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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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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대선의 지렛대였다

등록 2005-09-28 00:00 수정 2020-05-03 04:24

미국의 외교정책 전문가가 말하는 군인 맥아더, 그 평범함과 끔찍함
개인의 정치적인 야심을 위해 백악관과 충돌하며 막무가내로 밀어붙여

▣ 마이클 샬러/ 미국 애리조나대학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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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서 미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한 역할에 대한 평가는 한국인들에게 매우 중요하고 흥미로운 역사적 주제임이 틀림없다. 나는 지난 1990년에 출판된 <더글러스 맥아더 - 극동의 장군>(국내 출판·2004년 이매진)에서 이 문제를 다룬 바 있다.

한번도 유엔과 작전에 대해 협의 안 해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를 한국의 유엔과 미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했을 때 그는 70살의 노인이었다. 이는 그가 일본과 극동에서 맡은 세 번째 ‘감투’였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정규직이 아니었다. 전쟁 기간 동안 실제 업무에서 나이든 노인이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맥아더는 전성기가 이미 지난 상태였고, 당연히 이 세 가지 역할을 적절하게 수행할 수 없었다. 2차대전 동안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트루먼은 맥아더를 정치적으로 꼴보수에다 신문에 이름을 올리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으로 취급했다. 트루먼은 보좌진에게 맥아더를 유엔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은 공화당의 정치적 압박을 막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트루먼은 하원의 공화당원들이 민주당의 중국과 유럽 정책에 대한 비난을 멈추게 하는 데 맥아더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트루먼의 실책이었다. 공화당은 그의 정책을 꾸준히 비판했고, 맥아더에게 충분한 지원과 격려를 하지 않는다는 또 다른 비판을 더했기 때문이다.

전쟁 초기, 맥아더는 그의 권위를 최대한 활용해 지휘계통상 그의 상위에 있는 군과 민간인 상급자들의 조언을 듣지 않으려 했다. 그는 한번도 유엔과 작전에 대해 협의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일을 먼저 저지른 뒤, 미국 정부가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따르게 만드는 식으로 일을 했다. 전쟁 초기부터 그는 미군이 한국에 좀더 광범위하게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목표는 아시아 전역에 걸친 반공산주의 십자군을 결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대만을 방문해 중국 국민당 군대를 한국전쟁에 참여시키려 했는데, 이러한 움직임들이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맥아더의 의중을 꿰는 한 열쇠가 될 것이다. 그는 중국에 군사적인 반응을 일으키기 위해 애를 썼다. 맥아더는 병사들에게 “38선을 넘으라”고 명령하기 전부터, 보좌관들에게 “중국이 전쟁에 참여해 그가 중화인민공화국을 쓰러뜨릴 기회를 주길 바란다”고 비밀리에 말하곤 했다. 그의 목표는 북한과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을 무너뜨려, 1952년 대선 출마를 위한 지렛대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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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행정부 역시 미국이 38선을 넘어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면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이득을 알고 있었다. 트루먼은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 같은 정치가에게 그가 공산주의자를 달래려고 하는 유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면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정치적 목표들이 있었다. 먼저 베이징과 모스크바에 미국이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에 비싼 대가를 치를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었고, 일본과 서독 등 우방들에게 미국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었다. 미국 유권자들에게는 민주당이 공산주의를 무너뜨리고 빨갱이들의 속박에서 다른 나라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을 확신시킬 수도 있었다. 분명히 트루먼과 그의 조언자들은 중국이나 소련과 대규모 전면전을 벌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도 맥아더처럼 북한에 손쉬운 승리를 거둔 뒤, 많은 정치적 배당금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중국이 참전하기를 기도한다”

1950년 10월부터 두달 동안 미군이 압록강까지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중국이 전쟁에 개입할 수 있다는 수많은 신호가 쏟아졌다. 트루먼은 곧 조심스러워졌지만, 맥아더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 그는 중국의 전쟁 개입 가능성을 깨닫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아왔다. 그렇지만 나는 맥아더가 중국이 전쟁에 뛰어들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맥아더가 중국의 개입을 일종의 ‘윈윈’ 게임으로 생각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중국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는 북한을 해방시키고 한국을 통일했다는 존경을 받게 된다. 설사 중국이 개입한다고 해도 그는 워싱턴이 확대된 전쟁에서 그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만에 하나 워싱턴이 맥아더를 돕지 않아도 별로 나쁠 것이 없다. 이 경우 맥아더는 유엔 사령관직을 사임하거나 해임당하는 방식으로 중국이라는 붉은 용과 싸우려다 트루먼 행정부의 겁쟁이들과 배신자들 때문에 무장해제된 순교자처럼 보일 수 있었다.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그는 영웅이 될 수 있었고 1952년 미 대선에서 강력한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다. 그는 1950년 11월 그의 한 참모에게 “나는 중국이 참전하기를 밤마다 기도하고 있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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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참전 이후 승리를 거두며 미군을 38선 아래로 몰아내자 맥아더는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사기꾼이었고, 영국과 같은 동맹국은 겁쟁이였으며, 트루먼 대통령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양보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트루먼에게서 더 큰 군사 작전권을 얻기 위해 1951년 미국의 군사적인 상황을 실제보다 더 나쁘게 보이려고 했다.

1951년 3월이 되자 전쟁은 분명히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미국은 엄청난 군사적 공세를 퍼붓지 않고서는 중국군을 북한에서 몰아낼 수 없었고, 중국도 미국·유엔군·한국군을 분쇄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트루먼과 애치슨은 이를 깨닫고 38선 주변에서 정전협정을 맺기로 하고 중국에 접근했다. 맥아더에게 이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그는 전쟁을 멈추는 군대의 사령관이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맥아더는 ‘화해’의 책임이 그에게 돌아올 것을 두려워했다. 그보다는 문제를 일으켜 사령관 자리에서 해임되고 순교자의 이미지로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것이 훨씬 나은 대안이었다. 맥아더는 1951년 3~4월에 공공연히 사보타주를 일으켰고, 공개적으로 트루먼 대통령과 그의 정책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 중국(아마도 소련을 포함해)을 상대로 원자탄을 쓸 수 있는 권한을 요구했다. 4월이 되자 트루먼과 그의 참모들은 맥아더를 기만적이고 이기적이며 정치적 이익을 위해 핵무기를 쓸 수도 있는 음모자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1951년 봄에 트루먼도 중국의 위협과 소련의 일본 봉쇄에 두려움을 느꼈고, 미군의 전선 사령관에게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비상 접근권을 주는 것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트루먼과 그의 핵심 참모들은 맥아더를 신뢰하지 않았고, 핵무기 방아쇠 근처에 맥아더의 손이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맥아더는 공화당 지도부에 트루먼에 대한 매우 분파적인 공격이 담긴 편지를 보냈고, 트루먼은 이로부터 맥아더의 해임에 대한 양해를 끌어낼 수 있었다. 트루먼은 후임으로 리지웨이 장군을 임명했는데, 그에게는 맥아더가 요구했던 핵무기 통제권을 허락했다.

나라면 동상을 만들지 않았을 것

1951년 봄과 여름 내내 이어진 맥아더의 청문회 증언과 대중 강연은 그가 세계 정치와 힘의 역학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퇴물이라는 것을 알릴 뿐이었다. 그는 그의 군사 작전권과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이 그의 경력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미국 대중들은 결국 그의 화려한 외관 너머를 볼 수 있었고, 그에 대한 정치적 지지도 곧 시들해졌다. 1952년 공화당 모임에서 그는 연사로 초대됐지만, 대의원들은 그 자리에서 처음엔 그의 참모였다가 지금은 가장 큰 정적으로 등장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대통령 선거 후보자로 지명했다.

나의 맥아더에 대한 견해는 그가 전쟁 전문가였다기보다는 대중 접근에 능한 정치인이었다는 것이다. 태평양전쟁에서 그의 초기 행동들은 엉망이었다. 태평양에서 미국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맥아더의 리더십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군사적 우위 때문이었다. 전후 일본에서 그의 역할이 그가 아시아에서 거둔 가장 성공적이고 이로운 성과였을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그의 활동은 평범함과 끔찍함 사이를 오갔다. 내가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맥아더 동상 철거 작업에 동참할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절대로 그를 위해 동상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며, 한국 국민들이 그를 위대한 친구이자 영감 있는 지도자로 여기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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