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0 사회체제 미래 예측… 동아시아 나라들의 국경이 사라져버린 시대
영어 대신 중국어가 일상에 쓰이고 일 안 해도 ‘사회적 임금’ 지급돼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직장인 대길님은 잠에서 깨고 나서도 몇 분 동안 사색에 잠긴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급하게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신체 리듬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몇십 년 전 같으면 아침에 여유를 부리는 사람에게 ‘지각’ ‘경고’ ‘해고’ 같은 무시무시한 단어들이 곧 떨어졌을 것인데, 개인마다 바이오리듬대로 직무를 볼 수 있도록 ‘개체화된 근무 체제’가 잡힌 뒤에는 기존의 일률적인 출퇴근 시간이 무너졌다. 아침형 인간들이 일찍 직장에 나오고 대길님 같은 ‘올빼미’들이 늦게 출근해 남보다 늦게 퇴근하는 것이 요즘 직장 문화다.
아랍어·스페인어·베트남어 공부 열풍
대길님이 30대였을 때는 아들에게 아침을 만들어주고 남편의 요리솜씨를 늘 높이 사주는 아내에게 도시락을 싸주느라 어쩔 수 없이 일찍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된 아들은 이미 애인과 따로 살림을 마련했고, 아내는 요즘 음식을 알아서 챙겨나가는 풍토다. 2020~30년대엔 가부장제가 드디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고 기뻐하던 여성들이 남편이나 동거남에게 까다로운 요리를 주문하는 것을 재미로 알았는데, 가사의 동등한 분담이 일상이 돼버린 요즘에는 그 열풍이 조금 시그러졌다.
아침에 가벼운 요가로 몸을 풀고 주스 두 잔 마시고 역시 부담이 안 되는 빵 요리로 요기를 한 대길님은 우편함에서 <둥야징지>(東亞經濟)를 꺼내 고속철도역으로 향했다. 21세기 초반에 부모 세대가 까다로운 영어를 익히느라 고생하던 것을 대길님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데, 요즘 동아연합에서 영어란 가끔 외부인을 접할 때 쓰는 대외용 언어지 중국어처럼 직장에서 날마다 쓰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상하이에서 본사를 두고 동아연합 곳곳에서 현지 발간되는 <둥야징지>를 하루라도 안 읽으면 곧 낙오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참, 수십 년 전의 생활상은 어쩌면 이렇게 놀라울 수 있는가? 그때 가정마다 자가용 한 대를 갖고 매일 매연으로 자연을 망가뜨리고 1년에 수천 명을 사고로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던데, 장거리를 철도나 지하철 또는 환경친화적 버스로, 단거리를 자전거로 해결하고 특별한 경우에만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요즘 같은 시대에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운전하느라 몸을 괴롭히는 동시에 통근시간을 다 운전대를 잡으면서 낭비한 것이 아니었던가? 대길님은 요즘 퇴근길에 해외(즉 동아연합 바깥)에서의 거래에 긴요하다는 아랍어를 테이프로 익히느라 한창이다. 학교 시절부터 익혀온 중국어나 일본어와 너무 달라서 힘들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아랍어·스페인어·베트남어 중에서 하나라도 잘 알아야 일 처리가 제대로 된다.
회사 복도에서 대길님은 진옌(金燕) 책임자와 마주친다. 참, 부모 시대에 사회적 ‘어른’들과 이야기할 때 직급에 ‘님’자를 붙여 부르지 않았던가? 사장님, 회장님, 대리님, 교수님, 선생님, 기자님…. 생각해보면 그 캄캄했던 조선시대의 대감, 영감, 진사들과 뭐가 달랐나? 그런데 2020년대에 민중정당이 집권한 뒤 타이틀 문화가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요즘은 흔적도 안 남았다. 아들이 가끔 전화해서 들려주는 이야기에 따르면 학교에서도 학생들이 교사 박슬기에게 선생님 대신 그냥 ‘슬기님’이라고 한단다. 회사도 상사, 부하 개념이 모호해지고, 한 부서의 일을 총괄하는 사람을 책임자로 부르고, 직접 이야기할 때도 이름에 님자를 붙일 뿐이다. 더군다나 대길님이 다니는 부서의 책임자가 베이징 출신인데, 거기에는 호칭 체계가 애당초부터 한국만큼 복잡하지 않았다.
비행기 여행이 사라진다
참, 반세기 전 같으면 진옌님이 ‘외국인’으로 불렸을 텐데, 동아시아 안에서 국경이 모호해진 요즘에는 그것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물론 그렇다고 외국인 개념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대개 비인기 직종으로 밀려 있는 동남아나 아프리카 등지 출신들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은 계속 사회에서 문제를 만들고 있다. 주요 정당들이 경기도 남부 지역의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동네를 대표하는 소장파 이주민 정치인들을 아무리 영입해 공천을 주어도, 학교에서 의무 언어 과정(한국어·중국어·일본어)에 아랍어를 제1외국어로 곧 지정하겠다고 아무리 약속을 해도, 인기 직장에서 인종적 소수자들을 위한 할당을 아무리 만들어도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우르두(Urdu·파키스탄의 공용어)와 벵골말(bengali·방글라데시의 공용어)이 섞인 그들의 한국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의 벽은 아직도 완전히 허물어지지 않았다. 대길님 마음속에서 인종 문제에 대한 무거운 느낌 못지않게 또 한 가지 미안한 감정은 옛날에 ‘북한’이라 불렀던 지역 출신의 노동자, 농민들이 최근까지 당해온 고생들에 대한 것이다. 평양 간부나 인텔리 분자 출신들이야 베이징이나 서울에서 섞여 살아도 별로 표시나지 않지만 수십 년 동안 이북 지역을 미국으로부터 지켜내는 자존심으로 살아온 평민들의 후손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왜 이토록 고생해야 했던가? 죄책감이 크지 않을 수 없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은 이미 역사가 되어 한반도는 하나가 됐지만, 이북에서 통용되던 한 제도는 진화를 거듭해 아주 달라진 모습으로 살아남았다. 다름 아닌 이른바 ‘배급’이다. 요즘 ‘사회적 임금’이라고 불리는 제도는 어떻게 보면 배급제를 계승한 것인데, 이 사회적 임금을 고등학교 1학년부터 죽을 때까지 모두들 받는다. 배급 시절과 달라진 것은, 굳이 직장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재충전을 해도 사회적 임금을 그대로 받는다는 것. 직장까지 다닌다면 거기에 임금 가산점이 붙고, 나이 들어 직장을 그만둬도 가산점은 직장 경력만큼 붙는다. 몸 어려우신 님(옛날에 그런 분들을 ‘장애인’이라고 불렀나?)의 경우에도 약간의 가산점이 붙는데다 사회복지 사무소가 고용한 봉사자 몇 사람이 도와주고 시간을 같이 보낸다. 옛날의 야만적인 시절에 남성이라면 필수적으로 군대에 끌려가서 살인 기술을 익혀야 했지만 요즘은 몇 개월간의 사회봉사는 남녀 고등학생들에게 그냥 하나의 필수적 통과 과정이 됐다. 이 사회적 임금으로는 기본적 의식주와 다소의 여가 활동은 해결되지만 비행기를 타고 어디론가 장거리로 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가산점이 잘 붙는 직장인도, 비행기표를 살 만한 여유가 있어도 자주 타지 못한다. 고도의 온난화와 자원 고갈에 직면한 판에 사회가 불요불급의 비행기 여행과 같은 사치를 엄격히 통제할 수밖에 없다. 하기야 유럽이나 아프리카의 어느 구석이나 당장 휴대용 컴퓨터 스크린에 떠올릴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오존층을 파괴하면서 거기까지 비행기로 갈 필요까지 있는가? 환경 의식이 이미 몸에 밴 사회에서 1년 할당량인 한두 차례 이상으로 비업무 비행기 여행을 하려는 사람도 별로 없다.
아내는 멋진 섹스를 즐기고 있겠지…
대길님이 밤늦게 집에 왔는데 아내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제2 남자친구와 시간을 같이 나누는 것인가? 야만 시대에는 그걸 ‘간통죄’라 불렀겠지만 개인의 성적 교류가 어느 정도까지는 다양해도 좋다는 것이 통념이 되고, 같은 여성과 다양한 수준의 관계를 가진 남성들끼리 친목모임도 만드는 요즘 같은 시절에 아내가 지금쯤 멋진 섹스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독서 삼매에 빠지기를 좋아하는 대길님은, 무상 의료가 아직 없었던 20세기 후반에 한 젊은 여성이 오빠의 병원비를 대주기 위해 자기 몸을 사창가에 팔았다는 것을 줄거리로 한 역사소설을 책장에서 꺼내 읽는다. 참, 이 땅에서 사람들이 서로 팔고 사고 죽이고 괴롭히고 짓밟았던 암흑의 시절이 끝난 지 아직 오래되지 않았구나…. 이 순간에 대길님은 잠이 들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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