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글로 파문을 일으킨 구효송 교수…“우리 것”이라는 인식이 태권도를 망친다
▣ 최은주 기자 flowerpig@hani.co.kr
▣ 사진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태권도는 위기인가? 구효송 영산대 생활스포츠학부 교수는 그렇게 보는 쪽이다. 그는 지난 4월 “국내 태권도계의 부패와 지나친 민족주의가 태권도 발전에 방해가 된다”는 주장을 담은 글을 무예 전문지 에 기고해 국내 태권도계에 큰 파문을 낳았다. 그는 “윤리적 정당성이 결여된 한국의 태권도인들이 세계 태권도계를 이끌고 있는 게 현재 태권도계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이라며 “태권도의 핵심 업무를 국기원에서 세계태권도연맹(이하 세계연맹)에 이관하고, 한국인들이 장악한 세계연맹도 세계인들의 품에 돌려주는 것만이 태권도의 살길”이라고 주장했다.
김운용 밑에서 지나친 민족주의 작동
태권도 위기론을 외치고 있다. 위기의 원인은 뭔가?
=크게 두 가지다. 외인론과 내인론으로 따져볼 수 있다. 외인론은 장기적으로 올림픽 종목으로 잔류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태권도는 2년 전에 열린 117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가까스로 올림픽 종목에 남을 수 있었다. 그 과정이 쉽지 않았고, 앞으로 태권도가 꾸준히 올림픽 종목으로 잔류할 것이란 보장도 없다. 두 번째는 국기원으로 대표되는 한국 태권도계의 권위 실추다. 국기원은 세계 태권도의 중앙도장으로 단증 발급과 그에 수반되는 여러 업무를 총괄하는 권위를 갖고 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불거진 부정 단증 발급이나 부정 승단 시비, 국기원 핵심 관계자들의 비리 문제로 국기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상태다.
태권도가 직면한 위기의 핵심에는 국기원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국기원은 세계연맹에 소속된 기관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한태권도협회에 소속된 기관도 아니다. 세계연맹과 국기원이 각각 독립된 세계기구로 양립하고 있는데, 그 자체가 이미 모순 덩어리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태권도의 세계화가 진행되지 못한 1970년 초반에는 단증 발급 업무가 국내 태권도계의 문제였다. 국내 태권도계를 나누고 있던 9개 문파가 국기원으로 합쳐져 단증 업무를 담당했다. 초기에는 해외로 파견된 사범들이 직접 단증을 주거나 국기원의 단증을 받아 전달하는 수준이어서 국기원의 단증 발급 업무 독식을 문제 삼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태권도는 점점 세계화됐지만 태권도는 대한민국의 것이어야 한다는 지나친 민족주의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고는 박정희 독재체제 아래에서 세계태권도연맹, 대한태권도협회, 국기원의 수장 자리를 독식했던 김운용 체제를 통해 확대재생산돼나갔다. 1984년 7월부터 1987년 12월까지 세계연맹이 한국을 제외한 세계인들의 단증 발급 업무를 맡았던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세계연맹의 심사권은 다시 국기원으로 넘어왔다. 늘 ‘한국의 것’으로 여겨졌던 세계연맹이 우리 손을 벗어나 해외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경계심이 작동한 결과다. 거기에 몇 년 전부터 꾸준히 터져나온 비리 파문으로 국기원의 권위가 회복 불능의 상태로 추락했다.
외국 태권도계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당연하다. 이미 유럽태권도연맹(이하 유럽연맹)과 미주태권도연맹(이하 미주연맹) 등 세계연맹 산하 대륙태권도연맹(이하 대륙연맹)들이 국기원 단증을 거부하고, 자체 단증을 발급하겠다고 나섰다. 몇몇 대륙연맹에서 자체 단증을 발급하겠다고 나서면 우리는 이를 막을 명분이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도장 경영을 위해 태권도에 입문한 지 1년이 못 돼 1단을 딸 수 있다. 외국에서는 5년 이상을 수련해야 1단을 딸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외국에 ‘윤리적 정당성’을 주장하기 힘들다. 게다가 세계연맹도 아니면서 꼭 국기원에서만 단증을 따야 한다는 논리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한국 선수 나오면 야유 퍼붓는다
대륙연맹들이 자체 단증을 발급하면 어떤 변화가 예상되나?
=지금도 각국 태권도 협회는 자체 단증을 발급한다. 그러나 국제대회에 나설 때 각국 협회가 발행한 단증은 인정되지 않는다.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단증은 국기원이 발행한 단증뿐이다. 그러나 연맹 단증이 생기면 연맹 대회에서 자체 단증을 인정할 것이고, 그런 흐름이 이어지면 세계연맹도 대륙연맹 단증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세계연맹을 구성하는 것이 대륙연맹들이기 때문이다. 세계 태권도의 중앙도장인 국기원의 권위를 존중하는 세계연맹의 정관 개정이 불보듯 뻔하다. 물론, 각 대륙연맹들이 단증을 자체 발급하겠다고 나서는 데는 태권도의 가장 큰 ‘이권 사업’을 가져와 열악한 재정을 확충하겠다는 계산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국기원의 단증 발급이 태권도 종주국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우리에게 이익이 아닌가?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국수주의적 태도이다. ‘태권도는 내 것’이라는 생각이 오히려 태권도를 망하게 할 수 있다. 부정 단증을 발급해 돈을 벌고, 올림픽 금메달 하나 더 따기 위해 부정을 저지르고, 이런 게 쌓이면서 반한 감정이 생긴다. 요즘 외국에서 태권도 경기를 할 때 분위기가 어떤 줄 아나? 외국인들이 한국 선수가 나오면 야유를 퍼붓는 게 다반사다.
이란에서 국제대회가 하나 열렸다. 내 제자가 직접 겪은 일이다. 제자가 보기에 이란 심판관들의 부정 심판이 많았던 모양이다. 제자가 이란 선수에게 “이렇게 부정 심판을 많이 해도 되냐”고 물었다. 이란 선수한테서 “그거 다 니들한테 배웠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제자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 이렇게 하다가는 정말 태권도는 물론이고 한국의 이미지도 나빠진다(이종우 전 국기원 부원장은 2002년 4월치 와의 인터뷰에서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있었던 승부 조작 경험을 구체적으로 털어놓기도 했다).
내 얘기는 메달 하나 덜 가져와도 좋으니 태권도 자체를 살리자는 것이다. 종주국이기 때문에 단증을 발급해야 한다는 논리는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태권도가 세계로 뻗어나간 지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영원히 우리는 가르쳐야만 하고, 그들은 우리가 주는 단증을 받아야만 한다는 건 잘못됐다.
국기원의 잘못된 행적 책임 지는 계기
대안은 뭔가?
=국기원 단증을 세계연맹에 넘겨야 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충분히 논의하고 검토해야 한다. 세계연맹에 단증을 넘기고 대륙연맹을 설득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대륙연맹에서 자체적으로 단증을 발급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국기원이 대륙연맹들을 설득하기는 힘들다. 이번 사건은 국기원 이사진 등이 자신들의 잘못된 행적에 대해 책임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잘못된 게 많은데 누구 하나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다. 에 글을 쓴 뒤 이근창 국기원 기조실장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왜 그런 글을 썼냐? 글을 함부로 쓰면 안 되지 않냐?”고 하더라. 또 나에게 “제재를 가할 수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제재를 가하냐?’고 묻자 이 실장은 “국기원 이사회 회의에서 구 교수의 단증을 철회하겠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말했다. ‘태권도는 한국 것이다’라는 관념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태권도도 살고 우리나라도 산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속보] 경찰, 윤석열 체포 작전 광역수사단 지휘관 회의
고립되는 윤석열…경찰 1천명 총동원령, 경호처는 최대 700명
“임시공휴일 27일 아닌 31일로” 정원오 구청장 제안에 누리꾼 갑론을박
“낙인찍힐까봐 서 있기만, 지휘부 발악하는 듯”…경호처 직원 SOS
출석 요구 3번 만에 나온 경호처장 “대통령 신분 걸맞은 수사해야”
“최전방 6명 제압하면 무너진다”…윤석열 체포 ‘장기전’ 시작
검찰, ‘롯데리아 계엄 모의’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 구속 기소
25년 경호 공무원의 조언 “대통령 ‘개인’ 아닌 ‘공인’ 지키는 것”
또 튀려고요? [그림판]
[단독] 최상목, 윤석열 영장 집행에 원론 반복…“질서있는 법 집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