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사천의 기적’은 왜 일어났나… 참신한 선거 전략과 초인적인 강행군, 한나라당 공천 역풍까지</font>
▣ 사천=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사천 시민들은 제대로 된 농사를 짓기 위해 쭉정이를 버리고 제대로 된 종자를 선택했다.” 18대 총선 당선이 확정되던 4월9일 밤 12시께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은 벅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4월도 알맹이는 남기고 껍데기는 가라’던 신동엽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4·9 총선 최대 이변의 현장인, ‘농민 강기갑’이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이자 여당 실세인 이방호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꺾은 사천을 찾았다.
눈물바다가 된 의정보고회
선거 다음날인 4월10일 사천 시내는 이변의 여파로 술렁이고 있었다. 두루마기 차림으로 국회에서 단식과 점거를 일삼던 ‘과격한’ 민주노동당 의원이 정말로 이 지역구에서 당선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강기갑 후보를 찍은 이들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사천버스터미널 근처에서 만난 한 주민은 “강기갑이 당선되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결과가 충격적이다”라고 말했다.
강기갑 후보를 찍었다는 이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한나라당 그놈들 또 찍어주면 지들이 잘난 줄 알고 다 해묵을라 그랄 꺼 아입니꺼? 그 꼴은 보기 싫고 강기갑 의원도 잘하면 당선될 것 같기도 해서 찍었심더.”(삼천포에서 만난 한 택시기사)
“강 의원을 ‘좌파’라고들 하지만 그전부터 농민들 위한 정책을 펴왔잖아요. 처음엔 되든 안 되든 밀어주자는 얘기가 나오더니 나중에는 ‘당선될 수 있다, 찍어주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더라고요. 우리 아버지는 한나라당 당원인데도 강 의원을 찍었다니까요.”(사천읍에서 만난 28살 박아무개씨)
‘사천의 기적’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강 의원은 지난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당선된 직후부터 고향인 사천에서 표밭을 갈았다. 지난해부터는 사천 쪽 농촌 마을을 중심으로 150여 차례에 걸친 의정보고회를 열었다. 최철원 보좌관의 증언이다.
“보고회 때 ‘우리 마을에 국회의원이 찾아온 건 처음’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강 의원이 열악한 농촌의 현실을 털어놓는 주민들의 얘기를 많이 듣고 그 자리에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강 후보는 평일 저녁 때 비행기를 타고 와 의정보고회를 하고는 밤 11시10분에 서울행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하는 살인적 강행군을 계속했다. 지난해 10월에는 선거자금 마련을 위해 서울 강서구에 있던 전셋집까지 뺐다. 잠자리는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해결했다. 보다 못한 보좌관들이 연대해서 5천만원을 빌렸다. 선관위 선거 기탁금 1600만원도 이런 식으로 간신히 낼 수 있었다.
강 후보 쪽은 돈은 없어도 전략이 있었다. 한나라당의 구호인 ‘잃어버린 10년’을 패러디한 ‘잃어버린 8년’을 주제어로 내걸었다. 재선의 이방호 후보가 8년간 제대로 한 것이 없다고 비판했다. 강 후보는 후반에는 두루마기를 벗고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낡음’이 아닌 ‘젊음’의 이미지를 주자는 목적이었다. 진주 경상대 앞에서 원더걸스의 에 맞춰 춤까지 췄다.
강 후보 쪽에서는 지난 3월8일 사천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필승결의대회 때부터 변화된 분위기를 확실히 느꼈다고 한다. 당원 250명에 불과한 사천에 1200여 명의 지지자들이 몰렸다. 어떤 할머니는 “내가 강기갑이 보러 10리(4km)를 걸어왔다”며 강 후보의 손을 붙잡았다. 손자의 유모차를 보행기 대신 끌고 온,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였다.
상대적으로 이방호 후보는 지역 관리에 느슨했다는 게 중평이다. 이 후보는 선거운동 기간에도 당 사무총장으로서 공천을 진두지휘하며 중앙 정치에 몰입하다 막판에야 유세를 시작했다. 옛 삼천포 쪽인 벌리동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김아무개(48)씨는 “강기갑 후보는 새벽부터 나와 선거운동을 했는데, 이방호 후보는 코빼기도 못 봤다고 주변에서 글카데요”라고 말했다.
결정적인 것은 그가 주도한 ‘공천’의 역풍이었다. 경남 지역의 공천 탈락자들과 박근혜계 의원들은 이방호 총장을 공천 파동의 주범으로 꼽았다. 남해의 박희태 의원 탈락이 만만찮았다. 사천시 지역경제과 관계자는 “사천 옆의 남해에서 박희태 의원이 공천에 탈락한 것에 대해 남해 주민들의 반감이 엄청났다”며 “남해 출신 중에서 사천 지역구에 주민등록을 둔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이 박희태 의원을 떨어뜨린 이방호 후보에게 반대표를 찍었다”고 말했다.
여기에 ‘박근혜의 저주’가 겹쳤다. 자신을 ‘골수 한나라당 지지자’라고 소개한 ㄱ세탁소 주인 곽동현(48)씨의 말이다.
“이방호씨가 박근혜 쪽만 안 건드렸으면 무조건 되지예. 나도 그것 때문에 안 좋았다 아입니까. 술 한잔하면서 들어보이까 비례대표는 한나라당 찍고 후보는 이방호 말고 다른 사람 찍었다는 사람들이 많데예.”
지역 발전 기회 잃는다는 걱정도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박사모) 쪽은 아예 이방호 후보를 ‘한나라당 파괴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배지를 떼버리겠다”고 공언하고 나섰다. 박사모 중앙본부의 정광용 회장을 비롯한 회장단이 4월2일 사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실상 공개적인 이방호 낙선과 강기갑 당선 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정치적 이념을 전혀 달리하는 ‘좌파’ 후보를 밀어야 했던 사건은 박사모에도 정신적 외상을 남겼다. 정광용 회장은 “지금도 상쾌하지는 않다. 강 후보가 PD(평등파)라면 덜 찜찜할 텐데…”라고 말했다.
이방호 후보가 미워 다른 보수 후보를 찍었다가 ‘강기갑 당선’이라는 뜻밖의 결과에 맞닥뜨린 한나라당 성향 지지자들도 마음고생을 겪고 있었다. 세탁소 주인 곽씨가 그 경우다. “강기갑씨는 사람도 사람이지만, 당이 마음에 안 든다 아입니꺼. 이리 될 줄 알았으면 이방호 찍었지예. 삼천포 발전을 위해서는 이방호 의원이 돼야 하는데.” 사천시 지역경제과 관계자도 “이방호 후보가 됐으면 중앙의 힘을 받아 지역이 잘나갈 텐데…”라고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은 기대감이 더 크다. 사천읍에서 만났던 지지자 박씨의 말이다.
“국회에 가서도 지금까지의 진보적 색깔을 잃지 않고 평소 해오던 대로만 잘하면 우리는 실망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방심하면 끝입니다. 이 지역은 자존심이 워낙 세서 2선 이상을 하는 의원이 없거든요. 웬만큼 잘하지 않으면 강 의원도 4년 뒤 (어떻게 될지) 몰라요.”
땅에 씨앗을 뿌려 재배하고 수확하는 건 ‘농부’의 몫이다. ‘진보의 불모지’에 씨를 뿌린 ‘농사꾼’ 강기갑 당선자가 얼마나 풍성한 가을걷이를 할지는 그의 노력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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