지난 10년간 지지자들을 배반한 것은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이었다는 것을 알면 이런 표현은 이율배반이다.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대표는 연석회의 출범식장에서 “이명박 정부의 폭주를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벼랑으로 몰린 서민들의 삶을 지키는 구체적인 대안을 갖고 실천해야 한다. 야당들은 경제위기에서 가장 크게 고통받고 있는 대중 곁에 선다는 확실한 약속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야당들이 얼마나 지지층의 삶을 지켜낼지 볼 일이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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