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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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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보이, 남대문로를 거닐다

등록 2007-09-14 00:00 수정 2020-05-03 04:25

근대 소비문화를 태동시킨 거리의 변천사… 일제시대 상점가와 백화점의 휘황한 불빛들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1920~30년대 조선 땅에서 근대 소비문화를 처음 태동시킨 곳은 경성(서울) 남산 기슭 진고개의 일본계 백화점과 상점가였다. 남대문로와 엇갈리면서 경성우편국 건물 양옆으로 뻗어들어간 두 갈래 길은 도쿄의 번화가 긴자를 뺨친다는 혼마치(충무로), 메이지마치(명동)의 불야성 속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였다. 붉은 벽돌 위로 흰 화강석 띠가 물결치는 우편국 건물은 곧 대문짝만한 간판, 카페와 식당, 끝없는 각종 특산점포의 행렬이 시작되는 기점이었던 셈이다.

대형 금융기관과 유통의 중심지

그 길목 너머로 모던 조선의 ‘껍질’이 있었다. 야시시한 화장을 한 단발머리, 홀쭉치마의 모던걸, 나팔바지 입은 모던보이들이 카페나 재즈바에서 흥얼거리며 칼피스, 고히(커피)를 마셨다. 맥고모자 쓴 신사와 양장 차림 귀부인들이 기모노, 지카다비를 착용한 일인들과 뒤섞여 정신없이 쇼핑하는 모습들을 이슥한 저녁까지 볼 수 있었다. 경성 부민들에게 우편국의 붉은 벽돌 이미지는 미쓰코시 백화점의 공중정원처럼 남촌의 환상을 조건반사처럼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나 다름없었다. 우아하면서도 농염한 여인 같은 우편국 벽돌 건물의 이미지 뒤로 날로 현란해지는 남촌 상점가의 영화가 숨어 있었다. 1929년 풍속잡지 9월호에 실린 정수일의 라는 글은 경성우편국을 거쳐간 진고개 요지경을 이렇게 묘사해놓았다.

‘…조선은행 앞에서부터 경성우편국을 옆에 끼고 이 진고개를 들여다보고 갈 때에는 좌우로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은 어느 곳을 물론하고 활기가 있고 풍성풍성하며 진열창에는 모두 값진 물건과 찬란한 물품이 사람의 눈을 현혹하며 발길을 끌지 않는 것이 업다. …백화가 란만한 듯한 장식이며 서늘한 맛이 떠도는 갖은 장치가 천만촉의 휘황 전등불과 아울러 불야성을 이룬 것을 볼 때에는 실로 별천지에 들어선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일제기 근대 소비상업 문화의 요람인 우편국 정면의 남대문통 거리는 원래 조선의 임금을 비롯한 문무백관과 백성들이 한양 남쪽 교외로 나가는 국도였다. 그러나 일제 침탈 이후 태평로가 대로 역할을 하면서 이 길은 대중문화와 금융소비 경제의 요람으로 탈바꿈한다. 남대문로 가로는 이미 1910년대부터 가장 근대적인 경관을 띠면서 발전했다. 번화가 혼마치의 네온사인 광고탑 건너 남대문로 맞은편에 조선은행과 조선상업은행의 돔 건물이 나란히 섰고, 탑 바로 위로 경성우편국이, 그 대각선 방향을 가로질러 회현동 가는 쪽으로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 뒤쪽으로 조선저축은행(오늘날 제일은행)과 명요릿집 청목당이 도열했다. 광장의 큰 분수대 사이로 뚫린 복선 레일 위에는 두 량짜리 미국제 대형 전차가 달렸다. 휘황찬란한 남대문로 광장의 화룡점정은 일본 건축가들이 그렇게도 좋아했던 두 쌍의 중앙 분수대였으니 오늘날 신세계 앞 분수대의 전신이 된다. 남대문로1가인 광교 쪽부터 한국은행 쪽까지 동일은행, 천일은행, 식산은행(오늘날 롯데백화점), 조선상업은행, 조선신탁회사, 십팔은행, 삼화은행, 조선주식취인소 등의 대형 금융기관이 죽 늘어서 금융과 유통 양면에서 남대문로는 조선 최고의 지위를 구가했다.

의 주인공이 날자고 절규했던 곳

일본인들은 조선은행(朝鮮銀行) 앞 남대문로 광장을 줄여 선은(鮮銀) 앞 광장, 일본말로 ‘센긴마에고조’라고 불렀다. 1910년대 이후 조선은행과 경성우편국 경성부청이, 30년대 이후에는 이전한 부청 자리에 들어선 미쓰코시 백화점이 삼각형의 꼭짓점을 구성하게 된다. 때문에 경성우편국과 조선은행은 남대문로와 남촌의 흥청거리는 영화를 말없이 지켜보는 증인이 되었다. 아름다운 우편국 정면 현관의 벽시계를 보면서 숱한 사람들이 혼마치나 메이지마치 카페, 백화점 등지에서 연인 혹은 가족들과의 약속 시간을 확인했다. 자기 근거지 아닌 도심 공간을 떠돌면서 숱한 사건과 일상을 만들어내는 근대 도시문화가 이 남대문로 공간을 통해 처음 싹터 전파됐다.

계몽적 근대가 아니라 욕망의 소비로 이뤄지는 진정한 모던 도시문화를 모던보이 모던걸들이 피워올렸다. ‘지저부친 머리에 뾰족구두 신고 요염한 화장을’ 하고 원숭이 궁둥짝 같은 홍안을 한 모던걸들이 파라솔, 양장모자를 쓰고 돌아다녔고, 나팔통바지 통넥타이를 한 모던보이들이 어울렸다. 혼마치의 찻집, 빙수집, 우동집, 카페, 댄스홀의 샛노란 전등 아래서 그들은 칼피스, 아이스고히, 독주를 마시며 희희낙락거렸다. 소비문화에 대한 조선인의 선망이 극에 달하자, 무작정 경성우편국과 미쓰코시 백화점 부근을 어슬렁거리는 몽유병자 같은 풍습, 일본말로 ‘혼부라’라고 불린 산책 풍습이 등장했다. 혼부라의 무리들은 부나비처럼 경성우편국 옆 길을 통해 혼마치 상점가로 빨려들어갔다. 방학을 앞두고 떼거지로 몰려와 화장품과 선물류 등을 물 쓰듯 사는 여학생들의 구매 행렬 또한 남대문로 상점가와 백화점에서 성행했다. 소설가 이상(1907~36)은 죽기 수년 전 쓴 자신의 수필집에서 혼마치, 남대문통의 백화점, 점포를 누비면서 다가온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속성을 이런 인상기로 궤뚫었다. ‘…유니폼 소녀들 허리에 번적번쩍하는 깨끗한 밴드, 물방울 낙수지는 유니품에 벌거벗은 팔목 피부는 포장지보다 정한 포장지고 그리고 유니폼은 피부보다 정한 피부이다. 백화점 새 물건 포장-밴드를 끄나불처럼 꾀어들고 바쁘게 걸어오는 상자 속에는 물건보다도 휠씬 호기심이 더 들었으리라.’ 그는 꾸며진 낙원인 백화점에서 사람의 피부조차도 상품으로 재활용되는 근대의 지옥과 불안을 보았다. 저 유명한 소설 에서 자화상 격인 주인공이 미쓰코시 옥상에서 흐느적거리는 도시의 일상을 보며 날자고 절규했던 데는 그런 통찰이 있었던 것이다.

해방 뒤 1963년 옛 영화 회복

1930년대 중반 중일전쟁 발발 이후 남대문로 또한 내선일체 등의 현수막이 걸리면서 일본 군부의 전쟁 선전장으로 바뀌어갔다. 일본의 패전과 해방, 한국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뒤 남대문로가 유통과 상업의 전당으로서 옛 영화를 회복하기 시작한 건 1963년이다. 삼성 재벌이 옛 미쓰코시 백화점 건물을 인수하면서부터다. 박완서씨는 자전소설 에서 한국전쟁 당시도 미군 피엑스 등이 있던 남대문로 일대가 ‘눈이 돌고 정신이 어질어질할 만큼 번화하고 화려했다’면서 ‘이국적 활기와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천박의 근원지였다’고 썼다. 그로부터 30여 년 뒤 1987년 6월항쟁 당시 남대문로 광장은 386에게 자랑스런 거리투쟁의 무대가 되었다.



서울중앙우체국의 가시밭길

혼마치의 영화를 알리는 신호탄, 한국 전쟁의 참화 겪고 철거



서울중앙우체국 청사의 100년 역사는 국내 우편 역사 그 자체지만, 머리 없이 손발만 움직였던 조선 근대 건축의 가시밭길 역사이기도 하다.
그 전신인 경성우편국은 원래 1888년 일본 정부가 조선 국법을 어기고 한성 일본공사관 안에 세운 인천 일본우편국의 출장소였다. 1905년 구한국 정부의 한성우체사를 흡수해 경성우편국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당시 일본인 거주자들이 가장 많이 살던 진고개 일대의 혼마치, 현 충무로1가 명동 들머리에 2층 양옥 청사를 짓는다. 이 터가 오늘날까지 우체국 자리로 이어진다. 일본 관료들이 보기에 당시 경성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이 왜성대 일본 공사관 근처의 일본인 집단거주지였고, 그 머리에 해당하는 목에 상징적인 의미로 지은 것이다. 우편국 청사 신축은 남촌에 일제의 각종 공공기관 건물이 잇따라 건립되는 물꼬를 텄으며, 혼마치의 영화를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1905년 한-일 통신기관 협정에 따라, 한성우체총사 등 조선 조정의 관련 기관을 흡수한 경성우편국은 한-일 병합 뒤인 1915년 9월 지상 3층의 르네상스풍 청사를 짓는다. 붉은 벽돌과 흰 화강암 석조가 조화를 이룬 건물은 우아하고 세련된 지붕 장식과 현란한 색깔로 금세 랜드마크로 자리잡았다. 1913년 10월 착공한 이 건물은 공사비용만 30만원 이상이 들어갔는데, 총독부 특별회계에서 3년간 지출해 충당했을 정도로 관의 지원이 집중됐다. 지하 1층, 지상 3층, 옥상 돔으로 구성된 벽돌조 건물로, 붉은빛 벽돌에 흰색 화강석이 규칙적으로 박힌 영국 퀸 앤 양식을 반영한 우편국 건물은 장안 최고의 미녀 건물로 성가를 누렸다. 지붕의 현란한 바로크 스타일 돔과 장식적 외장은 ‘무도회에 참석한 귀부인’을 보는 듯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붉은 벽돌면에 흰빛 화강석 띠들을 경쾌하게 둘러 입면 자체는 리듬감이 넘쳤다. 웅장 화려함과 세련 발랄한 요소들을 겸비했던 우편국은 길 맞은편 묵직하고 엄숙한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본점과 대비를 이루었다. 식민지 우편행정의 중심기관이었던 만큼 1920~30년대 한반도 주요 도시마다 등장한 ‘통신건축’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해방 뒤 서울중앙우체국으로 바뀌면서 새 출발한 청사는 한국전쟁 때 지붕이 통째로 날아가고 건물 뼈대만 남는 참화를 맞는다. 이런 참화는 한국은행도 마찬가지였지만, 은행이 응급 수리로 원형을 많이 잃지 않고 살아남은 반면, 우체국 청사는 철거되는 운명을 맞는다. 1957년 밋밋하고 살풍경한 콘크리트 3층 청사가 폐허 위에 들어선다. 지하에 일부 남았던 옛 청사의 자취도 1968년 확장공사, 1981·82년 신관 증축 공사로 대부분 사라졌다. 시간의 켜가 쌓인 저장고로서 건축에 대한 관념이 없던 시절의 비극이었다. 2003년까지 쓰였던 서울중앙우체국 신관 청사 또한 특징 없는 정육면체형 13층 빌딩으로 남대문로의 다른 근대유산들과 조응하지 못하는 장벽에 불과하다는 혹평을 받았다. 새 청사가 두 쪽으로 갈라져 시야를 일부 트이도록 한 것은 이런 비판을 나름대로 의식한 결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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