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하루 세번, 정치경제학 되새기기

등록 2006-04-04 00:00 수정 2020-05-02 04:24

페미니스트에게 비육식의 의미…당연시되는 폭력들에 대한 저항… 벌거벗은 닭을 보며 가부장제와 제국주의, 환경파괴를 고민하다

▣ 박소연 버지니아텍 박사과정(과학기술학)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내게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고 심각하게 묻지 않는다. 그저 채식주의자냐고 한마디 묻는 정도. 한국에 불어닥쳤던 웰빙 바람 덕분인지, 건강하려면 골고루 먹어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사람도 별로 없다. 고맙다. 타인이 나의 식생활을 일일이 간섭한다면, 분명 귀찮고 성가실 것이다.

정육점과 홍등가의 빨간 불빛

그렇지만 때로 어떤 침묵은 관용이 아니다. 어떤 침묵은, 무관심에서 나온 무지, 무지가 불러오는 무시의 다른 이름이 될 수도 있으니까. 나는 어떠한 이유로 들짐승, 날짐승 먹기를 그만두었는지 시시때때로 타인에게 이야기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나와 그들이 먹는다는 행위의 적어도 일부분은 불편한 일이어야 한다. 그 불편함으로 인해, 식품으로 존재하는 것들 이면에 작동하는 다양한 정치를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내가 그 이야기하기를 그친다면, 비육식이라고 하는 내 선택은 개인적이지만 정치적이지는 못한 기껏해야 좀 금욕적인 습관으로 변질될지도 모른다. 육식하는 문화에 불편하게 말을 걸어주어야겠다.

육식을 권하는 문화는 사회적 약자를 만들고 타자의 희생과 침묵을 강요하는 문화의 이면이다. 팔려지기 위해, 또 요리되기 위해 통째로 벌거벗고 누워 있는 닭을 바라보는 일은 언제나 불편했다. 저항조차 포기당한 극단적 폭력의 상황에서, 무기력하게 벌거벗고 다리 벌린 채 누워 있는 사람의 형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홍등가를 지날 때 정육점의 빨간 불빛을 연상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 이미지가 주는 불편한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내게 분명하게 부각되면서, 더 이상 고기를 고집하고 싶은 욕구도 사라졌다. 육식의 문화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여겨질수록, 그 폭력은 늘 은폐되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데, 사실상 침묵하는 우리는 폭력에 공모할지도 모르니까.

소나 돼지, 닭은 생명을 가지고 있는 순간에조차 도축장으로 끌려가기 위한 전 단계인 식용동물로서만 존재한다. 이들이 한때 생명으로 존재했던 과거, 즉 이들에게 고통을 가했을 폭력들은 쉽게 잊혀진다. 모피를 입지 않겠다는, 혹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내 생각을 종종 ‘동물권 옹호’로 연결시키는 사람들이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페미니스트인 내게 비육식은, 크고 작은 폭력들이 연대하고 당연해지는 바로 그 맥락을 대하고 저항하는, 의미를 지닌 한 가지의 실천이다. 육식문화가 자연스럽고 지배적인 식생활이 되어갈수록, 우리는 점점 약자에 대한 폭력에 둔감해질 수 있다.

비판해왔던 삼라만상과 맞닿아 있다

사실 페미니스트가 육식을 멀리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란 없다. 그렇지만 페미니스트로서 비육식을 실천해야 할 이유는 충분히 많다. 페미니즘이 다양한 정치적 실천을 매개하는 만큼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가령 가부장제와 남성문화 그리고 육식문화가 연결되는 지점에서, 축산업의 제국주의적·자본주의적 성격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육식과 환경파괴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유로 비육식은 페미니즘과 코드가 맞아떨어진다. 왜일까.

고백건대 개인적으로 처음 고기 끊기를 결심했을 때는 다양하고 거창하고 다양한 이유보다는 맥도널드의 세계화에 대한 체질적 거부감 정도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육식을 멀리할수록, 지나쳐왔던 세상의 이면이 점점 더 크게 각인됐다. 신기하게도 사실로 존재했지만 과거엔 무관심과 무지와 무시의 영역에 존재했던 육식을 둘러싼 정치적 문제들은, 내가 페미니스트로서 비판해왔던 삼라만상과 정확하게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바꾸길 원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실천하라고 했던가. 페미니스트인 나는 하루에 세 번, 식탁의 역사를 바꾸기를 원하며, 식품이 내 식탁에 오기까지의 정치경제학을 한 번 더 되새기길 원한다. 남성주의적이고 가부장주의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제도화한 폭력과 권력에 불편하게 말거는 것, 그것이 페미니즘이니까.



채식가의 행복, 음식의 재발견

만들기 쉽고 맛깔나는 채식 요리 두 가지, 함께하실래요?

육식을 멀리한다는 것이 먹는 기쁨을 빼앗아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비육식이 생활의 발견이자 음식의 발견이었으니까. 또 한 가지. 사실 생각보다 거창하거나 골치 아픈 일도 아니다.

▲들깨향 나는 초록비빔밥
지난해에는 집 뒤뜰에서 깻잎을 키웠다. 깻잎이 자라면서부터 즐겨 해먹던 비빔밥이다. 뭐 딱히 어디서 먹어본 적은 없으니까 마음대로 이름 붙였다. 이름하여 ‘들깨향 나는 초록비빔밥’. ‘들깨향이 나는’이라 수식한 것은, 보통 비빔밥에 쓰는 참기름보다는 아무래도 들기름을 살짝 얹어주는 것이 이 비빔밥에 제 맛을 더하기 때문이다. 엄마가 직접 짜온 들기름을 한국에서 공수해와서인지 향이 정말 좋다.


‘초록비빔밥’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별 이유까진 없다. 통상 쓰는 재료들이 초록색이라는 게 이유라면 이유랄까. 지난해 여름 한국에서는 새싹 비빔밥이 유행이었다. 꽤 맛있었는데, 아쉽게도 이곳에선 새싹 공수하기가 녹록지 않다. 봄인 만큼 약하게 간한 산나물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어도 맛있으련만, 올해는 나물도 없다. 그러나! 깻잎과 상추로 만들어먹는 초록비빔밥도 맛이 상당히 괜찮은 만큼 추천. (비빔밥 위의 달걀이 뻘줌해 보일 수 있겠다. 동네 농장에서 항생제, 인공 조명, 동물 사료 안 쓰고 방목했다고 주장하는 달걀이다.)

재료: 상추, 깻잎, 호박, 오이, 기타 냉장고에 있는 야채들
비빔장 재료: 고추장, 간장, 다진 파, 다진 마늘, 깨
기타 준비물: 필수! 들기름
1. 잎 야채는 잘 씻어서 잘게 썰고, 호박과 오이는 약간의 소금과 깨를 뿌려서 볶아준다.
2. 비빔장 재료도 한데 섞어서 만든다. 분량은 ‘적당히’가 정답이지만 고추장 한 스푼에 나머지 양념 합한 거 한 스푼 정도 비율이면 알맞지 않을까. 요리는, 창의력입니다.
3. 밥 위에 야채와 비빔장을 얹고 들기름을 뿌려서 맛나게 먹으면 행복해진다.

단백질 완전정복: 콩과 버섯
단백질 결핍을 우려하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 채식주의자에게는 콩과 두부, 버섯류가 있다. 요것들은 무궁무진한 응용이 가능한 재료인지라 적극 추천할 만하다. 가령 두부는 부침과 찌개류, 두부야채전으로, 버섯은 각종 국물이나 볶음 요리에서 ‘고기’가 들어가는 모든 곳에서 훌륭하게 제 몫을 해내는 이쁜이다. 밑반찬 삼아 종종 해먹는 콩자반도 식물성 단백질 공급원이다. 호르몬 대체요법의 위험성이 논란이 되면서 최근 콩이 완경기 증상 완화에 효과가 있는 자연식품으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청국장·된장·두부랑 너무 친하게 지내는 나인 만큼, 유전자 조작 콩 문제에 대해선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깐풍 두부


깐풍기의 레시피를 두부에 응용해 ‘깐풍 두부’라 이름 붙였다. 원래 중국음식에서 ‘기’는 닭이라니, 이 음식의 제대로 된 제목은 깐풍 두부쯤 되겠다. 인터넷에서 얻은 레시피를 약간 덜 달게 변형했다. 너무 간단한 음식이 그럴싸한 한 접시 요리가 된다. 작은 두부 반모로.

1. 단단한 두부 반모를 깍둑썰기해서 옥수수 전분을 살살 묻혀둔다.
2. 케첩 6큰술, 간장 2큰술, 설탕 반큰술, 마늘 약간, 고춧가루 약간을 미리 섞어둔다(만약을 위해 소스를 넉넉히 만들어두는 것도 요령!).
3. 기름을 넉넉히 해서 두부를 튀긴다. 두부가 다 튀겨졌을 때 소스 냄비에 불을 켜고 그 안에서 튀겨진 두부를 굴려준다. (끝!) 나는 소스에 잣도 넣고, 촬영을 위해 파란 깨도 좀 뿌려놓는 센스를 발휘했다. 요리는, 창의력입니다.

국물 내는 법
고수라면, 야채 육수를 미리 넉넉히 만들어서 냉동했다가 쓰겠지만, 나는 다시마와 양파, 말린 버섯 불린 국물로 맛을 내는 편이다. 말린 버섯은 불린 뒤 건더기는 고명으로, 국물은 육수로 사용한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