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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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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본’부터 바꿔라

등록 2007-11-09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경영 사령탑의 이면엔 검은 돈 로비의 그림자도…신뢰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반드시 수술해야</font>

▣ 곽정수 한겨레 대기업전문기자 jskwak@hani.co.kr

삼성의 계열사는 60개가 넘지만, 사실상 하나의 기업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게 가능한 것은 그룹 구조조정본부(현 전략기획실·구조본)가 사령탑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삼성의 세 가지 성공요인으로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 전문경영인들의 능력과 함께 구조본을 꼽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삼성이 외환위기 이후 10년 만에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배경에서 구조본을 빼놓을 수 없다.

<font color="#216B9C">△삼성그룹을 둘러싼 갖가지 불법·변칙 의혹의 중심으로 전략기획실 전신인 구조조정본부가 자주 거론돼왔다.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가운데·현 전략기획실장)이 2006년 2월 ‘X파일’ 사태와 관련해 “8천억원 기금 헌납”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에서 첫 번째가 김인주 전략기획실 전략지원팀장(당시 구조본 재무팀장)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font>

“그 사람들 또 용돈 떨어졌구나”

하지만 그것은 햇볕에 비춰진 구조본의 반쪽 모습일 뿐이다. 삼성 구조본 내부 인사로는 처음으로 이뤄진 김용철 변호사(구조본 전 법무팀장)의 양심고백은 그동안 감춰져온 구조본의 또 다른 반쪽을 보여준다. 계열사들의 분식회계를 통해 대규모 비자금을 조성해서, 전·현직 임직원들의 차명계좌를 통해 관리하고, 정치인과 고위관료, 판·검사, 언론인 등 한국 사회 곳곳을 검은돈으로 유혹해서, 이건희 회장이나 삼성과 관련된 모든 일들을 자기들 입맛대로 요리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삼성 구조본은 이건희 회장 일가라는 권력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대한민국 전체를 돈과 뇌물로 타락·오염시키는 ‘범죄집단’인 셈이다. 도저히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이 두 극단의 모습이 하나의 얼굴을 이루는 게 삼성 구조본의 ‘미스터리’다. 그리고 삼성이 진정으로 존경받는 글로벌 기업이 되기를 바라는 삼성의 20만 임직원들과 국민들의 비극이기도 하다.

“이제 검찰은 문 닫아야겠네!” 김 변호사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사제단)에 털어놓은 삼성 구조본의 검은돈 로비 대상에 대해 미리 들은 검찰 인사의 입에서 나온 탄식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비단 검찰만의 일일까? 김 변호사의 설명대로라면 삼성의 로비는 전방위적이다. 대한민국 곳곳의 권부를 망라한다. 김 변호사는 “국세청에서 주식 이동 조사를 나온다고 하면 삼성 구조본에서는 ‘그 사람들 용돈이 떨어진 모양’이라고 말한다”고 털어놓는다. 구조본의 고위 임원이 즉시 국세청으로 달려간다.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삼성 구조본이 검사들에게 준 돈이 500만원 정도라면, 국세청 고위 간부들에게 준 돈은 이보다 0이 하나 더 붙는다는 얘기를 김 변호사가 사제단에 털어놨다고 한다. 현직 국세청장이 부하에게 뇌물을 상납받은 혐의로 사상 처음 검찰에 소환되자, 국세청 직원들은 ‘검찰이 우리를 죽이려 한다’며 ‘일전불사’의 초강경 분위기라는데, 그들은 정말 현실을 모르는 것일까?

검찰과 국세청만의 일도 아니다. 김 변호사는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들이 기회만 되면 삼성 구조본 고위 인사를 만나려는 이유가 뭐겠냐”고 묻는다. 글쎄? “만날 때마다 1천만원씩 주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국회 국정감사에서 이건희 회장의 증인채택 얘기가 나오면 구조본에서는 “또 용돈이 필요한 모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대한민국을 위해서는 삼성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심상정,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 같은 이들은 물론 이 대상에서 예외다).

삼성의 로비 대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언론계다. 사제단이 지난 10월29일 김 변호사의 양심선언을 발표했을 때 와 인터넷뉴스 등을 제외한 대다수 한국 언론은 사실상 이를 외면했다. 기사를 조그맣게 줄이고,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처박았다.

사건 터질 때마다 구조본에 경고음

삼성이 좋은 경영실적을 거두면서도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은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오죽하면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만들어졌을까(사실 삼성공화국보다는 ‘삼성제국’이 더 어울린다)? 참여정부 들어 터진 삼성 관련 대형 사건만 여러 건이다. 16대 대선 불법 정치자금 제공, 안기부 X파일 사건,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을 통한 경영권 세습 유죄판결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주모자로는 모두 삼성 구조본이 지목됐다. 하지만 때로는 완강한 부인으로, 때로는 눈물을 흘리는 읍소 작전으로 위기를 넘겼다. 대선자금 사건 때는 정치권의 요청을 거부했다가는 문 닫을 수밖에 없는 게 힘없는 기업의 현실이라는 눈물 작전을 폈다. X파일 사건 때는 이학수 전략기획실장(부회장)과 홍석현 회장이 정치인과 검사 등을 상대로 검은돈 제공을 논의한 내용이 육성으로 녹음됐는데도 오리발을 내밀었다. 전환사채 사건도 에버랜드의 전·현직 사장이 대신 총대를 멨다.

이런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삼성 구조본에 대한 강력한 경고음이 나왔다. 그러나 불행히도 삼성 구조본의 성공적(?) 대처는 오히려 스스로 변화의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낳았다. 삼성 구조본은 2006년 2·7 대국민 사과를 전격 발표했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등의 증여 문제와 안기부 X파일 같은 문제들로 국민들에게 걱정을 끼쳐 깊이 반성한다. …지난날의 잘못된 관행에 대한 반성과 함께 그동안 삼성의 현안에 대해 시민사회단체들이 지적해온 점을 받아들여 (8천억원의) 사회기금 헌납과 사회공헌 내용을 발표한다.” 당시에도 삼성이 진정한 반성과 변화보다는 돈으로 ‘면죄부’를 사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다. 하지만 삼성은 이번만은 다르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김 변호사가 밝힌 내용을 보면, 삼성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삼성 구조본은 2006년 2월 대국민 사과 이후 1년 반이 넘도록 계속 김 변호사 이름의 차명계좌를 관리해왔다. 사실 대국민 사과 이후 삼성 구조본의 행보에 의문이 제기된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지난 2007년 5월 말 에버랜드 사건 항소심 공판에서 다시 유죄판결이 나오자, 삼성 구조본은 이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했다. 국민에게 잘못했다고 사과해놓고, 무엇이 억울하다는 것인가?

삼성 구조본은 이번 사건에서도 “삼성과 무관한 개인 돈”이라며 부인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그 변명은 궁색하다. 오죽하면 사건의 첫 보도를 사실상 외면했던 조차 다음날 사설에서 문제점을 지적했을까?

이번 사건의 의미는 삼성 구조본의 불법 행위와 이중 행보가 드디어 한계점에 왔다는 것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김 변호사는 “삼성의 순기능도 많지만 역기능도 만만치 않고, 그 역기능이 임계점에 도달했지만 자정 능력은 없다”고 말한다. 거대기업이 하루아침에 바뀌기를 바라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기존의 잘못된 관행을 뜯어고치는 것은 더 어렵다. 그러나 국민들에게 더 이상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그동안 삼성 안에서도 구조본의 개혁 필요성을 제기하는 임직원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삼성전자가 연간 수조원의 이익을 내는 훌륭한 경영성과를 내도, 총수와 구조본의 불법 행위가 근절되지 않는 한 글로벌 기업으로서 지속 가능한 경영을 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소리는 공론화되지 못했다.

이건희 회장과 구조본은 ‘샴쌍둥이’

‘삼성제국의 청와대’인 구조본은 1997년 외환위기 때 반재벌 여론이 높아지자 그룹 회장비서실을 없애는 대신 구조조정을 위해 2~3년 동안 한시적으로 운영하겠다며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후 조직과 기능은 재무·인력·기획·홍보·경영진단(감사)·비서·법무 등 오히려 더 확대됐다. 그리고 설치 9년째를 맞는 지금은 이건희 회장을 보위하는 최고의 권력기구로서, 삼성의 돈과 사람, 정보를 철저히 장악하고 있다. 구조본은 전체 인력이 얼마나 되는지부터 베일에 가려 있다. 구조본에 적을 둔 임직원은 공식적으로는 100명도 안 되지만, 보이지 않는 인력까지 합치면 실제로는 300~400명 이상이라고 한다. 지난해 구조본이 이름을 바꾼 전략기획실은 실장인 이학수 부회장 아래 전략지원팀장인 김인주 사장과 기획홍보팀장인 장충기 부사장, 기획홍보담당인 윤순봉 부사장, 인사지원팀장인 정유성 전무, 전략지원팀 경영지원담당인 최광해 부사장, 경영진단담당인 최주현 부사장이 핵을 이룬다. 구조본 중에서도 중심은 재무팀으로, 현재는 전략지원팀에 그 기능이 흡수됐다. 관재와 운영, 금융 등의 세부팀으로 다시 나뉘는데, 관재는 이건희 회장 일가의 재산관리를 맡고 있다. 구조본의 최고 실세인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도 모두 재무팀 관재 출신이다.

이건희 회장이 직접 팔을 걷고 나서 구조본을 뜯어고치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번지수가 틀린 얘기라는 게 김 변호사의 설명이다. 삼성 구조본이 저지른 불법 행위의 실질 책임자는 이 회장이라는 것이다. “이 회장이 (삼성 구조본에서 하는 일들을) 모르고 있다거나, 딴 세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그리고 설령 이 회장이 맘을 먹어도 쉽지 않다고 말한다. 이 회장과 삼성 구조본의 핵심부는 후천적으로 돌연변이를 일으켜 ‘샴쌍둥이’처럼 분리하기 힘든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 그 후계자로 지목되는 이재용씨는 어떨까? 과거 역사를 보더라도 왕위가 바뀌면서 개혁의 바람이 분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솔직히 그도 쉽지 않아 보인다. 재용씨는 언론이나 시민사회단체가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을 문제 삼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다고 한다. 차명계좌나 편법 상속은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하는 일인데 왜 자신에 대해서만 문제 삼느냐는 얘기다.

하지만 때늦은 일은 없다. 삼성은 진정 거듭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수사를 미적거리는 검찰을 믿고 또 한 번 위기를 넘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삼성의 검은돈에 중독된 검찰이 이번 사건 수사에 적극 나서리라고 생각하는 국민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삼성의 대선자금을 이건희 회장의 개인 돈이라고 묵인해주고, X파일 사건 때는 삼성 핵심 인사의 육성이 들어간 증거물(테이프)을 확보하고도 면죄부를 주고, 전환사채 헐값 발행에 대해 2심에서 유죄판결이 내려졌는데도 이건희 회장을 조사하지 않는 게 검찰의 현주소다. 어쩌면 검찰도 한계점에 온 것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민주노동당이 특별대책본부 발족과 함께 특검 추진의 뜻을 밝힌 것은 당연해 보인다.

망하지 않으려면 바뀌어야

이건희 회장은 얼마 전 구조본을 질책하면서, “기업이 망하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냐”고 이학수 부회장에게 물었다고 한다. 망설이던 이 부회장은 “한 3년 정도요?”라고 조심스레 답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정색을 하며 “망하려면 반 년 만에도 망한다”고 말했다. 올 들어 삼성전자의 경영실적 둔화를 놓고 삼성 위기론이 나온다. 이건희 회장이 격노했다는 언론 보도도 있었다. 하지만 이 회장이 착각하는 게 있다. 삼성에 경영실적의 위기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국민과 글로벌 사회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신뢰의 위기’다.

삼성은 망하지 않으려면 바뀌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건희 회장과 그룹의 사령탑인 구조본부터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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