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2차 회담은 더 높은 단계의 협력을 공고히 하는 과정”
▣ 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남북 정상회담 한 번으로 북핵 문제가 일거에 해결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해결 과정에 가속도를 붙이는 촉매제는 될 수 있을 게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현직 장관 시절만큼이나 말을 아꼈다. 그는 “학자로서 내 길을 다시 걸어가기 시작하면서, 전직 장관으로서 몇 가지 준수 사항을 정했다”며 “현직에 있을 때의 영향력, 개입하고 싶어하는 마음 같은 걸 가장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목소리를 낮췄다.
정권 인수위 시절부터 내리 4년여를 참여정부 외교·안보 정책의 최전선에 서 있었던 이 전 장관은 “1차 회담은 대결과 반목으로 점철된 냉전 시절 남북 관계를 어떻게 화해와 협력의 관계로 재설정해내느냐가 핵심이었다”며 “2차 회담은 재설정된 관계를 정리·정돈해보고 나아가 더 높은 단계의 협력을 공고히 하는 과정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8월10일 오전 경기 성남 세종연구소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
북-미 관계 풀리면서 회담 기회 열려
7년여 만에 두 번째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게 됐다.
=일단 우리 정부로선 1차 정상회담 때 이미 2차 회담, 답방을 얘기했기 때문에 참여정부 초기부터 정상회담 개최 의지를 밝혀왔다. 지난 2005년 6·17 방북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다시 한 번 북쪽에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겠다고 밝혔고, 북도 이에 합의했다. 다만 시기에 대해선 북쪽이 정세를 보고 판단하자고 했다. 그해 9·19 공동성명이 나와 가을쯤 정상회담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가 불거지면서 북쪽에서 미국의 위협이 일정하게 해소되는 전망이 보여야 한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움찔하고 기다려달라고 했다. 자세한 언급은 할 수 없지만, 당시 ‘제3국 개최설’ 등까지 나올 정도로 회담에 근접했다.
북 입장에선 남북 관계에 일정한 신뢰가 있다는 판단 위에서, 북-미 관계와 6자회담 등에서 어느 정도 진척이 있어야 정상회담에 나설 수 있는 구조였다. 올 들어 2·13 합의가 나오고, 북핵 폐기 1단계 조치가 실행되는 과정에서 미국이 BDA 문제 해결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실제 해결됐다. 북한으로선 미국과의 관계가 풀리면서 남북 정상회담을 미룰 이유가 사라진 측면이 있다. BDA 문제가 풀리면서 지난 6월 이후 북-미 관계도, 남북 관계도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일정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북핵 해결 없이 정상회담 없다”는 발언을 여러 차례 했는데.
=핵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한 정상회담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 그리고 핵문제에서 자기들이 생각하는 일정한 자신감을 갖기 전에는 회담에 응하지 않을 것이란 인식을 반영한 발언이다. 실제 2005년 6월 정상회담에 합의했다가, BDA 문제 때문에 개최하지 못한 경험이 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정상회담을 하겠다고 여러 번 말했다. 여러 우려가 있었지만 참여정부 들어 남북 간 공식 라인이 깨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난해 8월 북한의 미사일 실험발사 이후에도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북쪽에 정상회담 의사 타진을 한 바 있다. 그때도 북쪽에선 답을 안 주고 기다리라고 했다.
북핵 2단계 불능화 조치 가속화
회담 성사의 의미를 평가한다면?
=6·15 정상회담 이후 남북 관계는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 어떤 부분은 빠르게 발전했지만, 몇몇 분야에선 발전이 더뎠다. 남북 관계 발전에 불균등이 노정된 게다. 이런 불균등을 정리하고 돌파해나갈 필요가 있었다. 남북 관계의 질적 도약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또 북핵과 관련해서도 이제 막 풀려가는 과정에 있긴 하지만, 2단계인 불능화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가속을 촉진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평화체제 논의도 남과 북이 주도적으로 해나가야 한다. 북핵 문제 해결 과정에서 남북 관계가 능동적 역할을 해야 할 시점이란 얘기다. 특히 지난 6~7월 북한과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고 있다. 정상회담을 통해 남과 북이 한반도 정세 변화에 주도력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이끌어나갈 필요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본다.
정상회담 성사 이유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결단’을 꼽는 이들도 있다.
=김 위원장이 상당히 전략적으로 사고하는 지도자란 건 잘 알려져 있다. 여러 전략을 생각했을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을 7년 만에 다시 한다는 것은 김 위원장한테 중요하면서도 부담감을 주는 일이었을 것이다. 정상회담 성사가 일정한 합의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도 많은 생각 끝에 결론을 내렸을 게다. 구조결정론자는 아니지만, 현직에 있을 때 “2·13 합의가 나오게 된 것은 김 위원장의 결단 때문이 아니다”란 말을 한 일이 있다. 결국 미국의 정책 변화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미국의 정책 변화가 있어야 북도 변한다고 지속적으로 강조해왔다. 2·13 합의 이후 북-미 관계가 개선되면서 정상회담을 거부할 명분이 사라졌다. 김 위원장으로서도 2차 정상회담을 열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을 느끼고 있었을 게다. 남북 관계를 한 단계 더 진전시켜야 한다는 필요성도 느꼈을 테고.
첫 번째 회담과 두 번째 회담 사이에 7년의 공백이 있다. 남북 관계가 변한 만큼 의제도 달라질 텐데.
=6·15 정상회담은 대결과 반목으로 점철된 냉전 시절 남북 관계를 어떻게 화해와 협력의 관계로 재설정해내느냐가 핵심이었다. 남북이 합의를 이뤄 제대로 진행된 것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지난 7년 사이에 만들어진 새로운 관계를 다시 한 번 검토해보고 다시 한 단계 높이는 게 이번 회담의 초점이 돼야 한다. 무엇보다 한반도 문제의 핵심은 여전히 안보고, 안보 불안과 전쟁 불안을 종식시키는 노력이 더 커져야 한다. 북핵 문제는 남북 정상이 한 번 만난다고 해서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상호 신뢰를 공고히 하고 2단계 불능화 조치를 가속화하는 긍정적 구실은 할 수 있다. 한반도 평화는 핵무기로 상징되는 대량살상무기 위협뿐 아니라 전통적인 위협, 재래식 대결 상태 완화 노력도 동반돼야 가능하다.
정치 분야에선 장관급 회담도 있지만, 최소한 상시적 논의 틀을 만들고 제도화해야 한다. 1차 정상회담에서 재설정된 관계를 2차 회담에선 정리·정돈해보고, 나아가 더 높은 단계의 협력을 공고히 하는 과정이 돼야 한다는 것도 이런 의미다. 중요한 건 남북이 공동의 이익이 뭔지를 함께 모색해야 한다는 점이다. 또 남과 북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해나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남과 북 사이의 경제적 유기성을 증대시키고 공동이익을 창출하며, 북한 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는 큰 틀의 비전에 두 정상이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인도적 문제에 대한 관심도 아울러 기울여지면 최선이겠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한 걸음씩…
대규모 대북 지원에 대한 얘기도 나오기 시작하는데.
=우리 경제를 북한 경제와 함께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북한을 통해 북방으로 뻗어나간다면 우리 경제에도 기회가 될 수 있고, 북으로선 경제 회생의 발판을 마련할 수도 있다. 큰 비전에서 보면 이는 한반도 평화의 진전과 병행해야 한다. 남과 북의 경제가 유기적 연관성을 가져야 한다. 두 정상이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논의하지는 않겠지만, 이를테면 한강 하구 골재 채취는 국지적인 문제 같아도 북에도 남에도 당장 도움이 되는 일이다. 게다가 군사적 긴장 완화란 측면에서도 바람직하다.
평화·군축 문제는 남북 정상회담만으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맞는 말이다. 남북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북핵 문제처럼 국제사회의 협력이 필요한 문제도 있다. 적어도 군사적인 문제에선 남북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6자회담과 관련해서도 남북 정상이 만나 서로 의지를 재확인하고 정세 상황을 공유한다면, 2단계 불능화 조치를 가속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남북끼리만 평화협정을 맺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런 쪽으로 분위기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 정상회담을 만병통치약처럼 만들어놔선 안 된다. 어려운 상황에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게다. 남북 정상이 그 과정에서 기여할 수 있는 일이 있다.
한반도 문제 논의를 위한 남·북·미·중 4자 정상회담 개최 전망도 나오는데.
=남북 정상회담이 6자회담 진척을 원활하게 하고, 이행 속도를 높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를 통해 2단계 불능화 과정에 대한 일정한 합의가 이뤄진다면, 합의에 따라 한반도평화포럼이 구성될 수 있다. 정상회담이 이런 과정을 가속화할 가능성이 높다. 부시 행정부도 4자 정상회담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의지가 있다고 본다. 김 위원장이 합의한다면 가능성이 높아질 게다.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위해선 6자회담 진전이 기본 전제다. 이번 정상회담이 6자회담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고 북핵 불능화가 잘 이행되면 그때 4자 정상회담 가능성도 나올 수 있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특정 시점을 정해놓을 필요는 없다. 남북 관계도 그렇고, 북핵 문제나 북-미 관계도 순풍에 돛 단 듯 순탄하게 나아가지만은 않는다. 쟁점이 생기면 정리와 매듭이 필요한 법이다. 섣불리 예단하기 어렵다.
2·13 합의에 따라 해결 국면으로
이번 정상회담 이후 9월 초부터 6자회담 등 외교·안보 일정이 빡빡하다.
=정부는 크리스토퍼 힐 6자회담 미국 쪽 수석대표의 방북을 여러 차례 요청한 바 있다. 우리가 희망한 시점보다 기간이 오래 걸렸다. 2·13 합의에 따라 해결 국면으로 나아간다면….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시기는 늦어질 수 있다. 고속도로처럼 막힘 없이 나아가긴 어렵다는 게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의도했던 것들이 실현돼왔다. 1차 정상회담 때 빌 클린턴 행정부의 잔여 임기보다 현 부시 행정부의 잔여 임기가 많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부시 행정부 이후에도 미국의 대북정책에 큰 변화는 오지 않을 것으로 본다. 다음 정권에서도 연속성을 가지고 문제를 풀어갈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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