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어가는 대한제국에 몰려와 고려청자 등을 마구 도굴해간 일본인들…반환 요구에 일본 정부는 “한-일협정으로 마무리됐다”는 입장 고수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햇수로 5년 전 일이다. 2002년 2월4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은 일본의 한국 문화재 약탈 문제에 대한 네 쪽짜리 특집 기사를 썼다. ‘잃어버린 유산’(A legacy lost)이란 제목이 달린 장문의 기사에서 은 “문화재 약탈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는 유럽과 달리 한국에서는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연구되지 못했다”며 “사람들이 이 문제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분석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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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돌려받은 유물 4800여 점
일본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복잡미묘한 심리를 이해할 수 없는 서구 언론의 단정적 표현이 거슬리긴 했지만, 그 지적은 뼈아픈 것이었다. 지난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우리가 해외로 흩어진 조상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대화하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은 ‘무관심’이 아닌 ‘체념’에 가까운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외부인의 시선으로 볼 때 그것은 ‘태만’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될 수 없는 기묘한 현상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로부터 5년의 시간이 흘렀고, 조금씩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적잖은 유물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후손의 품으로 돌아왔다. 가장 두드러진 예는 2005년 10월20일 일본 야스쿠니신사로부터 돌려받은 정문부 장군의 북관대첩비다. 비석은 1905년 러일전쟁 때 함경 지방에 진출한 일본군 제2예비사단 이케다 마시스케 소장이 강탈한 것으로, 야스쿠니신사 한구석에 방치돼 있었다. 비석은 정수리의 이수(비석의 머리 등에 용 모양을 아로새긴 형상)가 뜯긴 채 1t이 넘는 무거운 머릿돌에 짓눌려 있었다. 머릿돌을 비석에서 떼어내기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 직원들은 드릴을 동원해가며 몇 시간이나 애를 먹어야 했다. 그 밖에 조선 말기 대학자 추사 김정희(1786~1856)를 연구했던 일본학자 후지쓰카 지카시(1879~1948)의 아들로부터 2006년 2월 추사의 미공개 친필 편지(간찰), 글씨 등 24점을 기증받았고, 1913년 일제가 도쿄제국대학으로 멋대로 가져간 오대산 사고본(47책)도 2006년 7월 돌려받았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가 말 그대로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받기 위한 정부 간 대화도 진행 중이다. 그 대화가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도서 반환 소송을 벌이자는 민간 차원의 움직임도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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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문화재청이 작성한 ‘해외 소재 우리 문화재 환수 현황’ 자료를 보면, 해방 이후 지금까지 우리 정부가 돌려받은 해외 유물들은 모두 4800여 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 등 정부 간 협정에 따라 환수된 것들이 1660점, 민간인들과 외국 정부들이 기증한 물품이 2881점, 박물관이 외국의 유물 소장자에게 돈 주고 사들인 것이 330여 점이다. 문화재청은 해외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가 20여 개 나라, 7만5천여 점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중엔 합법적인 경로를 통해 반출된 것들도 있지만, 상당수가 불법적으로 유출됐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일제에 의한 우리나라 문화재 유출사는 허탈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지루한 신파극 메들리 같은 느낌이다. 저물어가는 대한제국으로 몰려든 일본 도굴꾼들이 가장 탐냈던 것은 개성 주변의 무덤을 파면 무더기로 쏟아져나오던 고려청자였다. 그 무렵 도굴꾼을 뜻하는 은어인 ‘호리꾼’이란 말이 만들어졌다. 호리꾼은 굴을 판다는 뜻의 ‘호리’(掘)에 ‘꾼’을 합친 말이다. 호리꾼들이 파낸 명품 고려청자를 싹쓸이했던 것은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 시절까지도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우리나라에 찬란한 청자 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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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를 본 고종 “이건 어디서 만들어졌나”
일본의 우리나라 문화재 약탈사에 대해 많은 글을 남긴 이구열 선생의 (돌베게·1997)라는 책에는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오간 웃지 못한 대화 한 편이 소개돼 있다. 한국의 도자기 문화를 연구했던 일본인 아사가와 다카나리가 창덕궁 이왕가 박물관장으로 있던 스에마스 구마히코에게 들었다는 일화다. 1909년 3월쯤 아직 창덕궁 박물관을 일반에 공개하기 전의 일이다. 박물관에는 개성의 옛 무덤에서 도굴된 고려청자 여러 점이 전시돼 있었다. 어느 날 이토 통감의 안내로 박물관 진열품들을 구경하게 된 고종황제가 고려청자를 보고 이토 통감에게 물었다. “이 푸른 그릇들은 어디서 만들어진 것이오.” 이토는 “이 나라의 고려시대 것입니다”고 설명했다. 고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는 없는 것이오”라고 말했다. 이토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남의 무덤을 파헤쳐 건져낸 도굴품이라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도굴된 고려청자를 비롯한 국보급 유물들은 대구에서 전력회사를 운영하며 큰돈을 모은 오구라 다케노스케(1896∼1964) 같은 일본인들의 손을 거쳐 도쿄국립박물관과 일본인의 개인 소장품으로 남아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한-일협정 때 1100점에 이르는 오구라 수집품의 반환을 요청했지만, 개인이 모은 컬렉션이란 이유로 돌아오지 못했다. 오구라 컬렉션은 일본 중요문화재 8점을 포함한 39점이 일본 국가문화재로 지정될 정도로 세계에서 보기 드문 개인 수집품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오구라 컬렉션’은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 3층에 전시돼 있다.

그렇지만 이들 유물을 돌려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인다. 일본은 “약탈한 유물을 돌려달라”는 우리 쪽의 요구에 대해 “그것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마무리됐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반출해간 문화재들이 ‘약탈 문화재’인지에 대한 판단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다. 2006년 7월 도쿄대로부터 돌려받은 오대산 사고본이 약탈 문화재인지를 묻는 손봉숙 민주당 의원의 2006년 국정감사 질의에 대해 문화재청은 “판단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나라 문화재보호법에 약탈 문화재라는 정의가 없는데다, 문화재의 불법 반출입 개념을 규정한 국제 규약인 유네스코의 ‘문화재의 불법 반출입 및 소유권 양도의 금지와 예방 수단에 관한 협약’(1970년 채택) 채택 이전에 이뤄진 반출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우리가 먼저 시작할 수는 없을까
해외로 흩어진 우리 유물들을 당장 돌려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같은 논리로, 우리가 수십 년 동안 애지중지 지켜온 서역 유물을 투루판 등에 돌려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조상들이 이룩한 문화유산을 가꾸고 지키고 싶어하는 후손의 마음은 기본적인 양식을 지닌 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원칙’이다. 원칙을 현실로 만들려면 상상력이 필요하고, 상상력은 세상을 바꾼다. 우리가 먼저 시작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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