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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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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디, 노바디 벗 유

‘한여름 밤의 꿈’을 ‘한겨울의 한파’로 지키는 촛불 시민들, 511일의 투쟁을 마친 이랜드 노동자들…
등록 2008-12-11 14:16 수정 2020-05-03 04:25

2008년 희망의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 경제는 무너졌고, 정치는 무용하고, 시민사회도 흔들린다. 그나마 기대했던 국가의 안전망과 경제의 지반과 가치의 경계가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위기가 언젠가 스쳐갈 경제 위기가 아니라 앞으로도 영속될 삶의 위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도 믿지 못하고,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 ‘노바디’(Nobody)의 시대,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가혹한 현실 앞에서 스스로 희망의 증거가 되는 사람들도 있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스러졌다고 믿는 촛불을 여전히 한겨울의 한파 속에서도 지키는 이들이 있고, 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여름가을, 511일의 거리투쟁을 끝내고 새로운 삶의 투쟁을 시작한 이랜드 노동자도 있다. 2008년의 비바람에 온몸으로 맞섰던 그들이 말하는 무지개 너머의 세상, 당신만이 희망이다.

그들은 그것이 지나간 꿈이 아니라 살아 있는 희망이라고 말한다. 촛불연행자모임 기자회견에 참석한 구준희씨(왼쪽 사진 맨 오른쪽)와 회사쪽과 합의에 이르고 악수를 하는 김경욱 전 노조위원장(오른쪽 사진 오른쪽). 한겨레 신소영 기자

그들은 그것이 지나간 꿈이 아니라 살아 있는 희망이라고 말한다. 촛불연행자모임 기자회견에 참석한 구준희씨(왼쪽 사진 맨 오른쪽)와 회사쪽과 합의에 이르고 악수를 하는 김경욱 전 노조위원장(오른쪽 사진 오른쪽). 한겨레 신소영 기자

세계여행 대신 서울여행

그녀의 이름은 구준희(33). 스스로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말하는 올해엔 ‘오만과 잡소리’라는 새 이름도 얻었다. 다음 아고라에 썼던 필명이 어느새 그녀의 이름에 앞서는 별명이 되었다. 촛불은 그렇게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원래는 옷가게를 운영하는 평범한 비혼 여성이었다. 그 역시 데모는 별난 사람만 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주권도 없이 광우병 소를 먹어야 하는 현실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용기를 내서 광화문 집회로 나섰다. 아직도 선명한 그날의 기억, 2008년 5월2일 청계광장에서 보았던 희망의 세계가 아직도 손끝에 잡힌다. 아, 이렇게 평화로운 방법으로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전하는 방법이 있구나, 그날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그렇게 서른이 넘어 처음 집회에 나가보았고, 서른셋의 한 해를 거리에서 보냈다.

월요일엔 촛불연행자모임 회의와 한국방송 촛불지킴이 집회, 화요일엔 연행자모임 기자회견과 장애인인권선언 가두행진, 수요일엔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시작해 촛불 한 자루 들고 침묵을 지키며 거리를 도는 촛불산책, 목요일엔 YTN 지키기 집중집회, 금요일엔 촛불선전단이 주최하는 문화제 참가. 월화수목금금금, 그의 수첩은 촛불 일정으로 빼곡하다. 더구나 11월부터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에서 ‘촛불백서’ 만드는 일을 함께한다. 겨우 교통비만 받지만, “촛불의 일을 기록하는 자부심”에 행복하다. 앞으로도 인권단체 활동을 계속할 생각이고, 촛불들과 함께 새로운 시민단체를 만들자는 얘기도 가끔 나눈다. 서른이 넘어서 그녀는 그렇게 세상을 보았다.

원래는 옷가게 ‘언니’였다. 지난해 11월 가게를 접고 작가가 되려고 마음을 먹었다. 2008년엔 경험을 쌓기 위해 세계여행을 떠나야지,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5월의 거리에서 그는 다른 세계를 보고 말았다. 잊지 못할 5월의 두 번째 날인 5월24일, 그는 서울에서 야만을 보았다. 촛불집회 최초로 대규모 거리행진이 있었던 이날에, 그는 눈을 의심할 현장을 보았다. 전경의 방패에 찍히고, 곤봉에 맞으며 끌려가는 촛불들을. 그는 망연했다. 신발을 잃어버리고 옷이 찢어져서가 아니었다. 내가 사는 나라의 인권이 이것밖에 되지 않다니, 충격을 받았다. 집·회사·가게만 다니던 시절엔 상상도 못하던 일들이 그의 집이 있는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날의 기억 때문에 “도저히 포기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날의 진압은 촛불들을 그렇게 단련시켰다.

뜨거웠던 오뉴월이 지났다. 가끔은 실망도 했지만, 뜨거운 마음은 좀처럼 식지가 않았다. 오히려 한국방송, YTN, 이길준, 기륭전자, 지켜야 할 가치가 자꾸만 늘었다. 누구는 촛불이 꺼졌다 했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타오르는 촛불들이 많았다. 오히려 더 일상 속으로, 지역 속으로 깊어가는 촛불들이 보였다. 그는 언젠가 계기만 생기면 다시 타오를 촛불의 온기를 여전히 느낀다. 그래서 긴 호흡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즐겁다. 함께하는 촛불들이 있어서 춥지가 않다. 아무리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150만원의 벌금이 날아와도, 당장 먹고살 일이 걱정돼도 2008년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올해 세계여행을 꿈꾸다 서울여행만 했다”면서도 웃는다. 서울여행은 더 넓은 세상을 그에게 안겨주었으므로.

지난한 투쟁 그리고 살신성인

이랜드 노조는 영원히 고유명사가 아니다. 비록 이랜드 노동조합의 파업은 일단락됐지만, ‘이랜드’의 이름을 볼 때마다 우리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얼굴을 떠올릴 것이다. 지난 11월13일 이랜드 노조가 홈에버를 인수한 홈플러스테스코와 노사합의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문득’ 전해졌다. 지난한 투쟁이 끝났다는 기쁜 소식에 마음은 오히려 아팠다. 파업투쟁 마지막까지 남았던 180여 명의 아줌마 노동자들을 다시 계산대로 돌려보내기 위해 12명의 노조 간부는 복직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살신성인이라 불렀다. 이랜드 노조를 이끌었던 김경욱 전 노조위원장도 자신을 버리고 겨울 앞에 섰다.

무엇보다 그리워하는 서로가 있다

12월4일 저녁, 김 위원장은 이랜드 노조 ‘동지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11월 합의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이랜드 노조 일로 바쁘다. 이랜드 노조에서 분리한 홈플러스 노조를 만드는 일을 도왔고, 노사 합의 사항이 제대로 이행되는지도 점검해야 했다. 그는 “연말이 지나서야 내 앞날을 생각해볼 여유가 생기지 싶다”고 말했다. 이랜드 노조를 사랑했던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도 나날이 이어진다. 이날도 그는 “법정에서 울면서 우리를 변호했던” 변호사·노무사들과 만나 회포를 풀었다.

그래도 그는 “해가 넘어가기 전에 타결돼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정규직 출신으로 비정규직 투쟁에 앞장서다 실형까지 살았던 그이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평생 잊지 못할 경험”, 그렇게 단순한 문장에 평생의 무게를 담았다. 비록 그에겐 돌아갈 일터가 없지만, 돌아볼 경험이 있다. 그것이 힘이다. 그는 “실업이라는 극복해야 하는 현실이 있다”면서도 “월급도 못 받는 511일 파업도 견뎠는데, 경제위기야 못 견디겠는가”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그들에겐 그리워하는 서로가 있다. 조합원은 지도부를 그리워하고, 지도부는 조합원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도 이랜드, 그들을 잊지 못한다. 김경욱 위원장도 “농성장에 찾아와 3만원, 5만원씩 쥐어주던 이름 모를 사람들을 잊지 못한다”고 전했다. 그렇게 행동하는 당신만이 희망이다. 원더걸스도 결국엔 “노바디”가 아니라 “노바디 벗 유”(Nobody But You)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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