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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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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계획을 못 잡겠네

초긴축 경영 준비하는 대기업들…
쌍용차는 휴직 실시, MB 정부 최대 규모인 GS칼텍스 고도화 시설 투자 지연
등록 2008-11-04 11:19 수정 2020-05-03 04:25

“내년 경영계획? 환율도 아직 못 잡는 판인데, 캄캄한 밤중에 길을 찾고 있다고 써줘.” 매출액 순위 20위권 이내인 A그룹의 박아무개 이사는 “웬만하면 우린 (기사에서) 빼달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안정적으로 자금을 운용하되, 신규사업은 공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라는 판에 박힌 설명뿐이었다. ‘익명으로 쓰겠다, 회장께서 재계의 상징 인물 아니냐’고 치켜세운 다음에야 박 이사가 선심 쓰듯 한마디를 던졌다. “그저께 사장단회의에서 한 말씀 하셨지. 지금은 전세계적 쓰나미다, 내년 하반기 회복은커녕 3~4년은 갈 거다, 그러니 다운사이징으로 위기에 대비하라고.” 대외적으론 못 밝히지만, 인력을 줄이고 돈 안 되는 사업부문을 정리하는 등 초긴축 경영을 준비하고 있다는 힌트였다.

쌍용자동차는 최근 경영 악화를 이유로 유급 휴직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경기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의 현장 생산라인. 연합 신영근

쌍용자동차는 최근 경영 악화를 이유로 유급 휴직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경기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의 현장 생산라인. 연합 신영근

SK텔레콤, 중국 법인 독립 방안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시절의 기억이 금융위기를 맞은 한국 기업들에 경험이라는 든든한 밑천이 될까, 아니면 기업활동을 위축시키는 ‘트라우마’로 작용하게 될까. 한창 내년 사업계획을 준비 중인 대기업들 상당수가 ‘마른 수건 짜내기’식 예산을 짜는 한편, 내수업종으로 중심으로 정리해고와 사업부문 분사 등을 준비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내수·수출 동반 경기침체가 점쳐지는 상황에서, 내년 신규 채용 동결 등 비상 경영체제를 선언하고 나선 사례들도 보인다.

금융위기에 따른 수출·내수 감소의 충격을 온몸으로 체감하는 분야는 통신·전자 업종이다. 지난여름 미국 합작법인 힐리오의 지분을 매각해 현지 이동통신 시장에서 철수한 바 있는 SK텔레콤은 최근 그동안 자회사로 뒀던 중국 법인을 독립시키는 방안까지 검토 중이다. 이렇게 되면 인력·비용 등을 개별적으로 운용하게 돼 사업청산 절차가 쉬워질 수 있다. KT는 내년 감산·감원 계획은 없다지만 매출 축소 우려와 신성장동력 확충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삼성전자나 LG전자의 경우는 말을 아끼고 있지만, 앞으로 매출이나 이익 규모가 축소되면 투자도 위축되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안팎에서 나온다. 남용 LG전자 부회장은 지난 10월 초 “기업경영에서 현금이 중요하다. 우리가 가진 재고 물량이나 채권 등은 묶여 있는 현금이어서 기업경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동차 산업은 소비 위축과 고유가의 직격탄을 맞았다. 쌍용차는 외환위기 이후 10년여 만에 국내 완성차 업계에선 최초로 경영 악화에 따른 휴직을 실시한다고 최근 밝혔다. 회사 쪽은 ‘임금의 70%만 지급하고 1~3개월 휴직을 권고하는 안식월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적용 대상은 일단 관리직 직원 2500여 명 중 20~30% 정도인데, 상황이 더 악화될 경우 무급 휴직으로 전환할 가능성도 열어뒀다. GM대우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마이클 그리말디 사장은 지난 10월29일 제주도에서 열린 신차 발표회에서 “글로벌 수요 감소에 따라 주말 특근 등 생산 일정 조정은 불가피하며, 특히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내년 신규 채용을 일절 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패션 중소업체에서는 구조조정도

연초 세웠던 투자 계획을 축소·보류하는 움직임도 확인된다. GS칼텍스의 협력업체들은 당장 올 10월부터 시작할 예정이던 고도화 시설 증설 뼈대공사가 내년 봄으로 미뤄졌다고 전했다. 값싼 벙커C유를 고부가가치 유류로 바꾸는 GS칼텍스의 고도화 시설은 3조원 안팎이 들어가기 때문에 MB 정부 출범 뒤 진행 중인 기업 투자로는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이에 대해 GS칼텍스는 “당초 계획대로 투자가 진행되고 있다”고 반박했다. 하이닉스는 올해 신규투자 계획분 3조6천억원을 이미 2조6천억원으로 줄인 데 이어 미집행분 2천억원에 대한 투자 동결을 검토 중이다. 하이닉스는 내년 신규투자를 올해보다 최대 1조원 정도 줄일 예정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쏟아져나온 대기업 해고 인력들은 이후 자영업자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몰락의 길을 걷거나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면서 사회 양극화를 심화하고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 주요 원인이 돼왔다. 이번에도 금융·실물 복합위기가 거론되는 시점이지만 한국에선 아직 ‘정리해고’나 ‘명예퇴직’의 칼바람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는 것일까. 10년여 전 기업의 초급 또는 중간간부로서 동료와 선후배들의 해고와 재계 질서의 재편 과정을 지켜봤고, 이제는 기업 의사결정 라인에 접근할 만큼 성장한 40대 후반~50대 초반 임원들의 목소리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에선 “경제계의 질서가 재편되는 중이라 ‘생존’과 ‘인수·합병 등을 통한 성장동력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하는 위기이자 기회”라고 진단하고, 다른 한편에선 “고용 측면에서 보면 수출쪽은 좀 여유가 있더라도 내수업종을 중심으로 당장 심각한 한파가 올 것”이라는 우려를 내비친다.

섬유·패션 대기업 B사의 최아무개(52) 이사는 경영계획을 묻는 질문에 긴 한숨으로 대꾸했다. “이달 초, 딱 11년 만에 구조조정 소리를 다시 하게 됐어요.” 부채 비율도 250% 미만이고 올해 수출도 좋았지만, 내년 생산량을 25% 줄일 계획이라 감원이 불가피했다고 그는 말했다. 해마다 1천만 벌 이상의 니트 의류를 수입하던 미국 유통업체가 발주를 계속 늦추고 있고, 중국을 비롯한 신흥시장에서의 판매도 장담하기 힘든 형편이 됐다는 설명이다. 조직 통폐합으로 남는 영업팀원들은 퇴사시키되 대리점 창업을 지원해주기로 했지만, 이들 중 몇 명이 시장에서 살아남을지는 장담하기 힘들다. 패션업계 중소업체들은 이미 무너지기 시작해 지난 9월엔 마리끌레르·이지엔느 등 브랜드를 거느린 패션네트, 남성 신사복 트래드클럽, 유아복 브랜드 베이비헤로스가 부도를 맞고 백화점 매장 등에서 철수한 상태다.

이제 법정관리를 통과했는데…

건설 관련 업체들의 상황은 어떨까. 11년 전 부도를 맞은 뒤 지난해에야 법정관리의 긴 터널을 통과한 매출 500억원대 건설자재 업체 C사에 전화를 걸어봤다. 회사가 무너지자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재생위원회’를 꾸려 채권자들을 설득했고, 이후 암울한 법정관리 기간 중에도 대다수 생산직 노동자들이 회사를 떠나지 않아 ‘노사상생 실천’의 사례로 꼽히는 기업이다. 한 번 시련을 극복해봤으니, 이번 위기에도 슬기롭게 대처하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수화기 너머로 들린 이아무개 회장의 첫 마디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금 대형 건설사들에 큰 로펌들이 10여 개씩 들어가서 구조조정이냐, 법정관리냐 분석하는 중이라고 들었어요. 그 회사들이 부도가 나면 납품업체나 자재 대리점들은 추풍낙엽 신세가 되는 겁니다. 지금도 건설업체에 특정 품목을 납품하는 설비사들이 잇따라 부도가 나서 전국 1천여 아파트 건설현장 중 100곳 이상이 공사에 차질을 빚는 판이에요. 내수업종이라는 특성은 있겠지만, 지금 우리는 외환위기 때처럼 (눈앞이) 캄캄합니다. 내년 사업계획을 어떻게 잡겠어요.”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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