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02년 1월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불량국가’(Rogue State)라고 했다. 이란과 이라크, 시리아도 한 묶음이었다.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의 이념을 위협하고, 세계 평화와 공존을 위협하는 국가들이라고 했다. 그런 기준이라면 지금 불량국가 리스트에 두 나라가 추가돼야 하지 않을까. 금융불안를 만든 미국과 식품불안 주범 중국. 두 ‘신불량국가’는 시장경제의 기본 질서인 ‘신용’을 추락시키고, 세계 평화와 공존의 근간인 ‘건강성’을 해치고 있다. 현재의 슈퍼 파워와 미래의 슈퍼 파워가 불량품이 돼버린 이유. 그 근간에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있다.
우석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미국발 금융위기의 원인을 ‘폭탄 돌리기’라고 표현했다. 그는 “미국의 투자은행(IB)들이 만들어낸 ‘파생상품’은 부도 위험이 높은 부실 채권을 외피만 바꿔 계속 유통시킨 것”이라며 “이런 불량 금융상품들을 만든 미국이 바로 불량국가”라고 말했다.
부시 정부는 경상수지 적자와 재정적자에 시달리면서도 저금리 정책과 감세 정책을 고수했다. 낮은 금리와 낮은 세금은 소비를 촉진하고, 결국 경제를 살릴 것이란 논리였다. 낮은 이자율은 서민들의 ‘모럴 해저드’를 최대치로 올렸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표재우(41)씨는 지난 2004년 어바인 인근의 단독주택을 38만달러에 샀다. 집을 담보로 하면 은행들은 시세의 90%까지 대출해줬다. 그 돈으로 집을 고쳤다. 65만달러에 팔았다. 지난해 60만달러짜리 주택을 샀다. 또다시 돈을 빌렸고 리모델링했다. 차도 바꿨고, 고급스런 가구도 들여놨다. 지금은 살 사람이 없다. 표씨는 요즘 한숨만 내쉴 뿐이다.
미국의 투자은행들은 이런 부실 주택대출들을 묶어 새로운 금융상품으로 팔았다. 전체 10개 중 4개가 부도나도 6개만 살아나면 남는 장사란 논리였다. 규제는 없었다. 미국 정부는 금지된 금융상품 몇 개만 제외하고는 모두 허용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른바 네거티브 규제다. 신자유주의가 예찬하는 ‘탈규제’ 논리에 충실했다.
중국도 한몫을 했다. 값싼 중국산 공산품과 식료품은 미국의 물가 상승을 막았다. 금융 호황의 토대는 안정된 물가다. 미국민들의 신자유주의적 ‘올인’을 부추긴 것은 중국의 가격 파괴였다. 중국의 낙농업자들은 가격을 낮춰도 돈을 벌 수 있게 물 탄 우유에 멜라민을 섞었다. 정부 당국의 단속과 규제는 없었다. 멜라민이 들어간 중국산 독극물 분유는 미국의 비우량 주택담보 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와 이렇게 연결된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원인은 ‘탈규제’이고, ‘멜라민 분유’로 전세계를 긴장시키고 있는 중국산 식품 불안의 이유는 ‘무규제’인 것이다. 미국 정부는 의도적으로 자본 통제를 풀었고, 중국 정부도 성장을 핑계로 손을 대지 않았다.
중국 상하이에서 10년째 요식업을 하는 박준욱(43)씨는 “중국 시장에서는 단속이 없다. 경쟁업체들도 가짜를 신고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가짜 상품을 만드는 기업의 성공 확률이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정상적인 물건을 만들어 적은 이윤에 만족하기보다는 가짜 상품을 만드는 것을 선호한다”고 덧붙였다. 대다수 중국인들이 미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이 이런 경향을 부추긴다. 빨리 돈을 벌어 안정되고 싶은 것이다.
근본적 위기 처한 ‘미국식 길’ 곤란우석훈 연구위원은 “지금 위기의 본질은 불신”이라고 말했다. 신뢰의 근간은 책임감이다.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철학자 하이에크는 시장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도덕적 기초는 책임감이라고 했다. 책임감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도덕성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중국에도 ‘무신불립’(無信不立)이란 말이 있다. 신뢰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상인 정신에 투철했던 중국민들은 신용을 제일의 가치로 여겼다. 자본의 속성은 늘 이런 가르침을 배신한다. 카를 마르크스는 에 다음과 같이 썼다. “자본은 적정액의 이윤이 있으면 대담해지기 시작한다. 10%의 이윤이 있으면 자본은 여러 곳에서 쓰이기 시작하고, 20%의 이윤이 있으면 자본은 적극적이 되고, 50%의 이윤이 보장되면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다. 100%의 이윤이 있으면 자본은 인간의 모든 법률을 무시하며, 300%의 이윤이 있으면 어떠한 범죄도 마다하지 않는다. 심지어 교수형의 위험까지 감수한다.”
미국의 금융위기는 짧은 시간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의 상처를 아직 가지고 있고, 일본은 90년대 초반 거품 붕괴의 후유증을 지금도 호소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위기에서는 미국이 유일 강대국의 지위를 잃게 될 가능성이 높다.
정치컨설턴트인 김윤재 미국 변호사(법무법인 자하연)는 “미국 경제는 붕괴된 제조업의 공백을 금융산업으로 대신해왔다”며 “금융산업에 위기가 온 것은 미국이 근본적인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석훈 연구위원도 “유럽연합(EU)의 유로화가 최근 몇 년간 지속적으로 강세를 보여온 점을 주목해야 한다”며 “유로화가 달러화의 기축통화 기능을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기축통화의 기능을 공동으로 수행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김대중·노무현 행정부가 추구해왔던 ‘미국식’의 길을 계속 갈 것이냐는 문제제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안재흥 아주대 교수(정치외교학)는 “국제시장에서 한국 기업이 경쟁력이 있는 부문은 독일이나 일본, 스웨덴처럼 중화학 분야와 정보통신 분야의 제조업”이라며 “그런데 금융과 서비스에 치중한 미국식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추구하다 보니 비대칭적 문제가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식 경제체제에서 기업은 고용보다는 재무 건전성을 높이는 데 주력해야 한다. 주주의 이익을 만족시키기 위해 단기적 이익에 집착한다. 그 결과 장기적 투자보다는 단기적 성과에 치중하게 되고, 고용도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을 선호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김윤재 변호사는 “신자유주의보다 더 위험한 것은, 이미 미국식 시스템은 대안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는데 우리 사회의 주류에서는 계속 미국식을 고집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2004년 미국 민주당 내 경선에 아시아계 참모로 참여한 경력이 있는 대표적인 미국 정치전문가다. 김 변호사는 “미국 이외의 대안을 모색할 것인지, 미국이 결정하는 선택을 따라갈지 두 가지 대안이 있을 것”이라며 “현재로서는 우리 사회의 주류가 후자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
대안적 통상 모색하는 시민단체 준비보수 인사들은 미국식 위기는 한국에 오지 않는다고 단언하고 있다. 투자은행 제도가 발전하지 않아 미국 투자금융의 줄도산에서도 피해가 크지 않았다는 논리다. 이인실 서강대 교수(경제대학원)는 보수적 싱크탱크인 ‘한반도선진화재단’ 홈페이지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세계 유수의 금융기관들이 파산하거나 위기에 처한 모습에서 교훈을 얻지 않고 이를 이념적으로 연결시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며 “내년부터 시행될 자본시장통합법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주장하면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오는 것”이라고 우려를 표시했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의 금융환경은 미국과는 다르다”고 단언하면서 “우리 금융시장에서 투자은행 기능은 은행과 함께 금융시장의 중요한 축으로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확장돼야 할 기능”이라고 주장했다. 규제 완화를 통해 금융시장의 자율성은 높여가면서 감시·감독을 강화하면 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규제를 완화하면서 감시·감독을 강화한다는 논리는 형용모순이다.
정부는 한술 더 떠서 10월10일 이전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겠다는 방침을 10월1일 밝혔다. 불난 집 옆으로 이사가자고 재촉하는 꼴이다.
정부와 보수 진영에 대책이 없다면, 진보 진영이 답을 내놔야 한다. 일부 진보 진영에서는 이론적 토대와 조직을 바탕으로 한-미 FTA 저지에 나서자고 준비 중이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와 신범철 경기대 교수, 최재천 변호사(전 의원) 등이 중심이 되어 ‘(가칭) 국제통상센터’ 출범을 준비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유무역을 넘어설 대안적 통상 시스템을 내놓는 시민단체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해영 교수는 “지난해의 한-미 FTA 반대운동은 조직적·이론적 중심 없이 각 개인과 단체들이 파상적으로 벌여왔다”며 “이제는 연구와 운동을 함께할 단체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무조건 미국화의 길을 고집하는 방향타를 바꾸자는 논의도 고개를 들고 있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최태욱 한림대 교수, 안재흥 아주대 교수 등이 적극적이다. ‘새로운 코리아 구상을 위한 연구원’(www.knsi.org)이 중심단체다. 이들의 생각은 한국의 경제체제가 미국이 아닌 유럽식, 혹은 일본식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의 합의를 바탕으로 자본과 노동, 그리고 정치가 합의해서 경제를 이끌어가는 ‘조정시장 경제체제’를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최태욱 교수는 “노·사·정이 공동의 위험에 대한 위기의식을 공유했을 때 합의정치가 이뤄진다”며 “미국과 중국이 동시에 흔들리는 지금이야말로 노·사·정이 손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다. 이들은 합의의 정치를 위해서는 정치체제도 일방적인 대통령제 대신 절충이 가능한 내각제가 필요하고, 국회의원 선출도 현재와 같은 소선거구제를 중대 선거구제로 바꿔야 한다고 본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대변할 정당들이 각자 자리를 잡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경제는 이렇게 정치권력의 문제로 귀결된다. 미국의 진보학계를 대표하는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신작 에서 “경제적 변화가 정치적 변화를 이끈다는 명제는 사실이 아니”라고 술회하고 있다. 오히려 정치가 경제를 주도한다는 것이다.
경제는 정치권력의 문제로 귀결‘동북아허브론’ ‘동북아중심지론’이라는 지역적 협력의 초점도 동아시아 전체로 확대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도 나온다. 최태욱 교수는 “한·중·일 중심으로 묶자는 동북아 중심 국가론의 지향은 결국 미국과의 경제 통합”이라며 “미국 중심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공동체론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동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블록으로 묶고, 중국이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전에 그 일원을 묶을 수 있다면 미국발 경제위기의 위험을 분산하고, 중국에서 발생하는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현재와 같은 멜라민 사태가 다시 발생하면, 동아시아 전체가 중국의 식품안전 기준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도록 간섭할 수 있게 되는 식이다. 최 교수는 “동아시아 전체에서 경제적 규모로도 중간을 차지하고, 정치적 이해관계에서도 중간적인 한국이 전체를 묶을 수 있는 코디네이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뻔한 말이지만, 위기는 기회다. 단, 미래를 내다보고 새로운 것을 상상하는 쪽에만 기회다. 그렇지 않으면 위기는 몰락이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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