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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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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도 한국도 “니 탓이오”

등록 2006-10-19 00:00 수정 2020-05-03 04:24

워싱턴에서 북한 핵무기 실험 사태를 관전한 평화운동가의 착잡한 심경…극우 언론의 광기와 외교 봉쇄 발언에 아찔하여 한국 분위기를 살피니…

▣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미 조지워싱턴대 방문연구원 wooksik@gwu.edu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베이징 주재 북한 대사관이었던 것 같다. 나는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북한 대사관에 들어가 김 위원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다.

경비원들에게 사지가 들려 끌려나오면서 직감적으로 ‘꿈’이라는 것을 알았고, 이내 눈을 뜨고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혀 달라진 힐 차관보

직업병 때문일까? 아니면 과대망상일까? 북한이 핵실험을 하겠다고 발표한 10월3일, 하루 종일 불안감과 무력감에 휩싸인 채 지내야 했다. 그러다 잠자리에서 김 위원장을 만나는 상상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마 50여 년 전 통일 방안을 들고 임진강을 헤엄쳐 건너가 북한 지도부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던 평화주의자 김낙중 선생님의 얘기가 떠올랐을지 모르겠다. 아니라면 절대반지를 들고 운명의 산을 찾아 떠났던 프로도의 영향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꿈속에서도 김 위원장은 여전히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북 외무성이 핵실험 계획을 발표한 다음날, 워싱턴 존스홉킨스대 한미관계연구소 창립 기념 토론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6자회담 미국 쪽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를 볼 수 있었다. 지난해 5월 초 미 국무부에서 그를 면담한 이후 처음이다. 이른바 ‘6월 위기설’이 나돌던 그때 어떻게든 한반도 정세를 반전시키겠다는 생각으로, 힐 차관보에게 유도성 질문을 퍼부어댔던 기억이 새롭다. 결국 당시 힐에게서 “우리는 북한에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고, 북한과 평화적으로 공존할 의사가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1년5개월은 긴 시간이었다. 먼 발치에서 본 그는 이날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는 정반대의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의 말 가운데 한마디가 뇌리에 박혔다. “우리는 핵을 가진 북한과 공존하지 않을 것이다.” 문득 “핵을 가진 북한과는 악수하지 않겠다”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첩첩산중에 있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만나 보스니아 분쟁을 종식시킨 경험을 자랑스럽게 늘어놓던 ‘주한 미국대사’ 힐의 모습도 새삼 떠올랐다. 북한에서 오라고 해도 (부시 행정부 강경파의 반대로) 평양 땅을 밟지 못해 답답해하던 그가 ‘외교의 종말’을 내비치는 발언을 하다니….

이날 토론회에서 힐 차관보에 대한 간접적인 질책은 전직 주한 미 대사들이 맡아줬다. 이들은 닉슨의 중국 방문과 레이건 시대의 미-소 정상회담을 언급했다. “왜 부시 행정부는 북한과 대화하지 않느냐”는 비판이었다. 토론회에 참석했던 데이비드 스타인버그 조지타운대 명예교수는 며칠 뒤 또 다른 토론회에서 발제를 통해 “언론은 힐 차관보의 발언은 다뤘지만, 정작 중요한 전직 대사들의 충고는 전혀 다루지 않았다”며, 미국 언론의 보도 태도에 강한 유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들의 목소리는 언제쯤 힘을 얻을 수 있을까.

한국에서 ‘운동’(movement)으로 상한 몸, ‘운동’(sports)으로 회복하기로 마음먹고 미국에 와서 다시 농구를 시작했다. 10월8일 밤에도 아파트 지하에 있는 실내 농구장에서 땀을 흘리고 집에 돌아와 버릇처럼 텔레비전을 켰다. ‘아뿔싸~, 올 것이 왔구나!’ <cnn> 방송이 북한의 핵실험 소식을 긴급 뉴스로 타진하고 있었다. 한국과 중국, 일본에 나가 있는 특파원들이 앞다퉈 숨가쁜 소식을 전해왔고, 백악관과 국무부·국방부 출입기자들을 수시로 연결하면서 밤이 새도록 핵실험 소식을 긴박하게 전했다. 덕분에 밤을 꼬박 지새우고 말았다.

미국을 가르고 남북을 가르고…

이튿날에도 미국 언론의 ‘광기’는 이어졌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즐겨본다는 ‘극우방송’ 은 북한 핵실험을 다루면서 ‘미치광이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김정일 위원장의 권력승계 과정을 자세히 보도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전세계 각국이 쏟아내는 대북 비판 여론을 다루다가, ‘가재는 역시 게 편’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려는 듯 “북한의 핵실험은 미국의 위협과 모독에 대한 반응”이란 이란 쪽 논평을 불쑥 끼워넣기도 했다. ‘김정일과 아마디네자드 두 미치광이가 지구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게다.
지구의 평화가 위협당하고 있으니, ‘독수리 5형제’가 다시 뭉칠 수밖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경고를 무시한 북한을 응징하기로 작심한 듯, 핵실험 발표 직후 곧바로 대북 제재 논의에 들어갔다. ‘독수리 5형제’의 일원이자 북한의 ‘형제국’인 중국으로 세계의 눈과 귀가 쏠렸다. 하지만 중국은 “적당히 하자”며 몸 사리기에 바쁘다. ‘5형제’에 끼지 못한 일본은 안보리 순번 의장국이란 지위를 내세워 ‘형제국’ 미국과 함께 대북 제재를 주도하고 있고, 성에 안 찼는지 독자적인 대북 제재안까지 내놓고 있다.



헛헛한 마음에 한국 분위기를 살피려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런데…. ‘망진자(亡秦者)는 호야(胡也)’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진시황은 진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호’(오랑캐)라는 예언을 듣고 변방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하지만 진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오랑캐가 아니라 그의 자식인 ‘호해’였다. 이역만리 워싱턴에 날아와 있으니, 한숨이나 푹푹 쉴밖에.
미주 한인 사이트에선 “북한이 핵을 갖게 됐으니, 이제 전쟁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글을 쓴 네티즌이 뭇매를 맞고 있었다. 어떤 이는 “전쟁 날까 두려워 한국에 있는 부모님 생각하면서 밤새도록 울었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북한의 핵실험은 이렇게 남북을 가르고, 남한 내부를 가르고, 태평양 건너에 있는 동포 사회를 가르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북한의 핵실험은 그렇잖아도 뜨거운 정파 간 논쟁을 더욱 후끈 달아오르게 하고 있다. 다만 한국에선 대북 포용정책이 공격 대상이라면, 이곳 미국에선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책이 주된 비판 대상이다. 민주당은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북한의 핵무장을 방치하고 말았다”며 공세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에 질세라 공화당에선 “민주당의 적은 김정일이 아니라 부시인가 보다”며 ‘색깔론’을 들고 나선다. 한국의 정치판을 빼닮았다.

2008 대선을 의식한 책임 논쟁

더욱 가관인 것은 ‘책임 논쟁’이다. 민주당이 “북한의 핵실험은 부시 행정부 대외정책의 실패를 상징한다”고 비난하고 나서자, 부시 행정부와 공화당은 “북한의 핵무장은 클린턴 행정부 탓”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클린턴 행정부가 1994년 북핵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지 못하고 “악행을 보상한 것”이 오늘의 화근을 키웠다는 것이다. 두 당의 ‘책임 논쟁’이 격화하는 것은 ‘북핵’에 대한 관심 때문이라기보다 2008년 대선이 눈앞에 다가온 탓이 큰 듯싶다.
네오콘이 쳐놓은 덫에 걸려 허덕이는 북한이 딱하다가도 화가 치민다. 조금만 마음을 고쳐먹으면 될 일을 마다하는 부시 행정부가 원망스럽다. ‘제2의 DJ’가 될 것으로 믿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제2의 YS’가 돼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밤이다. 오래전부터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던 불안감이 온몸으로 조금씩 퍼지고 있는 느낌이다.
</c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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