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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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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철저하게 종속변수야”

중산층에서 되살아나는 IMF 트라우마…
학원비 못 내는 학부모, 펀드 물려 아파트 내놓게 된 무역회사 부장…
등록 2008-11-07 11:05 수정 2020-05-03 04:25

벌써 일곱 달째다. 박현필(40·가명) 원장은 잠시 머뭇거리다 전화기를 들었다. 오늘은 꼭 확답을 받아야 한다.
“경수 어머님, 안녕하세요.” “아, 예, 원장님.” “이젠 어떻게… 가능하시겠죠?” “죄송합니다. …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일곱 달치 학원비 140만원이 밀렸다. 경수 어머니는 가사 도우미, 빌딩 청소부 등 허드렛일을 한다. 근처 공단에서 일하는 남편 월급으로 생계를 꾸리고, 자신의 수입으로 초등학생 아들의 사교육비를 댄다.

주식시장 혼란은 가계 파탄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서민들은 잃어버린 자산을 회복할 길도 마땅치 않다. 서울 잠실의 재건축 아파트 상가 전면에 여러 증권사들의 간판이 내걸려 있다.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주식시장 혼란은 가계 파탄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서민들은 잃어버린 자산을 회복할 길도 마땅치 않다. 서울 잠실의 재건축 아파트 상가 전면에 여러 증권사들의 간판이 내걸려 있다.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학원비 독촉 전화 거는 원장님

그런 경수 어머니가 학원비를 못 낸다는 건 버는 돈이 없다는 뜻임을 박 원장도 잘 안다. 남편이 실직한 것 같기도 한데, 그것까지 캐물어 아는 체할 수가 없다. 돈을 받아야 하는 자신의 입장만 더 곤란해질 것이다. 어쨌건 이대로는 안 된다. “100만원으로 깎아드리죠. 한번에 내기 힘드시면 절반만 우선 주셔도 됩니다.”

박 원장은 경기 시흥시에서 6년째 사설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에서 집을 구하지 못한 회사원들, 시화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부천에서 장사를 하는 자영업자들, 그리고 농사라 할 것도 없는 작은 규모의 논밭에 머리를 파묻고 사는 농꾼들이 이 도시에 모여 산다. “말 그대로 서민들의 도시”라고 박 원장은 말한다.

지난 6년 동안 매일 오후 2시30분이 되면, 박 원장의 학원에는 시흥시 서민의 아이들 140~160명이 몰려와 공부했다. 꾸준하던 그 수가 서너 달 전부터 갑자기 100명 아래로 줄었다. 그 가운데 30여 명은 학원비를 못 내고 있다. 10여 명은 한 달치, 또 다른 10여 명은 두세 달치, 그리고 몇몇은 석 달치 이상을 못 내고 있다. 박 원장으로선 강사 6명, 운전기사 2명에게 주는 인건비 1500만원조차 매달 마련하기 힘들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너 달 전부터 이렇게 됐다”는 사실을 그는 좀체 믿을 수 없다.

20만원 학원비를 받으려고 독촉 전화를 걸어야 하는 박 원장의 처지는 한국 서민들이 겪고 있는 2008년 가을을 웅변한다. 거시경제 이론이나 주요 경제 지표만으로는 온전히 설명하기 힘든 일들이 지금 그들에게 일어나고 있다. 그 사태의 본질을 설명할 단서가 채성수(45·가명) 부장에게 있다.

초등학교 6학년 아들과 3학년 딸을 둔 채씨는 요즘 돈 빌리러 다닌다. 그의 가족은 서울 은평구의 34평 아파트에 산다. 재개발에 들어가면서 4억5천만원까지 집값이 뛰었다. 올여름, 그는 경기 분당의 같은 평수 아파트를 계약했다. 급매물로 나온 8억5천만원짜리였다. 살던 아파트를 팔고 4억원을 더 마련하면 된다는 계산이었다. 무리가 없지 않았지만 이명박 정부가 주도할 부동산 경기를 좋게 봤다. 은행 대출도 받고 친척에게 돈도 빌렸다.

현금이 수중에 들어오자 돈 굴릴 욕심이 생겼다. 두 달 전 1억5천만원을 주식 시장에 넣었다. 그리고 그 주식을 담보로 현금 대출을 받아 다시 주식을 샀고, 같은 방법으로 한 번 더 대출을 받아 역시 주식에 투자했다. 그런 식으로 모두 2억5천만원어치 주식을 샀다. 집 살 돈으로 주식을 하는 일이니 그래도 안전한 쪽을 택했다. 포스코, 현대자동차 등 최고 우량주만 골라 샀다. 은행 이자보다 높은 이익을 남기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 두 달 사이 대기업 우량주들이 바닥을 거듭 쳤다. 두 달 안에 원리금을 갚는 게 주식 담보 대출의 조건이었다. 주가가 폭락하자 증권회사는 빚 대신 주식을 반대매매해 모두 회수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처음 주식에 넣었던 1억5천만원과 주식 담보 대출 1억원까지 사라졌다. 그래도 빚이 남아 카드로 돌려막고 있다.

인천 남동공단에 자리한 한 공장 건물이 임대할 주인을 찾고 있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인천 남동공단에 자리한 한 공장 건물이 임대할 주인을 찾고 있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채 부장의 금융·부동산·도산·실직 사중고

더 큰 문제는 분당의 아파트다. 지난주 그는 마지막 잔금 1억5천만원을 치르지 못했다. 3주일만 미뤄달라고 사정했다. 애초 기대했던 부동산 경기 호황은 물 건너간 것처럼 보이지만, 이제 와서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찌됐건 돈을 구해야 하는데 은평구의 아파트는 팔릴 기미가 전혀 없다. 4억5천만원까지 올랐던 아파트를 3천만원 깎아 내놓은 상태다.

그 사이 그가 다니는 무역회사는 직원들을 내보내고 있다. 잘나갈 때는 직원이 20여 명에 이르렀지만, 지난해 말부터 올여름 사이 하나둘 사표를 냈다. 지금은 사무실에 3명만 출근한다. 사장과 전무, 그리고 채 부장이다. 300만원의 월급조차 제때 나오지 않는다. 금융시장 혼란, 부동산 경기 침체, 기업 도산 위기, 실직 위협 등에 걸친 사중고 속에서 채 부장은 길을 찾고 있다. 그리고 채 부장의 악몽 같은 가을을 임금 생활자 상당수가 공유하고 있다.

“2천만원짜리 적금이 만기가 돼서 찾으러 갔지요. 창구 여직원이 펀드에 들라는 거예요. 마침 장이 좋았어요. 솔깃했죠. 2천만원은 적으니까 3천만원 대출을 얹어서 넣으라고 하대요. 손해보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2006년이죠. 지금 그 펀드 수익률이 마이너스 40%입니다. 쪽박 차게 생겼어요.”(39살의 ㄱ씨)

“앞으로 길어야 3년 버티겠다 싶었어요. 직장 그만두면 삽겹살 집이라도 해야겠다 생각했죠. 가진 건 1억5천만원짜리 집 한 채라 담보 잡히고 1억원을 빌렸어요. 대우조선 같은 우량주만 샀어요. 3년 뒤에 가격이 오르면 창업자금으로 쓸 생각이었죠. 지금은 반의 반토막 났어요. 월급 받아 대출 이자만 넣고 있죠. 회복 안 되면 집까지 날아가는 거죠.”(44살의 ㄴ씨)

“사원 아파트에 살면서 맞벌이를 했어요. 10년을 꼬박 모아 2억원을 만들었죠. 마침 청주에 분양 나온 게 있어서 사려 했더니 돈이 조금 모자라요. 아파트는 가격 떨어지고 나면 사라, 차라리 그 돈으로 펀드를 해라, 주변에서 그러더라고요. 해외 펀드가 수익률이 높다고 해서 베트남 펀드, 중국 펀드 등으로 옮겨다녔죠. 지금 7천만원 남았어요.”(33살의 ㄷ씨)

근심은 털어놓지 않아도 티가 나는 법이다. 김희철(40·가명) 부장이 일하는 자동차 부품 수출 무역회사에선 요즘 때아닌 퇴직금 중간 정산 바람이 불고 있다. “근로기준법상 중간 정산을 해달라고 하면 회사는 무조건 해주게 돼 있거든요.” 가뜩이나 자금 운용이 어려운데 퇴직금까지 내주려니 사장은 속이 많이 쓰린 눈치다. 불황이 본격화되면 그런 ‘밉상’들이 구조조정 1순위라는 걸 모르지 않지만, 직원들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당장 갚아야 할 빚 때문이다.

“드러내놓고 말을 못해서 그렇지 주식 투자 안 하는 월급쟁이는 없다고 봐야죠. 내 돈으로 했는지 빌려서 했는지만 다를 뿐이죠.” 주식으로 날린 대출금을 퇴직금으로 메우면서 회사를 그만둘 걱정까지 하는 그들을 보며 김 부장도 착잡하다. 그는 1997년 구제금융 사태의 한복판에 있었던 기아자동차에서 일했다. 1995년 입사해 1999년에 그만뒀다. 그가 입사 3년차이던 97년 7월, 기아자동차는 부도가 났다. 97년 11월 외환위기의 서막이었다.

당시 그는 퇴직금 1500만원을 자동차 구입대금으로 썼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입사 직후 사원우대 혜택을 받아 기아 승용차를 샀는데, 퇴직하는 경우 잔금을 일시불로 갚게 돼 있는 사규에 따라 그 돈을 모두 내놓아야 했다. 경영진이 권유해 월급으로 사모은 회사 주식 1천만원어치는 주가 폭락과 뒤이은 감자로 인해 20만원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5년 동안 일해 건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금융위기에 뒤이은 기업도산 그리고 인력 감축에 대한 공포가 그에겐 있다. 97년의 위기는 그의 직장을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바꿔놓았다. 김 부장의 ‘트라우마’다. “게다가 그땐 20대였지만 지금은 40대잖아요.”

지난 10월10일 서울 회현동 우리은행 본점 앞에서 펀드 가입자들이 은행 쪽에 항의하는 모임을 갖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지난 10월10일 서울 회현동 우리은행 본점 앞에서 펀드 가입자들이 은행 쪽에 항의하는 모임을 갖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대기업·중소기업, 경기 체감 양극화

97년 외환위기 이후 임금 생활자들에게 불어닥쳤던 실직의 트라우마는 이미 중소기업에서 재현되고 있다. 인천 부평공단 ㄷ정밀은 국내 자동차 기업에 엔진 부품을 납품해왔다. 한 달 전부터 주문이 절반으로 줄었다. 그 과정에서 원래 20명이던 직원이 15명으로 줄었다. 내보낸 건 아니지만 “나가는 사람 잡지 않고, 나간 자리 그냥 놔둬서” 생긴 일이다.

그나마 15명은 매주 2~3일씩 번갈아 쉬고 있다. 잔업은 당연히 없다. 지난주 그들은 줄어든 근무 시간만큼 줄어든 월급을 받았다. 조만간 몇 명이 더 나갈 것으로 성유혁(67·가명) 사장은 짐작하고 있다. 나이도 있고 해서 하는 데까지 하다가 그만두자고 성 사장은 마음먹고 있다. 그렇게 되면 남아 있던 직원들까지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그는 ‘종속변수’라는 표현을 썼다. “방법이 없잖아. 무슨 대책이 나올 수 있나. 덜 먹고 덜 쓰는 수밖에. 우리는 철저하게 종속변수야. 수학 배웠죠? 종속변수….”

중소기업에 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그 기업주들이 종속변수가 되는 사태에 대해 박은옥(47·가명) 전무도 할 말이 있다. 그는 1988년 이후 서울 성동구 성수공단에서 줄곧 소기업을 경영해왔다. 97년의 외환위기도 성수공단에서 치렀다. 소규모 부품업체들이 밀집한 성수공단의 산 증인이다.

“그때는 대기업들이 주로 타격을 받았다”고 박 전무는 말했다. 성수공단의 공장들은 그런대로 잘 돌아갔다. 환율 때문에 대기업들은 타격을 받았지만 98년 이후부터는 내수 경기가 괜찮아서 공단 분위기가 좋았다는 게 그의 기억이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요. 대기업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여기엔 일거리가 없어요. 이 공단에서 97년 외환위기 때 감원한 경우는 거의 없었거든요. 지금은 절반씩 인력을 줄이고 있어요. 경기 포천 공단은 넉 달 동안 열에 서넛이 문을 닫았대요. 여기도 곧 그렇게 될지 모르죠.”

그러나 같은 임금 생활자라 해도 2008년과 1997년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대기업 직원들이다. 업종과 기업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이들 대부분은 사태의 다른 면을 보고 있다.

정기혁(38·가명) 과장도 11년 전의 외환위기를 기억한다. 1998년 2월 대기업 계열 건설사 공채에 합격했는데, 입사 직후 3년차 이상 임직원들이 줄줄이 쫓겨나는 것을 지켜봤다. “인사팀에서 한 사람씩 조용히 불러 내보냈다”고 그는 회고했다. 사원 연수 때 취침 시간에 고스톱을 치다가 들킨 일이 빌미가 된 경우도 봤다. 전체 임직원의 10% 정도가 그만둔 것으로 정 과장은 추측한다.

“그래도 외환위기 때하고 지금은 비교할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그 역시 1억원을 들여 투자한 주식이 3천만원으로 떨어졌다. 은행에서 빌린 6천만원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도 이자를 감당 못할 정도는 아니죠. 연봉이 6천만원 정도니까. 넉넉하진 않지만 지출과 수입을 딱딱 맞춰 살 수는 있어요. 이자를 꼬박꼬박 내는데 원금을 상환하라고 은행에서 독촉할 리도 없고.”

결정적으로 그는 인력 감축에 대한 두려움이 그다지 없다. 부동산 경기침체 속에서도 그의 회사는 업계 상위를 달려왔다. 11년 전의 기억은 그에게 공포가 아니라 신뢰의 기초가 됐다. “그때는 대기업에 부실이 많았지요. 그 뒤로 내실을 키웠고. 위험관리도 늘 해왔고…. 게다가 그동안 직원을 많이 뽑은 적도 없어요. 제가 회사에선 허리급이기도 하니, 앞으로 10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보통신 분야의 대기업에 다니는 서수길(35·가명) 팀장의 가계 사정도 비슷하다. 맞벌이를 하는 서 팀장은 한 달에 650만원 정도 번다. 은행 이자 150만원, 생활비 250만원을 제하고 나머지 200만원은 저축하거나 대출금을 갚는 데 쓴다.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외환위기 때와는 다를 것이라고 그도 짐작한다. “97년 이후 대기업이나 제1금융권의 재정 운용은 오히려 건전해졌거든요.” 그가 다니는 회사는 최근 유동성 관리와 비용 절감에 들어갔지만, 인력 감축이 이뤄질 기미는 전혀 없다.

1997년 외환 위기 직후, 사설 교육기관이 퇴직자를 위한 재취업 및 창업 상담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기자

1997년 외환 위기 직후, 사설 교육기관이 퇴직자를 위한 재취업 및 창업 상담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기자

월급 삭감당한 하청업체 비정규직

그러나 대기업에서 일한다고 모두 이와 같은 것은 아니다. 쌍용자동차에 다니는 김운산(41)씨는 한 달에 120만원을 번다. 그는 사내 12개 하청업체 가운데 한 곳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이다. 김씨는 다음달부터 90만원의 월급을 받는다. 그가 다니는 쌍용자동차가 구조조정을 실시하면서 비정규직의 상당수를 내년 9월까지 휴직 처리했다. 그때까지 김씨는 평균 임금의 70%만 받을 수 있다. “내년 9월 이후에 대한 보장이 없으니 사실상 나가라는 이야기”라고 김씨는 말했다.

원래 서울 용산에서 컴퓨터 가게를 했던 김씨는 97년 외환위기 때 장사를 접었다. 그러다 2003년 살던 집을 팔아 빚을 갚고 경기 평택으로 이사했다. 2004년 봄부터 쌍용자동차에서 조립공으로 일했다. 아내는 서울 친정에 기거하면서 전산소모품 가게를 열어 생활비를 거들고 있다. 부부는 주말에만 만난다.

김씨 앞으로 들어둔 보험금 11만5천원, 은행 대출 이자 30만원, 초등학교 5학년 딸 학원비 20만원은 매달 나가는 고정 지출이다. 지금까지는 나머지 50만~60만원 정도로 생계를 꾸려왔다. 적금이나 펀드 같은 건 꿈도 꾼 적이 없다. 이제 90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게 되면, 그리고 그 월급조차 받지 못하게 되면, 김씨는 딸 학원비 지출을 줄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의 아내는 학원 원장에게 독촉 전화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2007~2008 비임금근로자 변동
주변부가 먼저 위기 떠안네


지난 10월30일, 통계청이 흥미로운 자료를 내놓았다.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비임금근로자’의 변동에 대한 내용이었다. 1인 이상 근로자를 고용한 고용주, 임금을 받지 않고 가족사업체에서 일하는 무급가족종사자, 그리고 혼자 사업체를 운영하는 자영자 등이 비임금근로자다.
조사는 지난해부터 시작됐다. 올해 처음으로 ‘비교 가능한’ 수치가 나왔다. 정인숙 통계청 팀장은 “구조조정의 여파가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살펴보려는 게 조사의 목적이다. 특히 고용주 변동은 사실상 중소기업주의 변동 상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소기업과 자영업 분야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이 자료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지난해 8월 이후 1년 동안 전국의 고용주는 154만7천 명에서 150만5천 명으로 줄었다. 적어도 4만 명이 넘는 중소기업주들이 사업을 포기하거나 직업을 바꾼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같은 기간 자영자는 457만7천 명에서 453만 명으로 감소했다. 1년 사이에 4만7천 명이 줄었다. 반면 무급가족종사자는 145만1천 명에서 147만8천 명으로 오히려 2만7천 명 늘었다.
비임금근로자 변화

비임금근로자 변화


산업별로 살펴보면 제조업 고용주(3만 명 감소), 광공업 고용주(2만9천 명 감소), 건설업 고용주(2만9천 명 감소)가 특히 줄었다. 자영자 가운데는 농림어업(3만8천 명 감소), 건설업(1만1천 명 감소), 제조업(8천 명 감소), 광공업(8천 명 감소) 분야의 감소폭이 컸다. 제조업·건설업·광공업을 중심으로 중소기업과 자영업 분야의 ‘퇴출’이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늘어난 것은 도소매·음식숙박업 고용주(1만8천 명 증가), 서비스업 고용주(1만2천 명 증가), 서비스업 자영자(1만4천 명 증가) 등이다. 이 분야는 실직자 또는 퇴직자들이 주로 뛰어드는 시장이다.
중소기업과 자영업의 동반 추락은 곧바로 서민 또는 중산층의 실직으로 이어진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경제위기의 차이도 여기에 있다고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지적한다. “1997년 외환위기 때는 국민 전체가 함께 극복하자는 분위기가 있었다. 대기업 구조조정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10년간 노동시장이 대기업 정규직을 비롯한 중심부와 중소기업 노동자 및 비정규직의 주변부로 뚜렷이 구분돼버렸다. 이런 구조에서는 경제위기를 주변부가 먼저 떠안게 돼 있다. 97년은 국민 전체의 위기로 받아들여졌지만, 이번에는 이들 주변부 사람들의 위기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이들은 조금만 삐끗해도 바닥으로 추락한다.”
금융시장의 최근 혼란은 ‘주변부 사람들’에겐 치명적 쇼크였다. 고용불안 속에서 주식·펀드·부동산 등의 자산 증가에 유일한 기대를 걸었다가 그마저도 배반당했기 때문이다. 김기원 한국방송통신대 교수(경제학)는 장기 침체와 이로 인한 중산층 붕괴를 조심스레 예측했다. “97년 외환위기 때는 재벌과 금융기관 부실이 문제였다. 지금은 수백만 가계의 부실이 문제다. 주식과 부동산 자산이 폭락하고, 내수 시장이 침체하고, 이것이 임금 저하와 일자리 상실로 이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다시 내수 시장 침체가 장기화될 가능성도 있다.”
중소기업들은 경기침체의 영향을 1분기 정도 뒤에 받게 된다고 최윤규 중소기업중앙회 팀장은 설명한다. “12월과 1월을 더 지켜봐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서민들의 위기는 이제 겨우 1막이 끝났을 뿐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안수찬 기자 ahn@hani.co.kr·이순혁 기자 hyuk@hani.co.kr·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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