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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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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력에서 경제권력으로

등록 2006-12-07 00:00 수정 2020-05-03 04:24

‘정경유착’의 고리는 그대로지만 시대 흐름에 따라 관계 양상은 달라져…개발독재 시절 정부가 우위에 있었으나 점점 확고한 재벌 우위의 시대로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행정부를 포함한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재벌)이 관계를 맺는 양상은 시대 흐름에 따라 뚜렷한 변화를 보였지만, ‘정경유착’이란 음습한 이미지는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의 개발독재 체제 아래에선 ‘정치권력 우위의 유착관계’로 평가된다. 재벌체제가 막 생겨나기 시작하던 때여서 경제권력의 힘은 미약했다. 정치권력 내부의 역학관계에선 정치권이 행정부(관료사회)를 압도하던 시기였다. “대통령이 과장, 국장을 불러 업무를 논의할 정도로 행정부 내 위계질서가 갖춰지지 않았다. 정치권이 관료체계를 쥐고 흔들 만큼 우위를 보이던 시절이었다.”(김기원 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

은행 지배로 재벌을 다스리다

개발독재 시절 정부가 민간 부문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던 열쇠는 은행 지배였다. 장상환 경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는 1999년에 펴낸 논문 ‘정경유착과 한국자본주의’에서 “(은행 지배를 통해) 여신 배분을 정부가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정부가 원하는 어떠한 명령에도 민간기업이 순응하도록 하는 강력한 도구였다”고 밝혔다. 자본시장이 발달돼 있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은행 여신은 기업들에게 곧 ‘생명줄’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외국자본 도입, 8·3 사채동결 조처(1972년), 중화학공업 육성책 등을 통해 재벌을 키웠고, 정권은 그 대가로 대규모 정부 사업에서 일정 비율을 정치자금으로 받아 챙겼다. 외국차관 도입 과정에서도 정치자금의 거래가 이뤄졌다. 현대, 삼성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은 이 시기 정책금융과 여신관리를 고리로 삼은 정경유착을 통해 성장했다.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도 정경유착은 여전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엔 중화학 투자조정 과정에서 정경유착 사례가 많았다. 노태우 정권에선 한보건설과 정권의 유착 사건인 수서비리 사건이 있었다. 이런 유착관계를 통해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받은 뇌물은 드러난 것만 해도 2259억5천만원에 이르렀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약 5천억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비자금을 조성했다. 박정희 정권 때와 달랐던 대목이라면 재벌의 힘이 부쩍 커져 정치권력과 엇비슷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1980년 신군부 주축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재벌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을 견제하고자 공정거래법을 입안하고 1986년 12월 말 법을 개정해 규제조항을 강화한 데서 이런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상호출자 금지, 출자총액제한 장치가 도입된 게 이때였다. 한 해 앞선 1985년 3월 ‘금융기관 여신운용 규정’의 개정을 통해 계열기업군 여신관리제도를 도입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1995년 이건희 회장의 “정치 4류” 발언

김영삼 문민정부 시절인 1995년 4월에는 경제권력의 힘이 정치권력을 앞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이른바 ‘베이징 발언’이다. 이 회장은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우리나라의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 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라는 요지의 발언으로 정치권 안팎에 파장을 일으켰다.

재벌은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몰려 김대중 정부에선 잠시 위축된 모습을 보이는 듯했지만, 오래지 않아 화려하게 부활했다. 외환위기 뒤 구조조정 과정을 통해 재무구조를 튼튼하게 다져 은행에 대한 의존성을 털어냄에 따라 정부의 통제를 받을 일이 거의 없어졌다. 규제 완화 바람으로 재벌을 묶어두는 장치가 약해지고, 선거를 통해 정권 교체가 이뤄지면서 관료사회와 정치권의 통제력은 점점 줄어들었다. ‘X파일’(옛 안기부 불법도청 테이프) 사건에서 폭로됐듯 이제 재벌이 고위관료의 인사권에까지 개입하는, 확고한 재벌 우위의 정경유착 시대에 접어들었다. 참여정부 들어선 재벌 중에서도 삼성의 헤게모니가 두드러진다는 점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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