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금융위기가 구제금융을 통해서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파생상품이라는 ‘판도라 상자’가 열렸기 때문이다. 미국발 신용위기는 ‘부동산’이란 뿌리를 ‘유동화’란 줄기가 흔들어대고 있는 형국이다. 파생상품은 본디 그 뿌리인 기초자산의 위험을 회피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파생상품은 제조자의 취지와는 무관하게 처방자에 의해 투기로 전용되고 판매자에 의해 남용되고 구매자에 의해 오용됐다. 그 결과 덩치가 엄청나게 커지고 관계도 복잡하게 뒤얽힌 ‘괴물’로 둔갑했다. 미국은 이런 ‘불량상품’을 수출해 순진한 아시아 국가에까지 위험을 전가시켰다는 점에서는 성공했다. 월가의 투자은행들을 차례로 쓰러뜨린 파생상품 신용부도스와프(CDS)도, 바다 건너 한국의 중소기업을 KO패 직전으로 몰아가고 있는 키코(KIKO)도 겉포장은 모두 위험을 보장하는 ‘안전식품’이었다. 제로섬게임이라는 파생시장의 링 위엔 수건을 던진 패자만 있고, 웃고 있어야 할 승자는 숨어 있다.
미국의 모기지 업체들은 그린스펀의 축복 속에 가계에 마구 돈을 빌려줬다. 처음엔 이자마저 안 받았다. 그리고 이 대출 채권을 투자은행들에 팔았다. 투자은행들은 이 모기지들을 묶어서 모기지담보증권(MBS)을 만들었다. 그러면 한두 개 대출에서 부도가 나도 전체엔 별 영향이 없다. 여기에다 이자가 나오는 잡다한 자산들을 함께 섞은 다음에 다시 신용등급별로 쪼개서 부채담보증권(CDO)이라는 합성상품을 만들었다. 거의 ‘타짜’의 경지다. 이것을 헤지펀드나 투자가들에게 팔았다. 주택담보 대출을 받은 사람의 빚이 증권화란 마술을 통해 현금처럼 거래된 것이다. 이쯤되면 며느리가 받은 주택대출로 생겨난 증권상품을 시아버지가 사놓고도 서로 모르는 상황이 된다.
회사가 부도 나면 채무를 대신 갚아주는 보험상품이 CDS(Credit Default Swap)다. 이 보험이 주택시장으로 확장됐다. 모기지 증권이나 CDO를 산 투자가는 원리금 떼일 위험을 피하고자 보험회사에 수수료를 내고 이 상품을 산다. 재밌는 것은 주택시장이 악화될수록 보험상품인 CDS의 가격이 올라간다는 점이다. 생명보험에 가입할 때 나이가 많을수록 보험료가 높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점을 이용해 헤지펀드는 모기지 증권을 사지도 않았으면서 주택대출 연체율이 높아질 것(보험상품 가격 상승)이라고 예상하면 CDS를 매수한다. 위험을 피하려는 게 아니라 CDS의 차익을 노리는 투기인 것이다. 실제 CDO 잔액보다 CDS 발행액이 훨씬 많다는 통계가 이를 입증한다.
AIG가 죽었다가 살아난 이유그런데 금리가 오르고 부동산 거품이 터지면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태풍이 몰려오자 잘게 쪼개서 감춰놓은 위험들이 연쇄작용을 일으키며 워런 버핏의 비유처럼 ‘대량살상무기’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모기지 증권이 부실화하면서 이 금융파생상품을 보증해주며 거래를 촉진해온 신용파생상품인 CDS로 뇌관이 옮겨붙었다. 이게 AIG 사태다. 세계 곳곳에 엄청난 물량의 CDS를 깔아놓은 AIG는 모기지 증권 상환자금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AIG가 리먼브러더스와는 달리 구제금융을 받아 살아난 이유이기도 하다. 공적자금이 투입됐으므로 결국 납세자에 피해가 전가됐다. 반면 이익을 본 쪽은 CDS 가격 상승에 베팅한 투기세력이다.
수출기업은 미래에 대금을 외화(달러)로 받게 되는데 그 사이에 환율이 내려가면(달러 약세) 원화로 바꿀 때 환산금액이 줄어들어 손해를 본다. 이때 기업은 수출 계약 시점의 고정된 환율로 미래에 달러를 팔 수 있는 선물 거래를 통해 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을 피하려고 한다. 이런 선물환 거래는 환율이 500원으로 떨어지더라도 손실을 보지 않게 해주는 대신 환율이 2천원으로 올라도 이익이 생기지 않는다. “이렇게 무식하고 비효율적인 환헤지가 어딨냐”며 등장한 게 통화옵션 상품인 키코다. 환율 하락 때 손실을 방어함은 물론 상승때도 일부 차익을 보전할 수 있다고 유혹했다. 다만 환율이 일정 구간을 벗어나 오르내리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은 짤막하게만 덧붙였다.
이는 앞으로 주가가 얼마 밑으로만 떨어지지 않거나 얼마 이상으로만 오르지 않으면 고수익을 보장해주겠다는 주가연계증권(ELS)과 닮은꼴이다. 옵션을 구조화시켜 설계된 상품의 공통된 특징이다. 여론조사 방법을 떠올려도 좋다. ‘이명박 후보의 대통령 당선이 유력하다’는 예측조사 발표 뒤에 따라붙는 ‘신뢰도’란 게 있다. 만약 신뢰도가 95%가 아닌 75%라면 이 조사는 그만큼 빗나갈 위험이 커진다. 통계에 사용되는 정규분포상 그래프의 신뢰구간이 좁아져 실제 결과는 좌우로 벗어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표본 수가 적거나 자동응답 같은 부정확한 방법을 사용하면 신뢰구간은 좁아지지만 당연히 비용은 적게 든다. 환헤지 상품 중에 ‘싼 게 비지떡’이 바로 키코다.
키코(Knock In, Knock Out)는 비용이 많이 드는 선물환보다 약간 유리한 환율에 헤지를 할 수 있지만 요즘처럼 환율이 치솟거나 반대로 미끄러지면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환율이 너무 내려 사전에 정해놓은 하한선을 한 번이라도 찍으면 약속한 가격에 달러를 팔 수 있는 권리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다(Knock Out). 환헤지 상품에 가입했다고 생각했는데 헤지가 안 되는 것이다. 환손실을 버텨볼 만한 수준에선 헤지를 해주다가 정작 보호가 필요한 구간에 들어서면 판매 은행이 손실을 떠안아주지 않는다. 키코의 배신이다. 환율이 오르면 상대적으로 불리해진 약정가격에 달러를 팔 권리를 포기하면 되지만, 너무 올라 상한선을 밟을 경우 그 선택적 권리가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의무로 뒤바뀐다(Knock In). 시장에서 달러를 비싸게 사서 낮은 약정 환율로 은행에 팔아야 한다. 이때 수출대금으로 받을 달러에서 그만큼 환차익이 생긴다면 전체 손익은 상쇄될 수 있다. 문제는 헤지 환율 구간을 조금 더 높여준 대신 미래에 들어올 수주대금 범위를 초과해 2~3배로 달러를 팔도록 계약한 ‘레버리지’ 키코다. 매달 10만달러를 기준으로 헤지 약정을 했지만 환율이 상한선을 살짝 건들기만 해도 20만~30만달러를 강제로 토해내야 한다. 수출대금을 초과한 키코 계약금액(오버헤지)은 고스란히 환차손을 입기 때문에 손실선의 기울기가 이익선 기울기보다 2~3배 가팔라진다. 키코의 재앙이다.
미국과 한국의 패자는 결국 납세자키코도 제로섬게임이므로 중소기업의 환차손은 옵션을 팔아먹은 은행의 환차익이 돼야 한다. 하지만 국내 은행 대부분은 외국계 상품을 단순히 복제해 들여와 팔았기 때문에 수수료 말고는 이익이 없다고 말한다. 외국 은행도 키코 계약 체결과 동시에 자체 헤징을 위해 시장에서 반대 방향의 거래를 했다면 이익을 챙기지 못한다. 하지만 외환시장 영향력이 큰 글로벌 투자은행들이 바로 키코의 설계자라는 점에서 음모론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정부의 키코 피해 기업 지원방안에 보증기금의 대출 보증이 포함된다는 점에서 이번에도 패자는 납세자다.
한광덕 기자 k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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