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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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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점순 여사의 독립선언

등록 2006-06-08 00:00 수정 2020-05-02 04:24

내 나이 예순다섯, 내 인생에 찾아온 마지막 봄을 즐기겠노라…아침에 화장하고 복지관 강좌 듣고 남친과 놀러갈 준비하는 하루

▣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노인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김계자(60)씨. 모델로 활동한지 햇수로 10년째를 맞은 김씨는 은행광고 등 다양한 TV 광고와 지면 광고 모델로 활약하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김없이 6시야. 나이 쉰에는 밤마다 잠이 안 와서 고생했는데, 지금은 환갑이 넘었는데도 푹 자고 개운하게 일어나. 낮에 이 몸이 엄청 바쁘거든. 많이 움직이고 많이 떠들고 머리를 써서 그런지 밤만 되면 아이고, 그냥 잠이 쏟아져. 일어나면 우선 집에 있는 영감 밥을 올려놔. 영감이라고 집구석에 들어앉아서 도통 나가지를 않거든. 밉상이라도 밥은 대충 차려줘야지. 곰국이 딱이야. 한번 끓여놓으면 영감이 알아서 일주일을 차려먹거든.

세수하고 머리 구루프 말아놓은 다음엔 화장해야지. 나이 마흔 때도 밀크로션만 바르거나 아예 안 했어. 근데 지금은 더 신경쓰여. 칠순 되면 어떤 남자가 날 봐주겠어? 나 이제 마지막이라고. 내 나이 예순다섯, 내 인생에 찾아온 마지막 봄이란 말야. 볕 환하게 들어오는 베란다 가서 거울 놓고 보면 더 잘 보여서, 요즘엔 베란다 나가서 화장한다니까. 그리고 옷 차려입어야지. 나는 옥색이나 은은한 분홍색이 그렇게 잘 받아. 지난주에도 백화점 가서 옷 사느라 3시간을 헤맸어.

7시30분에 집에서 나가. 8시에 노인복지관 셔틀버스가 오거든. 좀 일찍 나가 산책하다가 버스를 타지. 복지관에 가면 9시부터 컴퓨터 수업이야. 배운 지 1년 됐는데, 이제는 메일 보내고 카페 만들고 그런 건 할 줄 알겠더라구. 얼마나 신기하고 재밌는지 몰라. 11시엔 재즈댄스 강좌야. 2년 전부터 시작했는데 무릎이 안 좋아서 반년 쉬었어. 근데 그게 안 하니까 그렇게 좀이 쑤셔. 팔다리가 좀 아파도 하는 게 훨씬 낫더라구. ‘쿵짝 쿵짝’ 음악을 들으면서 춤 한번 추면 땀이 쫙 빠진다니까.

점심은 친구들이랑 지하철 타고 나가서 먹어. 나이 들어도 절대 안 변하는 게 하나 있어. 뭔지 알아? 입맛이야. 나이 들면 맛있는 것만 그렇게 챙기게 된다니까. 오늘은 순두부 잘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 한번 가봤어. 점심 먹으면서 박 여사 얘기를 좀 했어. 박 여사가 혼자 된 지 오래거든. 요즘 복지관에서 최 선생이랑 잘돼가냐고 물었더니, 글쎄 촐싹대는 김 여사가 그렇게 둘 사이를 방해한다네. 기가 막혀.

오늘은 수요일이니까 점심 먹고 나서 슬슬 백화점 문화센터에 갔지. 수묵화 강좌를 듣거든. 예전부터 그림을 좋아했어. 그런데 그 실력을 육십 줄이 돼서야 발견한 거야. 문화센터 강사가 “젊었을 때부터 했으면 성공하셨겠습니다” 그러더라고. 아이고, 억울해. 지난번에는 사군자 그려서 입선도 했는데, 젊었을 때부터 했으면 내가 이러고 있진 않은 건데.

오는 길에 백화점에 들렀어. 내일 청계산 올라가기로 했거든. 선글라스 하나 사려고. 누구랑 가냐고? 공인중개사 최 사장이랑 같이 가. 다음달에는 복지관 친구들이랑 곗돈 부은 걸로 중국도 갈 거야.

내 나이 예순다섯, 이제 내 맘대로 살 때도 됐지. 오히려 요즈음 젊은 아이들처럼 진작에 남편과 자식에게서 독립선언을 했어야 하는데 후희가 돼. 늘그막에 무슨 바람이냐고? 난 그냥 늦게나마 나 ‘김-점-순’을 찾은 것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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